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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거21] 카다피의 화려한 무대

등록 2009-09-29 14:59 수정 2020-05-03 04:25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최고지도자. 사진 연합/AP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최고지도자. 사진 연합/AP

1969년 9월1일, 약관 스물일곱 나이에 왕정을 무너뜨렸다. 이후 40년, 오롯이 국제사회의 이단아로 살아오셨다. 그분,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최고지도자가 9월23일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화려한 ‘무대 매너’를 선보이며 유엔총회 데뷔전을 성공적으로 치렀다. 이쯤되면 ‘만능 엔터네이너’로 불릴 자격 충분하시다.

2003년 개정된 유엔 의전규정에서 각 회원국 정상의 총회장 연설 시간은 최대 15분으로 제한돼 있다. 이날 하루에만 이명박 대통령을 포함해 각국 정상 30명의 연설이 예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다피 그분에게 이번 총회는 특별했다. 생애 첫 아메리카 나들이에, 유엔 무대도 처음이신 터다. 하실 말씀, 오죽이나 많으셨을까. 그간의 부재를 만회하자면 의전규정 따위는 잠시 접어두셔도 좋았다. 알리 압두살람 트레키 리비아 아프리카연맹장관이 지난 6월 이번 총회 의장으로 선출됐으니, 배후마저 든든하시다. ‘왕 중의 왕’이란 소개말을 듣고도 한담을 나누시며 여유를 부리신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일단 ‘무대’에 오르시니, 혼신을 다해 ‘공연’에 임하신다. 현란한 ‘개인기’로 좌중을 뒤흔드신다. 만장하신 회원국 대표단 앞에서 유엔헌장 사본을 북북 찢으신 건 시작에 불과했다. 안전보장이사회는 ‘알카에다와 다름없으니 테러조직’이란 유권해석도 내놓으셨다.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과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는 이라크 침공의 죄를 묻기 위해 법정에 세워야 하고, 서방 각국이 과거 아프리카 대륙을 식민지로 수탈한 배상금은 7조7천억달러 정도가 적당하다고도 하셨다.

이 밖에 신종 플루는 생물학무기로 서방 군대가 만들어낸 게 아니냐는 의문도 품으셨고,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을 누가 암살했는지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하셨다. 당신에 앞서 연단에 올랐던 오바마 대통령에 대한 ‘축복’의 말씀도 잊지 않고 한마디 내놓으셨다. “이제 더 이상 흑인들도 버스 맨 뒷줄에 앉지 않아도 된다. 미국민들은 흑인을 대통령으로 만드셨다. 우리 아프리카인들은 이를 대단히 뿌듯하게 생각한다.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의 종신 대통령으로 남는다면 정말 행복하겠다.” 꼭 96분 동안 열변을 토하셨는데, 통역사도 지쳐 교체될 정도였단다. 외길 인생 40년, ‘허명’이 아니었다.

한편, 영국 이 유엔 대변인실의 설명을 따 전한 내용을 보면, 지금까지 유엔총회에서 최장시간 연설을 한 국가 수반은 1960년 혁명 직후 유엔을 찾은 피델 카스트로 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4시간29분)이다. 국가 수반이 아닌 인사까지 포함하면 기록은 2배가량 길어진다. 지난 1957년 자국의 카슈미르 정책에 대한 설명에 나선 크리슈나 메논 유엔 주재 인도 대사께선 막간 없이 러닝타임 9시간을 넘기셨단다. 아침 먹고 출근하셨던 분들, 점심·저녁 다 드시고 오시도록 연단을 지키셨다는 얘기다.

정인환 기자 blog.hani.co.kr/blogthe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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