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보통 밤에 빛난다. 런던도 그렇다. 어둠이 내려앉은 템스강변. 조명이 비친 933살 먹은 웨스트민스턴 사원의 첫인상은 마치 연극 무대에서 독백하는 주인공 같다. 그뿐일까. 여왕이 사는 버킹엄 궁전과 템스강을 마주하는 국립극장, 트래펄가 광장에까지 시선이 닿으면 마치 따뜻한 불빛이 감싸고 있는 고즈넉한 박물관에 들어온 느낌이다. 이 따뜻한 야경의 주인공은 누굴까. 다름 아닌 발광다이오드(LED) 조명이다. 런던시는 7년 전부터 조명회사 필립스와 협력해 야간 조명을 모두 LED 조명으로 바꿨다. LED등은 기존 조명보다 에너지효율이 40% 높다. 전구 평균 수명은 5만 시간으로 25년이나 지속된다. 국립극장은 조명 설비를 바꾼 것만으로 에너지 비용을 70%나 줄여, 매년 100만파운드(약 2억원)를 절약하게 됐다.
12시간 비행 끝에 런던에 도착했다. 도시 전체가 이산화탄소 배출 절감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소문을 확인하고 싶었다. 공항에서 내려 런던의 금융 중심지인 ‘시티오브런던’에 가기 위해 걱정하며 버스를 탔다. 런던은 뿌연 날씨만큼 꽉 막힌 도로로 유명한 도시였다. 그러나 차는 뻥뻥 뚫렸다. ‘런던의 교통지옥’은 이제 구문이 된 것 같았다. 꽉 막힌 도로 대신 눈에 띈 것은 도로 곳곳에 쓰인 ‘C’(런던혼잡통행료 징수 구간을 나타내는 표시)라는 큰 글자와 폐쇄회로텔레비전(CCTV)이었다. 2003년부터 런던 도심에는 CCTV가 설치됐고, 런던 도심으로 들어가는 차량들은 이 CCTV에 찍혔다. 런던 시내 중심지로 차를 몰고 들어가려면 하루 8파운드(약 1만6천원)를 내야 한다. CCTV에 찍히고도 밤 12시까지 통행료를 내지 않으면 연체 시간에 따라 무거운 벌금이 부과된다고 한다. 2003년, 전임 런던시장 켄 리빙스턴이 추진한 이 혼잡통행료 정책으로 도로 사정이 좋아졌단다. 지금 도심의 자동차 교통량은 21%,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20% 줄었고, 자전거 통행량은 66% 급증했다. 정말 런던 도심 곳곳에서 자전거 판매 전문점이 쉽게 눈에 띄었다. 런던 도심의 바뀐 풍경 중 하나는 버스와 자전거가 속도를 경쟁하며 달리는 모습이었다.
런던의 금융 중심지 ‘시티오브런던’에는 유럽기후거래소가 있다. 일반 증권사처럼 시세 현황판과 객장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사무실과 컴퓨터, 직원 몇 명이 전부였다. 탄소 거래는 인터넷상에서 온라인 거래로 이뤄진다. 2005년 4월 문을 연 이후 유럽기후거래소를 오고 간 돈은 50조원. 20억t의 이산화탄소 배출권을 사고팔았다.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권의 80%가 런던 기후거래소에서 거래되고, 거래량은 매년 2배 이상 급성장하고 있다. 금융의 나라 영국이 런던에서 ‘탄소경제’ 시대를 열고 있는 것이다. 날로 심각해지는 기후변화는 탄소를 사고팔아 돈방석에 앉는 새로운 직업군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매슈 휘텔 기후거래소 기술총괄 담당자는 “시장이 기후변화로부터 지구를 구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탄소 거래가 활발해질수록 탄소를 줄이기 위한 관련 기술과 산업도 성장할 것으로 낙관했다. 그러나 카본트레이드워치 활동가 케빈 스미스는 ‘탄소시장’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그는 2005년부터 가동한 유럽연합할당량거래 시장에서 영국 정부가 각 기업이 배출할 수 있는 배출량의 한도를 과도하게 책정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석탄화력발전소 업자들이 남은 할당량을 탄소시장에 판매해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 필 울라스 영국 환경식품농업부 차관도 배출량 과잉 공급 리스크가 실제로 발생했고 2차 운영 기간인 2008년부터는 할당량을 낮게 설정했다며, 1차 운영 기간의 오류를 인정한 바 있다. 미국발 금융 위기가 세계 경제를 뒤흔드는 지금, 인류의 가장 큰 숙제인 기후변화를 ‘탄소시장’에 맡겨 해결할 수 있을까. 쉽지 않은 질문을 뒤로하고 다시 런던 거리로 나왔다.
