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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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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전체를 정원으로 만들어라


거리마다 나무 그늘로 여유로운 곳, 40년 전부터 도시 조경 정책 강력하게 펼쳐
등록 2009-01-01 12:04 수정 2020-05-03 04:25

‘섹시’할 줄 알았다. 톡톡 튀는 도발적인 모습을 떠올렸다. ‘신상’(신상품)으로 빼입은 ‘패션리더’, 혹은 명품숍을 좋아하는 ‘허영덩어리’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본주의적 욕망으로 이글거리는 갈증난 눈빛을 상상했다. 하지만 내 빈곤한 상상력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예상과 달리 깔끔하고 차분했다. 젊고, 싱그러웠다. 첫인상은 ‘푸른색’. 자극적인 ‘빨강’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해하지 마시라. 소개팅남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도시 싱가포르의 이미지를 말하는 것이다. ‘싱가포르=쇼핑의 메카’라는 고정관념은 그렇게 깨졌다.

싱가포르 도심인 ‘시티홀’(City Hall) 근처의 인도. 싱가포르의 인도는 이렇게 잔디밭과 나무가 어우러져 있다.

싱가포르 도심인 ‘시티홀’(City Hall) 근처의 인도. 싱가포르의 인도는 이렇게 잔디밭과 나무가 어우러져 있다.

쇼핑센터 뒤 언덕, 중앙선 대신 꽃

그래서일까. 도시는 신선했다. 햇살은 따갑고 날씨는 무더웠지만, 불쾌하지 않았다. 거리마다 큰 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도시의 푸름은 햇살에 반짝였다. 물론 쇼핑의 거리로 유명한 ‘오차드로드’(Orchard Road)는 고층빌딩과 쇼핑센터가 즐비했고, 사람들로 북적이는 전형적인 도시의 모습이었다. 특히 오차드로드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위즈마 아트리아’(Wisma Atria) 쇼핑센터 주변은 관광객과 쇼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러나 쇼핑센터 뒤쪽은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아름드리 나무들로 무성한 언덕이 나타났다. 새들의 지저귐만 들리는 듯, 고요했다.

자연은 도시 곳곳에 존재했다. 인도는 절반의 보도블록과 절반의 잔디밭으로 구성돼 있었다. 빗물로 촉촉해진 잔디밭은 꽃과 나무들로 가득했다. 관광객인 듯한 노부부가 꽃과 함께 사진을 찍기도 했다. 나무 몇 그루만 듬성듬성 심긴 우리나라 인도와 대조됐다. 육교조차 분홍빛 꽃덩굴로 장식하고 있었다. ‘빵빵!’ 사람을 예민케 하는 차들의 소음만 무성할 것 같은 도로에도 자연이 있었다. 도로의 중앙에는 꽃과 나무들이 심겨, 중앙선의 역할을 대신했다. 이렇게 곳곳에 나무가 많은 덕분일까, 아니면 비가 자주 와서 그런 걸까. 하늘은 파랗고 공기는 맑았다.

그런데 도시의 ‘녹음’에는 인위적인 느낌이 있었다. 나무들은 제멋대로 자라지 않았다. 누군가의 정성 어린 보살핌을 받은 듯, 잘 다듬어져 있었다. 도시 전체가 정교하게 관리된 ‘정원’ 같았다. 비결이 뭘까?

‘살기 좋은 도시 만들기 센터’(Center for Liveable Cities)의 임택홍 정책담당 상임연구원은 “‘정원 도시’ 싱가포르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라며 “정부의 강력한 의지와 노력으로 이뤄낸 성과물”이라고 강조했다.

“싱가포르는 싱가포르 도시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왔습니다. 그중 하나가 1960년 국가환경청에서 벌인 ‘깨끗하고 푸른 싱가포르 만들기 캠페인’입니다.”

40년 전, 정부는 싱가포르를 ‘정원 속의 도시’(City in a Garden)로 만들기 위해 ‘녹화 프로그램’이란 정책을 폈다. 리콴유 전 총리는 “‘푸른 싱가포르’야말로 외국인 투자자들을 유인할 수 있는 핵심 경쟁력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녹화사업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단다. 그리고 1963년부터 ‘나무 심기 캠페인’을 시작했다. 1976년에는 국가개발부 산하에 ‘공원과 레크리에이션 기구’(Parks and Recreation Department)를 설립해, 싱가포르의 녹화 정책을 담당하게 했다. 기구는 최대한 이른 시간 안에 효과를 보기 위해, 빨리 자라는 나무를 도시 곳곳에 심었다. 그중 잘 자라면서도 관리하기 쉬운 앙사나 나무와 부겐빌레아처럼 꽃이 잘 피는 나무들이 큰 공헌을 했다. 특히 아스팔트로 포장된 지역에 이런 나무들을 많이 심어서 아스팔트 표면의 온도를 낮추도록 했다. 육교·옹벽 같은 콘크리트 구조물은 담쟁이 덩굴이나 ‘피커스 퓨밀라’ 같은 ‘덩굴’로 감싸게 했다. 건설업자들이 집을 지을 때도 길가에 반드시 나무를 심도록 하고, 열린 공간을 꼭 남겨두도록 규제했다. 또 ‘섬 전체의 공원화 개발 프로그램’을 통해 새로운 공원을 만들고 오래된 공원은 보수 공사를 했다.

면적이 620㎢ 남짓한 싱가포르에 총면적 95㎢가 넘는 300개의 공원들은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국토 전체 면적의 약 15%가 공원인 셈이다. 공원에선 콘서트·공연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요가 등 운동 프로그램도 있어서 시민들이 자연과 함께 여가생활을 할 수 있다. 정부는 공원뿐만 아니라 학교, 병원, 경찰서, 공동체센터 같은 기관에도 과일나무, 꽃, 향기로운 식물들을 심게 했다. 그렇게 도시는 하나의 ‘정원’으로 변해갔다.

국립공원위원회가 300개 공원 관리

이런 ‘정원’은 누가 관리하는 걸까? ‘국립공원위원회’(National Parks Board), 이른바 ‘엔파크’가 도시 정원사 역할을 맡고 있다. 엔파크는 관광지로도 유명한 보태닉 가든, 이스트코스트 공원 등 300개의 공원과 자연보호구역, 길가의 초목들을 관리할 뿐 아니라, 공원 간 연계 네트워크도 형성하고 있다. 엔파크는 ‘구상계획 2001’에 따라, 인구가 550만 명(2008년 현재 인구 484만 명)에 도달할 때까지 4400ha의 공원 부지를 추가로 확보할 계획이란다.

이런 ‘정원 속의 도시’ 만들기는 시민들의 ‘삶의 질’을 높일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싱가포르의 전략산업으로 성장하고 있다. 싱가포르 조경산업의 규모는 2014년까지 미국 달러로 171억달러 규모까지 증가할 전망이다. 싱가포르 정부는 2006년에 이미 ‘정원 속의 도시’를 위해 6950만달러의 예산을 투입한 바 있고, ‘강의 조경 바꾸기’ 등 거대 프로젝트들도 계획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원 상품’에 대한 세계 시장의 규모도 2010년에는 미화 2274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2008년 7월24일에 열린 ‘싱가포르 정원 페스티벌 엑스포’의 주제는 “경치의 변화가 곧 세계적인 기회”였다. 아름다운 경치를 통해 도시민들의 삶의 질을 높일 뿐 아니라, ‘삶의 질’도 세계에 수출할 수 있다는 역발상과 치밀한 마케팅 전략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높은 삶의 질이 곧 국가 경쟁력인 것이다.

싱가포르=글·사진 최은주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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