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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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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사는 사람도 살게 해줍니다


주택보급률 110%·자가점유율 90%를 실현한 싱가포르, 버스 운전기사 스티븐 림 가족의 따뜻한 집
등록 2009-01-01 13:37 수정 2020-05-03 04:25

“네 생계비는 네가 알아서 벌어. 아무도 널 돌봐줄 수 없어.”
카린 후(41)는 30년 전 오빠가 했던 말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가 11살 때, 막내손녀 카린을 끔찍히 아끼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러나 카린은 할머니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6개월 뒤에, 교통사고를 당한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러야 했다. 또 4개월 뒤엔 어머니도 아버지를 따라갔다.

무일푼 고아로 남겨진 11살 소녀

“세상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었어요.”
그러나 ‘슬픔’이란 감정은 그에게 사치였다. 당장 먹고살 일이 급급했다. 5명의 친오빠가 있었지만 모두들 자기 입에 풀칠하기도 바빴다. 돌봐줄 친척도 없었다. 카린의 부모는 중국 하이난에서 싱가포르로 온 이민자로, 친척들은 모두 하이난에 있기 때문이다. 카린은 돈을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광고 모델도 했다. 무일푼 11살 고아 카린은 그 뒤 어떤 삶을 살게 됐을까.

국민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서 좋은 집에 대한 싱가포르 사람들의 열망도 커져갔다. 그래서 싱가포르 정부는 1990년부터 수영장, 헬스장 등을 갖춘 콘도를 많이 짓기 시작했다.

국민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서 좋은 집에 대한 싱가포르 사람들의 열망도 커져갔다. 그래서 싱가포르 정부는 1990년부터 수영장, 헬스장 등을 갖춘 콘도를 많이 짓기 시작했다.

물장난 치는 아이들의 천진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야외 수영장, 몸매 관리하는 사람들로 가득 찬 헬스장,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하는 바비큐장…. 휴양지 리조트에서나 볼 법한 평화로운 풍경에 마음도 여유로워진다. 이곳은 어딜까. 싱가포르 북서쪽 ‘부킷판장’(Bukit Panjang)에 위치한 ‘메이스프링’ 콘도다. 바로 이곳에 카린이 살고 있었다.

“들어오세요. 집이 지저분해요.”

그의 말과 달리 집 안은 깨끗했다. 현관에 들어서자 장식장 위에 놓인 큰 불상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고풍스러운 갈색 식탁과 장식장, 검정색 쇼파가 조화를 이뤄 무거운 듯 차분한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집 안 공기가 무거운 이유는 다른 데도 있었다. 카린의 남편이 안방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카린은 “남편이 밤늦게까지 일을 하기 때문에 부족한 수면을 낮잠으로 보충한다”고 설명했다.

초등학교 버스 운전기사인 스티븐 림(44·가명)은 하루 평균 14시간씩 일을 한다. 2개의 학교와 계약을 한데다, 밤에는 관광객을 공항에서 픽업하는 일도 하기 때문에 노동 시간이 길다. 카린은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데, 일거리가 있을 때에만 하기 때문에 노동 시간이 길지 않다.

카린의 가족은 외견상 싱가포르 가족의 전형이다. 2005년 싱가포르 인구조사에 따르면, 부부의 약 44%가 맞벌이를 하고, 이들의 평균 자녀 수는 2.2명이다. 일을 하지 않는 노인 등 실업 인구를 감안하면, 절반 이상의 싱가포르 부부가 맞벌이를 하고 있다는 얘기다. 같은 해 맞벌이 부부의 평균 월수입은 싱가포르 달러(이하 ‘달러’는 싱가포르 달러를 뜻함)로 7600달러(600만~700만원). 맞벌이를 하지 않는 가족의 평균 수입인 4020달러보다 많다. 카린의 경우에도 11살 된 아들과 10살인 딸이 있고, 수입도 8천달러 내외다.