‘CO₂ 배출량’ 써 있는 주스 사기잠시 배를 채울 먹을거리를 사러 할인마트인 테스코에 들어갔다. 우리의 편의점처럼 런던 시내 곳곳에는 테스코가 있다. 이곳에서 특이한 감자칩을 볼 수 있었다. 감자칩 봉지 뒷면에는 감자칩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배출되는 이산화탄소량이 쓰여 있었다. 내가 산 감자칩은 원료 재배에서부터 가공, 유통까지 모두 75g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했다. 아직 모든 종류의 식료품에 이런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쓰여 있지는 않아 비교를 하며 살 수는 없었지만, 테스코는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제품에는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표시하기 위해 투자액을 늘리고 있다고 한다. 감자칩과 함께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쓰여 있는 오렌지주스를 샀다. 이 오렌지주스는 265g을 배출했다. 점점 많은 상품들이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표시하면, 가장 환경친화적인 제품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슈퍼 체인이자 의류업체인 ‘막스앤스펜서’도 식료품에 운송수단을 표시하고 있었다. 항공기로 운송한 딸기와 포도, 브로콜리에 ‘항공기 마크’(Air Label)가 붙어 있다. 탄소를 많이 배출해가며 비행기로 운반한 것이니 구입할 때 생각하고 선택하라는 뜻이다. 의류에는 ‘기후를 생각하세요’(Think Climate) 라벨이 붙어 있다.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기 위해 세탁물 온도를 30℃로 하자는 내용이다. 막스앤스펜서 지속경영팀의 마이크 배리는 “영국민 모두가 30℃로 세탁을 한다면 막스앤스펜서가 1년 동안 줄일 수 있는 이산화탄소량보다 더 많은 양을 감축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우편공사인 ‘로열메일’은 심지어 우편물의 이산화탄소 발생량을 계산해준다. 개인이나 기업이 우편물을 보낼 때 발생하는 이산화탄소량을 계산해주고, 종이·포장지·잉크를 통해 이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하기도 한다. 마지막 단계로 우편을 보내는 사람이 나무를 심어 우편 배달 과정에서 발생한 이산화탄소를 상쇄하면, 우편물에 ‘탄소 중립’이란 로고를 새겨준다.
런던은 2006년부터 시 차원에서 전방위적으로 ‘기후변화’에 대응하고 있다. 시가 직접 설립한 런던기후변화청(LCCA·London Climate Change Agency Ltd)이 대표적이다. 런던시장이 이사회 의장으로, 온실가스를 줄일 수 있는 다양한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시장의 주도 아래 ‘기후변화’만을 생각해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할 수 있는 기관을 만든 셈이다. 런던의 기후변화 전략의 핵심은 ‘지역에너지’(Local Energy) 정책이다. 2025년까지 런던에서 사용하는 에너지의 25%를 런던에서 생산하는 것이 목표다. 2012년 런던올림픽 경기장도 필요한 에너지의 20%를 재생 가능 에너지로 충당할 예정이다. 냉방·난방·전기를 한꺼번에 생산하는 열병합 냉난방 시스템, 태양광, 지열, 조력과 같이 지역에서 직접 생산하는 에너지량을 늘려가고 있다. 타워브리지에 올라가면 보이는 템스강의 바지선도 강의 조수 간만의 차이를 이용해 전기를 생산하기 위한 조력발전소 건설을 위한 것이었다. 세계적 건축가 노먼 포스터가 설계한 시청도 지붕에 태양광발전기가 설치돼 직접 전기를 만들어낸다. 건물 구조도 햇빛을 최대한 받아들여 조명 에너지를 절약하도록 돼 있다. 에너지 절약부터 에너지 자체 생산까지 차곡차곡 준비해가는 런던의 모습이었다.
템스강의 바지선도 조력발전 위해서울은 서울시민이 사용하는 전기의 2%만이 서울에서 생산되고, 나머지는 송전탑을 통해 다른 지역에서 생산한 전기를 받아 쓴다. 이렇게 에너지의 생산지와 소비지가 멀어지면 도중에 손실되는 에너지량이 많고, 그 과정에서 온실가스도 더 많이 배출된다. 지역에너지 시스템은 이런 손실을 막는다. 런던은 지역에너지 시스템 등을 통한 온실가스 감축 프로젝트를 책임지고 관리하는 곳을 만듦으로써 에너지 절약과 온실가스 감축을 현실화하고 있었다.
런던 도심을 잘 관찰하면서 걷다 보면 적어도 이 도시가 ‘기후변화’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무엇인가 준비하고 있다는 증거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가까운 미래, 우리 도시에서도 이런 변화를 느끼며 걸을 수 있기를 고대한다.
런던(영국)=이유진 녹색연합 에너지기후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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