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그뤼바인 한 잔 들고 광장으로!


공공 공간 늘리는 ‘도시계획 2010’ 등 41개 도시계획 동시 진행 중… ‘재밌는 도시’가 핵심
등록 2008-12-19 14:05 수정 2020-05-03 04:25

“그뤼바인 두 잔 주세요.” “감자 라클레 하나 주세요.”
12월6일 토요일 오후 7시 베르트뮬레 광장. 스위스 취리히 중앙역에서 상가들이 밀집해 있는 반호프 거리를 따라 내려오면 광장이 나타난다. 이곳에는 12월 한 달 동안 크리스마스 장터가 선다. 해가 지면 장터에 붉은 등이 켜지고 거리는 한층 더 밝아진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울 즈음 취리히 거리에는 장이 서고 그뤼바인과 라클레 등 전통 음식을 사먹으면서 구경하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취리히주 빈터투어의 크리스마스 장터 모습.

크리스마스가 가까울 즈음 취리히 거리에는 장이 서고 그뤼바인과 라클레 등 전통 음식을 사먹으면서 구경하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취리히주 빈터투어의 크리스마스 장터 모습.

그뤼바인은 먹다 남은 와인에 설탕, 레몬, 계피 등을 넣고 팔팔 끓인 따끈한 와인이다. 라클레는 굳은 빵 위에 부글부글 끓인 치즈를 얹어서 먹는 음식이다. 모두 알프스의 추위를 녹이기 위해 만들어진 가정용 음식들이다. 사람들은 장터에 설치된 높다란 탁자 위에 술잔을 놓고 처음 만난 옆 사람과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그뤼바인을 들고 돌아다니며 물건을 구경한다. 규칙적으로 들리는 트램 소리에 어린이 합창단이 크리스마스트리 앞에서 캐럴을 부르는 ‘노래하는 트리’ 행사까지 겹치면 추울 틈도 없다.

한 달간 크리스마스 장터 ‘북적북적’

크리스마스 장터는 사방이 확 뚫린 개방형의 취리히 중앙역사 안에도 선다. 그 밖에 취리히 외곽 지역인 빈터투어, 비에디콘 등도 유명하다. 장이 서고, 행사가 벌어지고, 거리 공연이 이뤄지는 곳은 모두 ‘광장’이다. 취리히에서 트램을 타고 가다 보면 두세 정거장꼴로 볼 수 있다.

스위스에는 유독 광장이 많다. 그런데 더 넓힌다. “광장을 넓히는 것, 사람들이 더 많은 곳을 광장처럼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우리의 중요한 도시계획 중 하나입니다.” 12월4일 취리히 시청에서 만난 프란츠 에버하드 도시계획국장이 말했다. “광장은 도시에 활력을 가져다줍니다. 도시가 재밌으면 사람들이 많이 찾죠. 사람들이 많아지면 주변 상권도 살아납니다.” 이런 이유로 취리히에 광장을 포함한 공공의 공간을 늘리는 ‘도시계획 2010’이 진행 중이다.

현재 사업이 추진 중인 곳은 리마트 강변의 오페라하우스 앞 젝세로이텐 광장. 지금 이곳은 주차장처럼 이용되고 있다. 사람이 있어야 할 곳을 차들이 차지하고 있다. 취리히시는 광장을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게 하려고 젝세로이텐 광장 지하에는 지하 3층 규모의 주차장을 짓는다. 2012년에 완공된다. “이곳은 도시에서 중요한 곳입니다. 강변을 따라 형성된 ‘교육과 문화길’이 시작되는 곳이죠.” 에버하드 국장은 주차장이 완공되면 광장 두 개가 살아날 수 있다고 말했다. 젝세로이텐 광장과 이곳에서 몇 정거장 떨어진 뮌스터 광장을 말한다. 프라우뮌스터 교회 앞에 자리한 뮌스터 광장도 지금은 주차장으로 쓰인다.

“광장뿐 아니라 도서관·시청 등 공공기관, 호숫가·언덕 등 자연환경까지 대중이 이용하는 곳은 모두 공공의 공간입니다. 이 공간을 살려서 도시를 재미있게 만들자는 것이 ‘도시계획 2010’입니다.” 에버하드 국장의 설명이 이어졌다. 도시에 재미를 준다는 이 계획은 이미 취리히시 곳곳에서 구현되고 있다. 뮌스터 광장에서 조금 걸어올라가면 시립미술관 헬름하우스가 나타난다. 무료로 유명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는 이곳에선 스위스의 대표적 비디오 아티스트인 로만 지그너의 25년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누구나 무료로 들어갈 수 있다. 산책하다 유모차를 끌고 전시장을 찾은 주부부터 할아버지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그의 전시를 자유롭게 관람했다. 나오는 길에는 ‘로만 지그너에게 보내는 말’이라는 이름으로 시민들이 작가에게 하고 싶은 말을 쓸 수 있는 용지가 마련돼 있다. 취리히 시청 도장이 찍혀 있다. 아이디어로 재미를 준 경우다.