‘어떻게 이런 좋은 집에서 살 수 있게 됐냐’고 묻자, 카린은 “중앙연금준비기금(CPF·Central Provident Fund) 덕분”이라고 말했다. CPF란 매달 근로소득의 일정액을 예금해야 하는 의무적인 저축이다. 노후 대비를 위해 마련된 우리나라의 국민연금과 비슷한 제도로, 2008년 7월 현재 고용인은 월급의 20%, 고용주는 월급의 14.5%를 CPF 세금으로 납부하고 있다.(상자기사 참조).

CPF는 카린이 집을 사는 데 어떤 도움을 준 것일까. 싱가포르에서 집을 사기 위해 받을 수 있는 융자는 ‘주택개발청(HDB·Housing Development Board) 할인 융자’와 ‘은행 융자’ 두 가지가 있다. 전자의 경우 이자율은 2.6%로 은행 대출에 비해 낮지만, 가구당 월소득이 8천달러를 넘으면 안 되는 등의 조건이 있다. 카린은 은행에서 대출을 받은 뒤, 원금과 이자를 이 CPF를 통해 갚아나가고 있었다. 즉, CPF 계좌에서 매달 납부금이 빠져나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월급에서 돈을 떼내 할부금을 내는 것과 CPF를 통해 돈을 갚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자율 2.6%, 55살까지 느긋한 융자

카린이 집을 샀던 2005년, 콘도의 시세는 33만~50만달러로 당시 환율로 치면 2억~4억원 정도다. CPF를 통한 융자는 공시지가의 90%까지 돈을 빌릴 수 있고, 이 돈은 55세가 되기 전까지 갚으면 된다. 은행 대출에 비해 융통할 수 있는 금액이 크고, 천천히 조금씩 갚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다. 물론 조건도 있다. 매달 갚아야 하는 빚이 월급의 35% 이상이 되면 안 된다. 예를 들어 48만달러짜리 콘도를 사기 위해 4만8천달러를 지급하고 나머지를 연리 4.5%에 25년 상환 조건으로 대출했다면 매달 갚아야 하는 돈은 2400달러다. 만약 월소득이 6천달러면 매달 갚아야 하는 빚이 월급의 40%로 35%를 초과하기 때문에 CPF를 이용할 수 없다. 반면 월소득이 8천달러면 빚이 월급의 30%이기 때문에 CPF를 통해 집을 살 수 있는 자격이 된다.

예식장처럼 보이는 이곳은 HDB 공공아파트 1층이다. 주차장처럼 뻥 뚫린 이곳에서 아파트 주민들은 결혼식·장례식도 하고 학생들은 공부도 한다.

예식장처럼 보이는 이곳은 HDB 공공아파트 1층이다. 주차장처럼 뻥 뚫린 이곳에서 아파트 주민들은 결혼식·장례식도 하고 학생들은 공부도 한다.

콘도로 이사 오기 전까지 카린 가족은 ‘HDB’라는 공공아파트에서 살았다. HDB 아파트는 주택개발청이 정부 소유의 토지에 아파트를 지어 분양하는 값싼 주택이다. 싱가포르가 주택보급률 110%, 자가점유율 90%를 실현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전체 주택의 80%를 차지하는 HDB 아파트 덕분이다.

이에 비해 민영아파트인 콘도는 HDB 아파트에 비해 수영장, 헬스장 등 각종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고 그만큼 더 비싸다. 국민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서 더 좋은 집에 대한 열망이 커져 갔고, 이를 반영해 정부는 1990년대부터 더 많은 콘도를 짓기 시작했다. 메이스프링도 그중 하나로 1999년에 완공됐다.

“남편이랑 저랑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덕분에 좋은 집으로 이사 올 수 있게 됐죠. 하지만 하루에 14시간씩 일하는 남편이 가끔 안쓰러워요.”

과중한 노동에 시달리는 남편도 주말에는 꼭 쉰다. 테니스광인 그는 친구들과 함께 테니스를 치면서 주말을 보낸다.

운동·오락·연회 타운 클럽 월 6만원

“남편은 애들과 노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아요. 남편이 테니스 치러 나가면, 저와 아이들은 ‘래플스 타운 클럽’(Raffles Town Club)에 가서 주말을 보내거나 소풍을 가죠.”

