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출장. 도쿄는 낯익은 도시라고 생각했다. 2008년 12월 말에 다시 찾은 도쿄는 낯설었다. 기자가 기억하는 도쿄의 신풍경은 오다이바와 롯폰기힐스에서 멈춰 있었다. 일본에서 만난 지인들은 ‘시오도메’ ‘오모테산도 힐스’ ‘미드타운’ ‘신마루노우치’ 등 낯선 이름들을 계속 입에 올렸다. 도쿄에선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도쿄의 심장인 도쿄역 앞(도쿄 지요다구 오테마치)을 찾은 것은 월요일 아침(12월22일)이었다. 거대한 기중기와 굴착기가 요란한 소음을 내고 있었다. 도쿄역을 리모델링하는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도쿄역을 등지고 앞을 보니 쌍둥이처럼 맞닿은 두 건물이 우뚝 서 있다. 마루노우치빌딩과 그 쌍둥이인 신마루노우치빌딩이었다. 서울역 앞 전경을 가로막고 있는 대우센터 빌딩처럼 폭력적일 정도는 아니었지만, 위압적이란 기분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실상도 과연 거만했다. 지난 2007년 완공된 이후 롯폰기힐스가 차지하고 있던 최고의 오피스·쇼핑타운 명성을 단숨에 가로챘다고 한다. 그런 자신감 때문인지 월평균 임대료가 3.3058㎡(1평)당 6만5천엔에 이른다고 주변 부동산업자들은 말했다.
도쿄역 맞은편 쌍둥이 빌딩 위압적
같은 해 롯폰기힐스 옆에 건설된 도쿄 미드타운도 새로운 도쿄의 상징이다. 지난 2002년 거대 부동산기업 미쓰이를 중심으로 시작된 도쿄 미드타운 개발공사는 총사업비 3700억엔에 이르는 초거대 프로젝트였다. 방위청 부지였던 땅이 주거와 업무, 상업과 휴식이 문화와 결합한 총면적 7만8천㎡의 복합공간으로 거듭났다. 이 주변을 4만㎡의 녹지가 감싸고 있다.
일본철도(JR) 야마노테센의 신바시역에서 내리면 2006년에 건설된 시오도메로 이어진다. 시오도메는 원래 JR의 열차 기지 창고였던 지역으로, 도쿄에서 가장 낙후된 곳이었다. 지금은 세계 최대의 광고회사인 덴쓰와 화장품 회사인 시세이도, 그리고 니혼TV의 본사 건물들이 육중하게 치솟아 있다. 덴쓰 본사의 46·47층은 스카이라운지 겸 식당가다. 통유리가 시원하게 전망을 틔워주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스카이라운지에 오르면, 레인보브리지가 아름답게 연결된 인공섬 오다이바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 정도면 건물 자체가 하나의 관광상품으로 충분했다. 도쿄에 이런 변화가 시작된 것은 2002년이었다.
도쿄도 건설국의 스즈키 에이지 공보계장은 “지난 1960년부터 시작된 일본 정부의 국토개발계획의 핵심은 도쿄와 지방의 균형발전이었다”며 “이 전략이 수정된 것이 바로 2002년 고이즈미 내각 당시였다”고 설명했다. 일본 정부는 도시와 지방의 균형발전을 위해 공장과 본사를 지방으로 옮기고, 각 지역마다 대대적인 리조트 건설을 촉진했다. 지방마다 거대한 호텔과 놀이동산, 그리고 36홀 이상의 골프장들이 속속 들어섰다. 결과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각 지방자치단체들은 리조트 건설 과정에서 누적된 재정적자로 신음했다. 고이즈미 정부는 1990년대 말까지 계속된 이런 국토종합개발을 중단하고, 도쿄 중심개발로 방향을 바꿨다. 도쿄의 도심을 재개발해 뉴욕이나 런던에 버금가는 국제도시로 개발하고, 그렇게 발전한 도쿄가 일본 경제를 다시 이끌어간다는 전략이었다. 도쿄역의 신마루노우치, 롯폰기의 롯폰기힐스와 미드타운, 그리고 시오도메는 그 전략의 핵심을 이뤘다. 지금까지 도쿄 도심에서 진행된 재개발은 12개 지역에 이른다.