한강보다 볼거리·할일 많은 강가

우리로 치면 한강 둔치에 해당하는 리마트 강변도 볼거리와 체험할 거리로 가득 차 있다. 넓게 펼쳐진 강만으로도 모자람이 없는 이곳에는 요하나 야콥 박물관이 있다. 세계적 건축가 르코르뷔지에가 지은 마지막 건축물이자 그의 흔적과 작품들이 전시된 하인스 페테 하우스도 있다. 그 밖에 장미정원, 중국풍 정원, 각종 조각작품 등이 리마트강 주변 곳곳에 있다. 걷고 수영하고 보고 느끼고, 할 일이 많은 강이다.

이 강가의 전망, 나아가서는 시 전체의 전망을 해치지 않기 위해 취리히시는 정밀하게 고층건물 건축을 제한하고 있다. 1990년대 유럽의 주요 도시들에서 도시 내부 밀도를 높이기 위해 고층빌딩 건설에 대한 논의가 유행처럼 번지던 때 취리히는 참았다. 대신 고층빌딩을 지어도 되는 구간을 면밀하게 검토해 2001년 ‘고층건물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내놓았다. 강가, 성당 등이 밀집해 있는 구시가지와 도심에서 대학들이 주로 위치한 대학거리로 들어가는 진입구간 쪽은 철저하게 고층건물을 짓지 못하도록 제한하고 있다.

대신 도시로 들어오는 관문에 해당하는 지역들은 역동성을 살리기 위해 고층건물을 적극적으로 짓게 한다. 기차가 드나드는 지역, 취리히 북부 지역 등이 대표적이다. 여러 철도가 교차하는 지점인 취리히 북쪽 외어링콘 지역이 대표적인 고층건물지역이다. 취리히시의 가이드라인에 따라 외어링콘에는 최근 스위스 3대 통신사인 선라이즈의 본사와 무역박람회장 등이 들어섰다. 고층빌딩이 들어서면서 지역경제도 살아나고 있다. 도시계획 컨설팅 등을 주로 하는 컨설팅 회사 시네르고의 월터 셴켈 대표는 “외어링콘 지역은 취리히시의 외곽인데다 가격이 싸고 주변 환경이 좋지 않다는 이미지가 있었는데, 고층빌딩이 허가되면서 이 지역에 여러 회사들이 들어서고 일자리가 창출돼 지역경제 전체가 살아나고 있다”고 말했다. 셴켈 대표는 “그러나 고층빌딩이 모든 지역에서 같은 효과를 가져오리라고 기대해선 안 된다. 세심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취리히에서는 도시계획 2010, 고층건물을 짓는 하이라이즈 프로젝트 등 41개의 각종 도시계획들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모두 5년 이상의 검토 기간을 거쳐 숙성된 계획이다. “도시는 한번 만들어지면 고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또한 이해관계가 다양하게 얽혀 있습니다. 급하게 하려는 것보다 차근차근 주민은 물론 모든 도시 관계자들, 건축가, 행정담당자 등의 의견까지 조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1997년부터 10년째 도시계획국장을 맡고 있는 프란츠 에버하드가 말했다. 재미있는 도시, 활기가 있는 도시를 만들기 위한 ‘숙성된’ 도시계획은 취리히를 그렇게 걷고 싶은 도시, 삶의 질이 높은 도시로 만들고 있었다.