래플스 타운 클럽은 어떤 곳일까. 카린과 함께 오차드로드 근처에 있는 래플스 타운 클럽에 갔다. 돔 모양의 궁전 같은 건물이 나타났다. 실내도 우아한 드레스를 입은 공주님이 나타날 것처럼 고풍스러웠다. 곳곳에 쇼파가 배치돼 사람들이 차를 마시며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또 헬스장·수영장·볼링장·테니스장·스쿼시장 등 운동시설과 영화관·오락실·당구장 등 오락시설, 레스토랑과 연회장도 있었다.

“전 이곳에서 주로 영화를 보거나 볼링을 치고, 아이들은 수영을 하거나 오락을 해요.”

카린이 한 달에 내는 클럽 회비는 80달러(약 6만원)다. 비록 남편의 노동 시간은 길지만, ‘여가’라는 측면에서 카린 가족의 생활 수준은 높아 보였다. 게다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메이드’(maid)에게 집안일을 맡겨 카린은 더 많은 여가를 누릴 수 있었다. 메이드는 가정집에 상주하면서 청소, 빨래, 육아 등의 일을 하는 가사노동자로 대부분 필리핀·인도네시아 출신이다. 싱가포르 가구의 약 20%가 메이드를 둘 정도로 보편화돼 있다. 싱가포르도 여성의 사회 참여가 늘면서, 직장 여성들의 ‘저출산’과 ‘육아’가 사회문제로 대두됐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맞벌이 부부가 메이드를 고용할 경우 세금을 감면해주는 등 정부 차원에서 메이드 고용을 장려했다. 물론 싱가포르에도 ‘데이케어 센터’라는 보육원이 있지만, 가격이 700달러로 메이드를 고용했을 때 드는 비용 800달러와 별 차이가 없기 때문에 주부들은 메이드 고용을 선호한다. 카린 역시 육아 문제 때문에 10년 전에 인도네시아 출신의 메이드를 고용했다. 그러나 아이들도 성장했고, 남편이 메이드를 두는 걸 좋아하지 않아 얼마 전에 메이드를 내보냈다. 그래서 요즘 그는 바깥에서 일하는 시간보다 집안일을 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그러면서 한국 드라마도 많이 보게 됐단다.

“에 나오는 현빈을 너무 좋아해서 그가 광고하는 화장품도 써요. 그런데 의 최진실은 왜 자살한 거죠? 배용준을 좋아하냐고요? 난 그를 사랑해요. 하하. 농담이에요.”

카린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학교에서 애들이 돌아올 시간이 돼, 저녁 준비를 해야 한다”며 콘도 맞은편에 있는 쇼핑센터로 시장을 보러 갔다. ‘교육비에 대한 부담이 없냐’는 질문에 카린은 “사교육을 전혀 시키지 않고 있다. 교육보험을 들어서 대학교 등록금도 보험으로 처리될 것이기 때문에 큰 부담이 없다”고 말했다.

“아이가 원하기 전까지 사교육을 시키지 않을 거예요. 아이가 청소부가 되고 싶어하면 청소부를, 가수가 되고 싶어하면 가수를 시키지, 공부를 강요하고 싶지 않아요.”

물론 싱가포르의 모든 부모들이 카린과 같은 교육관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싱가포르도 교육열이 높기로 유명한 나라 중 하나다. 그런데 그 교육열, 아이를 옥죄는 한국 엄마들의 ‘극성’과는 다른 구석이 있었다.

카린과 동갑인 또 다른 싱가포르 주부 카렌 푸아(41)는 “교육 때문에 걱정이 많다”면서도 “애들에게 공부에 대한 압박감을 줄까봐 조심스럽다”고 말했다. 이런 엄마의 배려 때문일까. 미션스쿨에 다니는 카렌의 딸 커리사(14)는 예술 분야 특기생으로, 피아노도 잘 치고 성적도 좋아서 정부의 지원금을 받고 있다. 카렌은 “다른 학생들이 학비로 한 달에 150달러를 내는 반면 커리사가 내야 하는 돈은 고작 10달러”라며 “최근 들어 정부가 예체능 교육을 강조하면서 많은 지원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동생 브라이언(13)은 학교 축구부 골키퍼로 활동하고 있다. 음악학원을 제외하고 커리사와 브라이언 모두 학원을 다니지 않았다. 시험 기간에만 가끔씩 시간당 25달러를 주고 과외 선생님을 불러 부족한 공부를 보충할 뿐이다.