지난해 초까지는 재개발의 성공을 자축하는 소리들이 이어졌다. 로고스커뮤니케이션의 이준재 본부장은 “1980년대 버블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건설업체들이 앞다퉈 공개했던 미래도시가 부활하는 것 아니냐는 말을 하는 기업인들이 많았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1989년에 구상이 발표된 ‘스카이시티 1000’은 높이 1천m에 바닥 면적만 800만㎡에 이르는 빌딩이었다. 시미즈건설이 2004년까지 완공하겠다고 구상했던 ‘트라이 2004’는 2천m 높이의 500층 건물이었다. 동시에 4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빌딩이었다. 이 정도면 빌딩이 아니라 하나의 도시다. 물론, 이 꿈들은 버블 붕괴와 함께 날아갔다.
그러나 2008년 12월의 도쿄는 20년 전의 악몽을 다시 꾸게 되는 것이 아니냐는 불안감에 떨고 있었다. 미국발 경제위기 탓이다. 불안은 부동산 업체들의 붕괴와 함께 찾아왔다. 도미노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2008년 9월이었다. 9월19일, 맨션 분양 업체인 ‘휴먼21’이 464억엔의 부채를 남기고 쓰러졌다. 미국 최대의 저축대출조합인 ‘워싱턴뮤추얼’이 파산하던 9월26일, 역시 맨션 분양 업체인 ‘시즈 밤 에이트’가 넘어졌다. 부채는 114억엔에 이르렀다. 지난해 1월부터 11월까지 일본에서 부도난 상장법인은 모두 24개였는데, 이 중 부동산·건설 관련 회사가 17개에 달한다고 한다. 도쿄 상공리서치 정보부의 도모다 노부오 부장은 이런 수치를 들며 “과잉 재고와 과잉 채무로 일본의 부동산 업계는 이미 차가운 겨울을 맞고 있다”며 “관련 업체들의 도산은 지금까지의 페이스로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과잉 재고의 숨은 원인도 2002년부터 쉼없이 이어진 도심 재개발이었다.
위축된 경제는 사람들의 지갑도 꽁꽁 닫고 있었다. 신마루노우치빌딩은 최고의 쇼핑타운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사람들의 발길이 끊겨 있었다. 도쿄역에서 신마루노우치빌딩을 거쳐 고쿄(일본 왕의 거처)로 이어지는 지하도를 오가는 이들은 한 명도 없었다. 그것도 월요일 아침에.
수도권 규제 푸는 한국에 반면교사?신마루노우치빌딩 바로 옆에서는 오테마치 1번가 복합단지 재개발 현장이 올해 4월 완공을 앞두고 막판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이 지구에는 게이단렌회관과 니혼게이자이신문 등 30층이 넘는 초현대식 본사 건물 3개가 들어설 예정이다. 완공을 4개월 앞둔 2008년 12월 말 현재, 이들 건물은 임차인들을 완전히 채우지 못한 상태라고 주변 부동산 업자들은 귀띔해주었다.
한때 도심 재개발의 상징이었던 롯폰기힐스는 바로 옆에 들어선 도쿄 미드타운과 신마루노우치 등과의 경쟁에서 밀리고 있다. 지하 1층의 상가들은 붐볐지만, 지하 2층은 아예 하얀 커튼으로 유리창을 가린 빈 상가들로 썰렁했다. 이 역시 과잉·중복 투자의 결과였다.
화려하게 꽃피우다 한순간 추운 겨울을 맞은 도쿄의 부동산 시장을 보면서, 수도권 규제를 완화하려는 이명박 정부의 정책이 자꾸 불안하게 겹쳐졌다.
도쿄(일본)=글·사진 이태희 기자 herme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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