한국 대선 한 달여 뒤인 지난 1월22일 이스라엘에서는 총선거가 있었다. 다들 극우정당 ‘리쿠드’(통합) 소속인 전임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의 낙승을 점쳤다. 이란과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식의 안보 공세 덕분에, 이스라엘 안에 점증하는 보수 여론이 네타냐후 지지표로 결집하리라고 내다봤다. 총선을 석 달 앞두고 리쿠드가 또 다른 주요 극우정당 ‘이스라엘 베이테누’(우리 조국 이스라엘)와 전격 합당함으로써 이런 관측은 더욱 힘을 얻었다.
‘이스라엘 안철수’ 라피드 돌풍
하지만 결과는 네타냐후에게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여당인 ‘리쿠드 이스라엘 베이테누’가 가장 많은 득표를 하기는 했지만(23.32%), 의석이 11석이나 줄었다(전체 의석은 120석). 극우 성향 정당들을 다 합쳐야 겨우 과반수를 얻는다(61석). 그래서 총선이 끝난 지 한 달 가까이 되는 지금까지도 네타냐후는 연립정부 구성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이런 결과를 낳은 첫 번째 요인은 신생 중도정당 ‘예시 아티드’(미래는 있다)의 돌풍이다. 창당한 지 1년도 안 된 이 당은 ‘이스라엘의 안철수’ 격인 방송인 출신 대표 야이르 라피드의 인기에 힘입어 원내 제2당으로 급부상했다(19석, 14.32%). 주변국들과의 긴장보다는 협상 쪽을 선호하는 이 당과 그 왼쪽 정당들이 차지한 의석이 모두 합해 59석이다. 극우 세력과 팽팽한 힘의 균형을 이룬 것이다.
그런데 라피드 돌풍에 가려 주목받지는 못했지만 이런 균형을 만들어낸 또 다른 중요한 요인이 있다. 오래된 좌파정당이며 평화 세력의 정치적 구심체 ‘메레츠’(에너지)의 선방, 그리고 공산당을 비롯해 아랍계 시민들의 지지를 받는 정당들의 건재다.
사실 이스라엘의 대표적 좌파정당은 따로 있다. ‘히스타드루트’(이스라엘 노총)의 지지를 받는 정당인 노동당이다. 같은 이름을 지닌 다른 나라 정당들과 달리 이 당은 사회민주주의 외에 또 다른, 아니 더 중요한 이념을 지녔다. 중동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한다는 시온주의가 그것이다. 이 당의 전신 ‘마파이’(이스라엘 노동자당의 히브리어 약칭)는 시온주의 이념에 따라 이스라엘 건국을 주도했다. 아랍과의 전쟁을 이끈 유명한 이스라엘 정치인들, 다비드 벤구리온, 골다 메이어 등이 마파이 소속이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이스라엘에서는 마파이와 그 후신인 노동당이 정권을 독차지했다. 그러다가 1970년대 말부터 리쿠드가 부상해 두 당이 번갈아가며 집권했고, 이제는 판세가 완전히 역전됐다. 노동당 소속의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1994년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야세르 아라파트 의장과 오슬로협정을 맺은 순간이 어쩌면 이 당의 마지막 절정이었다. 1년 뒤 라빈 총리가 암살당하고 새로 들어선 팔레스타인 자치기구와 이스라엘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자 노동당은 리쿠드에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기고 말았다. 이후 노동당은 극우 세력의 안보 공세에 부화뇌동하는 모습만을 보였다.
이번 총선에서 노동당은 여성 대표 셸리 야히모비치를 내세워 반전을 꾀했다. 처음에는 새 대표 카드가 먹히는 듯싶었다. 하지만 라피드 바람이 일자 노동당 지지율은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말았다. 노동당은 잠재 지지층 중 다수를 예시 아티드에 빼앗겨 3위에 머물렀다(15석, 11.39%).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노동당의 현재 모습은 중도정당을 표방하는 예시 아티드와 별반 차이가 없다. 사회·경제 정책 측면에서 노동당은 오래전부터 영국 노동당식 ‘제3의 길’ 노선을 받아들인 상태다. 대외 정책 측면을 보면, 리쿠드와 확연히 구분되는 평화 노선도 아니다. 이런 입장이라면 유권자들로서는 차라리 기성 정치인 냄새가 덜 나는 라피드의 당을 지지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했다.
‘두 국가 해법’의 메레츠 약진
이런 상황에서 또 다른 좌파정당 메레츠는 의석을 3석에서 6석으로 두 배 늘렸다(득표율 4.54%). 메레츠도 노동당만큼이나 그 연혁이 오래된 정당이다. 이 당의 모태는 이스라엘 건국 시기에 창당한 ‘마팜’(통합노동자당의 히브리어 약칭)이다. 마팜 역시 마파이와 마찬가지로 시온주의를 표방했다. 하지만 마파이에 비해 ‘좌파’ 시온주의라 할 만한 입장을 보였다. 아랍 세계와의 대결보다는 공존을 더 강조했고, 그 일환으로 이스라엘 영토 내 아랍계 시민들의 권리를 강조했다.
메레츠는 1992년 마팜이 다른 소수 좌파 세력들을 통합해 재편하며 등장했다. 마팜이 시온주의와 함께 마르크스주의를 이념으로 내세웠던 데 비해 메레츠는 사회민주주의를 내걸었다. 이 점에서는 많이 온건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회의 뜨거운 쟁점인 평화에 대해서만큼은 과거보다 더 선명한 입장을 내세웠다. 마침 라빈 총리가 팔레스타인과 협상에 나서던 상황에서 메레츠는 이스라엘 내 평화운동을 정치적으로 대변하기 시작했다.