카렌 푸아 부부(왼쪽에서 5·6번째)는 매주 일요일 싱가포르 동부 템피스트에 사는 부모님 댁에 들러 저녁을 먹는다. 이날은 동생 부부도 함께했다.

카렌 푸아 부부(왼쪽에서 5·6번째)는 매주 일요일 싱가포르 동부 템피스트에 사는 부모님 댁에 들러 저녁을 먹는다. 이날은 동생 부부도 함께했다.

공공아파트 ‘HDB’에 사는 부모님

저녁 7시에 카렌의 남편 림긍요(41)를 만나 중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아이들이 교회 활동을 마치기를 기다리면서 근처 공원과 아파트 주변을 산책했다. 카렌 부부도 신혼 초에 이곳 우드랜드 지역의 HDB 아파트에서 살았단다. 싱가포르 북쪽에 위치한 우드랜드 지역은 우리나라로 치면 일종의 일산이나 분당 같은 외곽 신도시다. 아파트는 막 새로 지은 것처럼 깨끗하고 농구장, 공연장, 공원 등 편의시설도 잘 갖춰져 있었다. 아파트 1층은 주차장처럼 뻥 뚫려 있는데, 이 빈 공간은 다양하게 이용된다. 탁자와 의자, 음료수 자판기 등이 있어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주민들과, 기말고사 공부를 하는 고등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다음날에는 이 공간에서 화려한 결혼식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아파트 관리소에 40~50달러만 내면 아파트에서 결혼식을 올릴 수 있단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검소하게 결혼식을 올리는 모습도, 주거 공간을 다양하게 활용하는 아이디어도 인상 깊었다.

같은 HDB 아파트여도 구조와 평수는 제각각이었다. 20평 남짓한 아파트부터 복층으로 된 넓은 아파트까지 다양했다. 더 좋은 주거 환경에 대한 국민의 바람에 부응하기 위해 정부는 ‘HDB 아파트 업그레이드’ 정책을 펼쳤다. 5년마다 페인트칠을 하고, 위생 관리도 엄격하게 했다. 덕분에 ‘HDB는 서민이 사는 지저분한 공공아파트’라는 나의 편견은 점점 사라져갔다.

카렌 부부와 산책을 마치고 나니, 시계는 어느덧 밤 10시를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교회 활동을 마친 아이들을 데리고 카렌 가족의 집이 있는 ‘토파요’로 이동했다. 카렌의 집은 아담한 3층 주택이었다. 1층에는 부엌과 거실이, 2층에는 커리사의 방과 카렌 부부의 방이, 3층에는 아들 브라이언의 방과 서재가 있었다. 1층 거실의 빨간 쇼파와 크리스마스 트리가 아늑해 보였다. 그날 밤, 난 아기자기한 아기곰 ‘푸’ 인형으로 장식된 커리사의 방에서 편안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일요일인 다음날 아침 9시께 카렌 가족은 교회 근처에 있는 ‘푸드코트’(Food Court)라 불리는 식당가에 가서 아침 식사를 했다. 푸드코트에는 자리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중식, 일식, 양식, 인도, 말레이, 한식까지 다양한 국적의 메뉴들이 있는데, 가격은 2~5달러(약 2천~4천원)로 저렴했다. 패스트푸드처럼 카운터에서 주문을 한 뒤, 요리를 받아왔다. 토스트와 커피, 굵은 면에 달콤한 간장 소스가 얹힌 말레이 국수를 먹었다. 싱가포르는 외식 문화가 발달해서, 사람들이 집에서 직접 요리해 먹기보다는 외식을 선호한단다.

교회 예배를 마친 뒤 들른 카렌의 친정집은 템피스트에 있는 HDB 아파트였다. 점심 식사가 끝난 뒤 온 가족이 노래방 기계로 노래를 부르면서 소화를 시켰다. 카렌의 아버지는 노래를 부르고, 사위는 기타를 치고, 아이들은 할아버지의 노래에 맞춰 춤을 췄다. 더없이 즐겁고 화목해 보였다.