죽은 공간 살리기
홍등가의 녹색 변신


죽어 있는 공간은 살려야 한다. 취리히 중앙역에서 서쪽으로 트램을 타고 10여 분 가면 닿는 랑스트라세의 변신이 대표적이다.
이곳은 취리히의 홍등가였다. 그러나 취리히시가 2001년부터 각 지역의 특색과 정체성을 살리는 ‘콘셉추얼 어버니즘’ 정책을 적극 도입하면서 랑스트라세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콘셉추얼 어버니즘은 각 지역의 역사와 특색을 잘 살펴 단점은 죽이되 장점은 살리는 방식으로 지역에 정체성을 부여하는 정책이다. 대학이 이어진 대학거리는 ‘스쿨룸’, 베아트 가족이 사는 제바흐는 ‘응접실’, 노동자들이 많이 사는 취리히 서부지역은 ‘워크룸’ 등의 콘셉트를 갖고 있다. 랑스트라세의 정체성은 ‘바룸’이다. 술을 마시는 곳이라는 정체성을 부정하지 않되, 다양한 문화가 함께 존재하는 문화 부티크로 그 정체성을 변형하는 게 계획의 핵심이다. 이를 위해 시는 이 지역의 상인연합회와 몇 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시는 우선 이 지역에 저예산 영화와 예술영화를 주로 상영하는 예술영화관을 세울 수 있도록 했다. 예술영화관 1층에는 현대적 분위기의 카페와 바도 들어섰다. 영화관 주변으로는 비슷한 분위기의 이색적인 카페와 식당, 술집들이 생겼다. 3년 전에는 대안적 성격의 다양한 전시 공간들도 둥지를 틀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랑스트라세는 외국인들이 방문해 독특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는 ‘재미있는 공간’으로 변모했다. 이 때문에 랑스트라세에는 저예산 영화를 주로 상영하는 예술영화관과 19살 이상 성인만 들어갈 수 있는 성인영화관이 공존하고 있다. 수영복 같은 속옷을 입은 웨이트리스들이 술을 나르는 바와 인도, 타이, 터키 등 동양의 이국적인 분위기가 나는 바도 랑스트라세 거리를 채우고 있는 식구들이다.
14번 트램 객차 안에는 랑스트라세 상인연합회가 실은 광고가 붙어 있다. “아직도 홍등가라고요? 이제는 초록불이 켜졌습니다.”



거리를 빛내는 인테리어
가로등 불빛 아래 서서



집 안에 가구가 있는 것처럼 집 밖에도 가구가 있다. 거리에 있는 설치조형물은 물론이고 버스 정류장, 휴지통, 벤치, 가로등, 신문을 파는 가판대까지 모두 거리의 분위기를 빚어내는 ‘거리의 가구’다. 서정렬 영산대 교수는 저서 에서 거리 가구에 대해 이렇게 썼다. “거리 가구가 일관되게 정비되면 도시는 읽기 편한 책처럼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간다.” 취리히를 걷다 보면, 읽기 편한 책처럼 일관되지는 않지만 거리의 분위기를 여행자에게 각인시키는 거리 가구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거리의 작은 인테리어들이 기억의 촉매가 된다.
슈타우파허 거리에 있는 가로등. 평범하면서도 진지한 느낌이다. 상가가 늘어선 거리에 통일성 있게 서 있어 무게감을 더한다. 거리의 격조를 높이는 효과가 있다.

슈타우파허 거리에 있는 가로등. 평범하면서도 진지한 느낌이다. 상가가 늘어선 거리에 통일성 있게 서 있어 무게감을 더한다. 거리의 격조를 높이는 효과가 있다.


취리히의 가로등은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다. 리마트 강변에 늘어선 가로등은 나무 모양을 하고 있다. 전구는 열매처럼 달려 있다. 리마트 강변을 밤에 걸으면 이 ‘빛나는 가로수’들이 지켜준다.

취리히의 가로등은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다. 리마트 강변에 늘어선 가로등은 나무 모양을 하고 있다. 전구는 열매처럼 달려 있다. 리마트 강변을 밤에 걸으면 이 ‘빛나는 가로수’들이 지켜준다.


스위스의 트램은 모두 파란색과 흰색이다. 겨울에만 운행하는 빨간색 퐁듀 트램은 거리의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더한다. 퐁듀를 먹으면서 시내를 돌 수 있는 퐁듀 트램은 아이디어 관광상품인 동시에, 취리히의 분위기를 만드는 재밌는 거리 가구 역할도 한다.

스위스의 트램은 모두 파란색과 흰색이다. 겨울에만 운행하는 빨간색 퐁듀 트램은 거리의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더한다. 퐁듀를 먹으면서 시내를 돌 수 있는 퐁듀 트램은 아이디어 관광상품인 동시에, 취리히의 분위기를 만드는 재밌는 거리 가구 역할도 한다.


주요 상점가들이 밀집해 있는 반호프 거리. 이곳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이자 화가인 막스 빌의 ‘파빌리온’이 설치돼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잡아끈다.

주요 상점가들이 밀집해 있는 반호프 거리. 이곳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이자 화가인 막스 빌의 ‘파빌리온’이 설치돼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잡아끈다.


취리히(스위스)=글·사진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