메레츠도 이번 총선에서 노동당처럼 여성 대표를 내세웠다. 바로 인권운동, 여성운동으로 명성을 쌓은 자하바 갈 온이다. 되도록 좌파 색채를 지우려 한 야히모비치와 달리 갈 온은 메레츠가 ‘좌파’정당임을 강조했다. 또한 오슬로협정으로 시작된 ‘두 국가 해법’, 즉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성사시켜 유대 국가와 팔레스타인 국가의 공존을 추구하자는 방침을 선명히 내걸었다. 이런 정당이 단순 생존을 넘어 당세를 확장했다는 것은 이스라엘 안에 평화를 지지하는 흐름이 분명히 존재함을 보여주는 지표다.
이와 함께 주목해야 할 것은, 아랍계 시민들의 지지를 받는 정당들이 모두 합해 10%에 가까운 득표를 기록했다는 사실이다. 그 정당으로는 통합아랍명부-타알, 하다시(‘평화와 평등을 위한 민주전선’의 히브리어 약칭), 발라드(‘민족민주연합’의 히브리어 약칭)가 있다. 이 중 하다시는 이스라엘 공산당이 다른 급진적 평화운동 세력, 좌파 세력들과 함께 만든 연합전선이다. 공산당은 선거 때마다 당의 이름이 아니라 이 전선의 이름으로 출마하며 3% 안팎의 지지를 얻었는데, 이번에도 이 득표율을 유지하며 4석을 차지했다. 4명의 당선자 중 3명은 아랍계이고 유대계는 1명이다.
시온주의 비둘기파의 한계
통합아랍명부-타알이나 발라드는 좌파정당이라기보다는 아랍민족주의 정당에 가깝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회 내의 소수자인 아랍계 시민(인구 중 20.4%)의 권리를 쟁취하려 한다는 점에서 이 정당들은 분명 진보적 역할을 맡고 있다. 어찌 보면 그 어떤 세력보다 이스라엘 체제에 위협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스라엘이 유대인만의 국가가 아니라 유대계와 아랍계가 공존하는 다인종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2009년 선거관리위원회는 두 정당의 인가를 취소하기도 했다. 대법원에서 결국 뒤집히고 말았지만 말이다.
메레츠와 하다시, 그리고 아랍계 정당들의 이번 총선 득표율을 합하면 14%에 가깝다. 의석수는 17석이다. 결코 만만히 볼 숫자는 아니다. 정책도 비슷한 것이 많다. 이 정당들 모두 당분간은 두 국가 해법을 성실하게 추진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그래서 이스라엘 바깥의 진보적 논평가들은 이들의 연대에 대해 희망 섞인 관측을 내놓기도 한다.
하지만 바깥에서 보는 것처럼 그렇게 쉽게 성사될 수 있는 과제는 아니다. 갈 온 대표도 사안별 연대 이상의 협력 가능성(가령 선거 연합)은 없다고 못박고 있다. 바로 여기에 이스라엘 내 평화-좌파 세력의 딜레마가 있다. 메레츠가 원칙 있는 평화 옹호 세력이라고는 하지만,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들은 시온주의의 비둘기파다. 즉, 이들 역시 시온주의의 기본 전제를 공유한다. 이스라엘을 유대인 국가로서 지키고 유지하려 한다. 다만 리쿠드나 노동당이 아랍 세계와의 무력 대결을 통해 이를 실현하려 한다면 메레츠는 평화적 해결 방식을 추구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것은 저명한 소설가이자 메레츠의 오랜 지지자인 아모스 오즈의 발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오즈는 이번 총선에서 메레츠를 지지하는 핵심 이유로, 이스라엘 정계에서 메레츠만이 두 국가 해법을 강력히 지지하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그는 중동에서 유대인 국가를 유지하려면 팔레스타인 독립을 인정하고 이들과 공존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고 주장했다. 리쿠드나 노동당은 팔레스타인인들의 국가 수립을 막음으로써 오히려 유대인 국가의 장기 지속 가능성을 파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시온주의 비둘기파에게 아랍계 정당들의 성장은 무엇을 뜻하겠는가? 그것은 곧 두 국가 해법과는 전혀 다른 해결책, 즉 ‘한 국가’ 해법의 현실성에 대한 살아 있는 증거다. 한 국가 해법이란 유대계와 아랍계가 공존하는 하나의 국가를 세우자는 것이다. 한때 두 국가 해법을 지지했던 팔레스타인의 지성 에드워드 사이드도 만년에는 한 국가 해법만이 현실적이라고 역설했다.
남아공 백인의 운명처럼
이것은 곧 유대인 국가의 해체를 뜻한다. 즉, 시온주의의 폐기다. 이 다인종 국가에서는 결국 아랍계가 유대계 수를 압도할 것이다. 이미 전 국민의 5분의 1을 넘어선 이스라엘 내 아랍계 시민들의 존재가 그 전조다. 이들의 지지를 받는 정당들의 성장은 인구 분포의 역전이 동반할 정치적 미래를 예고한다. 이 미래 국가에서 유대계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백인들과 같은 운명이 될 것이다.
평화를 위해서 국가 구성 자체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것, 이는 현실정치 세력들이 감내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요청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스라엘 안팎의 다양한 좌파-평화 세력이 전쟁광들에게 맞서려면 이 요청을 우회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사실은 더욱더 첨예하게 다가올 것이다.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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