그리고 카렌에게 물었다. ‘싱가포르에서 사는 게 행복하냐?’고.

“싱가포르는 평화로운 곳이에요. 정부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지난 40년 동안의 발전과 성과를 무시할 순 없어요. 적어도 정부는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만큼은 해결해주니까요. 못사는 사람들도 살게 해주니까요. 누가 뭐래도, 난 이곳에서 사는 게 행복해요.”

만약에 한국이라면, 가능했을까

모든 싱가포르 가족들이 카렌의 집처럼 가족적이고 화목하지만은 않을 게다. 수영장 딸린 콘도에서 여가를 누리는 카린 같은 주부보다 HDB 아파트에서 남편의 얇은 월급 봉투로 알뜰하게 생활하는 주부들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런데도 자꾸 ‘만약 한국이라면’이란 가정법이 떠오른다. 만약 한국에서 무일푼 고아가 버스 운전기사 남편을 만나 열심히 일한다면, 10년 뒤엔 주상복합아파트에서 수영하는 여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을까? 돈을 많이 벌지 못하는 사람들도 ‘내 집 마련의 꿈’을 실현할 수 있을까? 사교육비에 투자하지 않고도 자녀를 명문 음악학교에 입학시킬 수 있을까? ‘만약에 한국이라면’ 말이다.



중앙연금준비기금은 무엇
노후 대비 + 내집 마련


1955년 7월1일부터 시행된 중앙연금준비기금(CPF·Central Provident Fund)은 초기에 싱가포르 노동자들의 노후 대비를 위해 마련됐다. 매달 일정액을 저축하면 노동부 산하 중앙연금준비기금위원회(CPF Board)에서 자금을 관리하고, 은퇴할 때 저축한 돈을 인출할 수 있다.
그러나 영국과 일본의 긴 식민지 기간을 거쳤던 싱가포르는 1965년 말레이연방에서도 탈퇴하면서 새로운 정치적 환경에 놓이게 된다. 대외적으로는 싱가포르에 적대적인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의 위협이 있었고, 대내적으로는 공산주의 세력과의 갈등이 깊어져만 갔다. 다민족 국가 특유의 인종 문제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휴화산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에게 새로운 국가에 대한 소속감을 강화하고 안정적인 삶의 기반을 마련해줄 필요가 있었다.
정치적 기반이 지금처럼 강하지 않았던 리콴유 전 총리의 인민행동당(People Action Party)은 이 모든 것을 극복하기 위해 실용적인 정책을 펼쳤다. 그중 하나가 바로 100% 주택보급률 달성, 우리나라로 치면 ‘1가구 1주택의 꿈’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정부는 대대적인 공공주택 건축사업을 시작했다. 이 때부터 정부는 CPF 예금을 주택개발청(HDB)에서 지은 아파트를 구매하는 데도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런데 중산층의 경우 HDB 아파트를 구입할 자격 요건에서도 제외되고, 민영주택을 구입할 형편도 못 됐다. HDB 아파트는 월수입이 싱가포르 돈으로 6천달러 미만이어야 신청할 수 있었다. 이 조건에도 해당되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값비싼 민영아파트를 구매할 여유도 없는 중산층들을 위해 정부는 1977년부터 CPF 예금을 민영주택을 구입하는 데도 사용할 수 있게 허용했다. 이때부터 싱가포르 중산층은 민영아파트와 주택을 구입할 수 있게 됐다. 방 4개 이상의 HDB 아파트나 민영주택에 사는 가구는 1990년까지만 해도 52%에 불과했으나 2000년에는 68%에 이르렀다(싱가포르 통계청, 2006).


