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뤼바인 두 잔 주세요.” “감자 라클레 하나 주세요.”
12월6일 토요일 오후 7시 베르트뮬레 광장. 스위스 취리히 중앙역에서 상가들이 밀집해 있는 반호프 거리를 따라 내려오면 광장이 나타난다. 이곳에는 12월 한 달 동안 크리스마스 장터가 선다. 해가 지면 장터에 붉은 등이 켜지고 거리는 한층 더 밝아진다.
그뤼바인은 먹다 남은 와인에 설탕, 레몬, 계피 등을 넣고 팔팔 끓인 따끈한 와인이다. 라클레는 굳은 빵 위에 부글부글 끓인 치즈를 얹어서 먹는 음식이다. 모두 알프스의 추위를 녹이기 위해 만들어진 가정용 음식들이다. 사람들은 장터에 설치된 높다란 탁자 위에 술잔을 놓고 처음 만난 옆 사람과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그뤼바인을 들고 돌아다니며 물건을 구경한다. 규칙적으로 들리는 트램 소리에 어린이 합창단이 크리스마스트리 앞에서 캐럴을 부르는 ‘노래하는 트리’ 행사까지 겹치면 추울 틈도 없다.
한 달간 크리스마스 장터 ‘북적북적’크리스마스 장터는 사방이 확 뚫린 개방형의 취리히 중앙역사 안에도 선다. 그 밖에 취리히 외곽 지역인 빈터투어, 비에디콘 등도 유명하다. 장이 서고, 행사가 벌어지고, 거리 공연이 이뤄지는 곳은 모두 ‘광장’이다. 취리히에서 트램을 타고 가다 보면 두세 정거장꼴로 볼 수 있다.
스위스에는 유독 광장이 많다. 그런데 더 넓힌다. “광장을 넓히는 것, 사람들이 더 많은 곳을 광장처럼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우리의 중요한 도시계획 중 하나입니다.” 12월4일 취리히 시청에서 만난 프란츠 에버하드 도시계획국장이 말했다. “광장은 도시에 활력을 가져다줍니다. 도시가 재밌으면 사람들이 많이 찾죠. 사람들이 많아지면 주변 상권도 살아납니다.” 이런 이유로 취리히에 광장을 포함한 공공의 공간을 늘리는 ‘도시계획 2010’이 진행 중이다.
현재 사업이 추진 중인 곳은 리마트 강변의 오페라하우스 앞 젝세로이텐 광장. 지금 이곳은 주차장처럼 이용되고 있다. 사람이 있어야 할 곳을 차들이 차지하고 있다. 취리히시는 광장을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게 하려고 젝세로이텐 광장 지하에는 지하 3층 규모의 주차장을 짓는다. 2012년에 완공된다. “이곳은 도시에서 중요한 곳입니다. 강변을 따라 형성된 ‘교육과 문화길’이 시작되는 곳이죠.” 에버하드 국장은 주차장이 완공되면 광장 두 개가 살아날 수 있다고 말했다. 젝세로이텐 광장과 이곳에서 몇 정거장 떨어진 뮌스터 광장을 말한다. 프라우뮌스터 교회 앞에 자리한 뮌스터 광장도 지금은 주차장으로 쓰인다.
“광장뿐 아니라 도서관·시청 등 공공기관, 호숫가·언덕 등 자연환경까지 대중이 이용하는 곳은 모두 공공의 공간입니다. 이 공간을 살려서 도시를 재미있게 만들자는 것이 ‘도시계획 2010’입니다.” 에버하드 국장의 설명이 이어졌다. 도시에 재미를 준다는 이 계획은 이미 취리히시 곳곳에서 구현되고 있다. 뮌스터 광장에서 조금 걸어올라가면 시립미술관 헬름하우스가 나타난다. 무료로 유명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는 이곳에선 스위스의 대표적 비디오 아티스트인 로만 지그너의 25년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누구나 무료로 들어갈 수 있다. 산책하다 유모차를 끌고 전시장을 찾은 주부부터 할아버지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그의 전시를 자유롭게 관람했다. 나오는 길에는 ‘로만 지그너에게 보내는 말’이라는 이름으로 시민들이 작가에게 하고 싶은 말을 쓸 수 있는 용지가 마련돼 있다. 취리히 시청 도장이 찍혀 있다. 아이디어로 재미를 준 경우다.