급증하는 메이드, 번영의 그늘
“고용주 잘못 만날까 무서워요”


“아, 너무 무서워요.”
생활고를 못 이겨 대학을 그만두고 지난 4월부터 싱가포르에서 ‘메이드’로 일한 필리핀 출신 베스(25·가명)는 고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메이드로서 첫 경험이 ‘악몽’ 같았기 때문이다.
베스가 처음으로 일한 곳은 16살·14살·12살의 혈기 왕성한 남학생들이 있는 가정집이었다. 아이들의 아버지는 직장을 다녔고, 부인은 주로 집에 머물면서 베스가 일하는 걸 감독했다.
“날 사람으로 대하지 않았어요. 세탁기가 있는데도 손빨래를 시켰죠. 아들만 셋인 집에, 빨래가 얼마나 많겠어요? 부인은 하루 종일 집에 있으면서 나에게 악담을 퍼부었고…, 기억하고 싶지도 않아요.”
산더미 같은 일 때문에 하루에 5시간 이상은 잠을 잘 수 없었다. 휴일도 없었다. 견디다 못해 그 집을 뛰쳐나왔고, 지금은 다른 고용주를 만나 일하게 됐다. 그러나 지금 고용주가 싱가포르를 떠나게 돼, 베스는 다른 고용주를 찾아야 한다. 베스는 “이상한 고용주를 만나게 될까 두려워 더 이상 일을 못하겠다”고 말했다.
“제 주변에 잘 먹지도 못하고, 잠도 못 자고, 꼬집히고, 성적으로 학대당하는 등 끔찍한 경험을 한 친구들이 많아요. 그런 얘길 들으면 너무 무서워요.”
물론 싱가포르에서 메이드의 인권을 침해하는 행위는 법적으로 금지돼 있고, 인권침해를 당한 메이드들은 이를 신고할 수 있다. 그러나 신고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경기 호황으로 싱가포르 시민들의 생활 수준이 향상되면서 1970년부터 메이드 수도 급증하기 시작해 2004년 현재 14만 명 이상의 메이드들이 싱가포르에서 일하고 있다. 반면 경기 불황을 겪고 있는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의 값싼 노동력은 일자리를 찾아 싱가포르로 몰리는 추세다. 이렇게 공급이 많다 보니, 고용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어려움은 감수하고 일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필리핀 출신 메이드 애들린(28·가명)은 ‘두 집 살림’을 해주고 있다. 고용주 가정의 일뿐만 아니라, 주말에는 고용주의 언니네 집까지 가서 일을 하는 것이다. 돈을 더 받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두 집의 일을 하는 건 불법인 걸 알지만, 참고 일하는 수밖에 없다.
힘들게 일한 대가로 메이드들이 받는 월급은 얼마나 될까? 고용주가 내야 하는 돈은 800달러(약 65만원) 안팎이다. 반면 메이드는 300달러(약 25만원) 남짓한 돈을 받는다. 세금 265달러와 보험료 281달러가 떼이기 때문이다. 메이드의 임금은 국적에 따라, 경력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다.
베스는 지난 8개월 동안 휴일도 없이 일을 했지만, 6개월 동안 번 돈은 모두 에이전시의 소개 수수료를 갚는 데 썼다. 에이전시 수수료는 회사마다, 메이드의 출신 지역마다 다르지만 보통 1천~2천달러 내외다. 인도네시아 출신의 아밀(25)도 총 2160달러를 에이전시 비용으로 냈다. 7개월 동안 월급 봉투를 통째로 에이전시에 갖다 바친 셈이다.
물론 모든 메이드들이 베스나 애들린처럼 어려움을 겪는 건 아니다. 적응을 잘한 메이드들도 있다. 인도네시아 출신의 에니 푸르완티(29)가 바로 그런 사례다. 메이드 생활 8년차인 에니는 “우리 ‘맘’(Mom·고용주를 지칭)은 좋아요. 저한테 이 가방도 줬어요”라고 말하며 메고 있던 가방을 보여줬다. 하지만 에니도 싱가포르에 처음 왔을 때는 “나쁜 고용주를 만날까봐 많이 무서웠다”고 고백했다. 고용주가 메이드를 선택할 수는 있어도, 메이드가 고용주를 선택하거나 거절할 권리는 없기 때이다. “매일 밤마다 좋은 고용주를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했어요.”
메이드들이 기도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올까. 싱가포르의 삶의 질이 높아질수록, 누군가의 기도는 더욱 간절해지는 듯하다.

싱가포르=글·사진 최은주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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