한강보다 볼거리·할일 많은 강가우리로 치면 한강 둔치에 해당하는 리마트 강변도 볼거리와 체험할 거리로 가득 차 있다. 넓게 펼쳐진 강만으로도 모자람이 없는 이곳에는 요하나 야콥 박물관이 있다. 세계적 건축가 르코르뷔지에가 지은 마지막 건축물이자 그의 흔적과 작품들이 전시된 하인스 페테 하우스도 있다. 그 밖에 장미정원, 중국풍 정원, 각종 조각작품 등이 리마트강 주변 곳곳에 있다. 걷고 수영하고 보고 느끼고, 할 일이 많은 강이다.
이 강가의 전망, 나아가서는 시 전체의 전망을 해치지 않기 위해 취리히시는 정밀하게 고층건물 건축을 제한하고 있다. 1990년대 유럽의 주요 도시들에서 도시 내부 밀도를 높이기 위해 고층빌딩 건설에 대한 논의가 유행처럼 번지던 때 취리히는 참았다. 대신 고층빌딩을 지어도 되는 구간을 면밀하게 검토해 2001년 ‘고층건물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내놓았다. 강가, 성당 등이 밀집해 있는 구시가지와 도심에서 대학들이 주로 위치한 대학거리로 들어가는 진입구간 쪽은 철저하게 고층건물을 짓지 못하도록 제한하고 있다.
대신 도시로 들어오는 관문에 해당하는 지역들은 역동성을 살리기 위해 고층건물을 적극적으로 짓게 한다. 기차가 드나드는 지역, 취리히 북부 지역 등이 대표적이다. 여러 철도가 교차하는 지점인 취리히 북쪽 외어링콘 지역이 대표적인 고층건물지역이다. 취리히시의 가이드라인에 따라 외어링콘에는 최근 스위스 3대 통신사인 선라이즈의 본사와 무역박람회장 등이 들어섰다. 고층빌딩이 들어서면서 지역경제도 살아나고 있다. 도시계획 컨설팅 등을 주로 하는 컨설팅 회사 시네르고의 월터 셴켈 대표는 “외어링콘 지역은 취리히시의 외곽인데다 가격이 싸고 주변 환경이 좋지 않다는 이미지가 있었는데, 고층빌딩이 허가되면서 이 지역에 여러 회사들이 들어서고 일자리가 창출돼 지역경제 전체가 살아나고 있다”고 말했다. 셴켈 대표는 “그러나 고층빌딩이 모든 지역에서 같은 효과를 가져오리라고 기대해선 안 된다. 세심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취리히에서는 도시계획 2010, 고층건물을 짓는 하이라이즈 프로젝트 등 41개의 각종 도시계획들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모두 5년 이상의 검토 기간을 거쳐 숙성된 계획이다. “도시는 한번 만들어지면 고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또한 이해관계가 다양하게 얽혀 있습니다. 급하게 하려는 것보다 차근차근 주민은 물론 모든 도시 관계자들, 건축가, 행정담당자 등의 의견까지 조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1997년부터 10년째 도시계획국장을 맡고 있는 프란츠 에버하드가 말했다. 재미있는 도시, 활기가 있는 도시를 만들기 위한 ‘숙성된’ 도시계획은 취리히를 그렇게 걷고 싶은 도시, 삶의 질이 높은 도시로 만들고 있었다.
| |
|
취리히(스위스)=글·사진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법조계 “경호처 지휘부, 윤석열 영장 막다 부상자 나오면 최고 35년”
일본 미야자키현 규모 6.9 지진…난카이 대지진 관련성 조사
”윤석열 체포 협조하면 선처”…경호처 설득 나선 공수처·경찰
한덕수 “계엄 말렸다”…헌재 재판부 “그날 행적 제출하라”
언제까지 들어줄 것인가 [그림판]
“꺾는 노래는 내 것” 나훈아, 좌우로 너무 꺾어버린 고별 무대
“윤석열이 칼이라도 들라고…” 경호처 수뇌부, 제보자 색출 혈안
[단독] 국힘 의총서 “계엄 자체로 위법인지…” “오죽하면 그랬겠나”
포고령에 없던 “한겨레 단전·단수”…윤석열 ‘사전 지시’였나
소방청장 “이상민, 계엄 때 한겨레 단전·단수 지시”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