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미군이 더럽힌 땅을 보며 새삼스레 생각해 본 전쟁과 환경의 상관관계
▣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정치학 박사kimsphoto@hanmail.net
“박수칠 때 떠나라.”
서울 강남의 최고급 호텔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다룬 영화 제목이 아니다. 6·25 전쟁 뒤 50년 넘게 쓰던 군사기지들 곳곳에 스민 오염물질을 치우지 않고 떠나려는 미군을 두고 하는 말이다. 환경오염을 다 걷어냈다고 고개를 끄덕일 때, 그래서 박수를 쳐줄 때 떠나라는 얘기다.
주한미군이 누구인가. ‘한반도를 지키겠다’며 멀리 한국까지 온 이들 아닌가. 그들이 지키러 왔다는 한반도 땅을 기름과 각종 유해물질로 더럽혔다면, 깨끗이 치우고 떠나야 마땅하다. 필리핀 수빅만 미 해군기지와 클라크 미 공군기지를 비롯해 푸에르토리코와 파나마 등 미군이 머물다 떠난 해외기지의 끔찍한 환경오염은 악명 높다. 그로 미뤄, 주한미군이 박수를 받으며 떠나기는 어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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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 로마군도 들판에 소금 뿌려
미군기지 오염은 새삼스레 전쟁과 환경의 문제를 생각하게 만든다. 전쟁이 벌어지면, 자연환경은 크든 작든 손상을 입기 마련이다. 전쟁에서 환경보호란 부차적인 개념일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전략·전술적인 필요’라는 이름 아래 환경을 파괴하는 행위다. 기원전 146년 로마제국의 군대가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를 어렵사리 점령하자, 로마군은 카르타고를 ‘그라운드 제로’로 만들었다. 들판에 소금을 뿌려 농사를 아예 못 짓도록 만들었다. 한니발 장군이 로마원정에 나서기도 했던 강국 카르타고 군사력의 밑바탕이 되는 경제력을 죽이기 위한 조치였다.
‘현대판 로마제국 군대’인 미군이 지난 1960년대와 70년대 초 베트남에서 고엽제를 마구 뿌려댄 것도 ‘전략·전술’이란 이름 아래 이뤄진 고의적인 환경파괴다. 영국의 한 평화운동단체에 따르면, 미군이 10년 동안 베트남에 뿌린 고엽제의 총량은 7200만ℓ. 고엽제는 베트남의 자연만 파괴한 게 아니라 베트남 민초들의 건강에도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유산, 기형아 출산, 암 발병 등이 잇따랐다. 고엽제가 스민 땅은 농사도 잘 안 됐고, 쌀알 크기조차 줄어들었다
(http://www.ppu.org.uk/learn/infodocs/st_environment.html 참조). 미국 땅에서 전쟁이 벌어졌을 경우, 숨은 적군을 찾아내는 데 편리하다고 고엽제를 마구 뿌렸을까.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전쟁을 벌이더라도 마구잡이 환경파괴만큼은 막아야 한다. 이는 전쟁윤리의 문제다. 20세기 들어와 전쟁의 광풍으로부터 환경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국제법상 처음으로 강조한 것은 1907년에 체결된 헤이그협정이다. 이 협정 제23조는 “전쟁 수행의 필요에 따라 적의 재산을 파괴하거나 압류하는 행위가 절대적으로 요구되지 않는 한, 재산 파괴나 압류는 불법”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국제법 학자들은 헤이그협정의 이 규정이 네 가지 원칙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풀이한다. △적을 패배시켜 항복을 받아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군사적 필요에 따르되(필요성의 원칙) △군사 행동이나 무기 사용이 지나친 파괴와 살상으로 이어져서는 안 되며(비례성의 원칙) △군사적 목표물과 상수원을 비롯한 민간 목표물을 구별해야 하며(차별성의 원칙) △전쟁에서 너무 지나친 고통을 적에게 안겨줘선 안 된다(인도주의 원칙)는 것이다. 고엽제를 비롯한 생화학물질로 환경을 오염시키는 것은 전쟁이 끝난 뒤로도 우리 인간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안겨주기 마련이다.
1949년 체결된 제네바협정은 포로를 인간적으로 대우하고 비무장 민간인들을 죽이거나 학대하지 말자고 했다. 그런데 이 협정에 환경보호와 관련된 조항들이 담겨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협정 제53조는 군사작전상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닌 한’ 어떤 형태로든 적의 재산을 파괴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1977년 제네바협정 제1추가의정서(Protocol 1)도 제35조에서 “자연환경에 대해 광범하고 장기적이고 심각한 손상을 끼쳐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이를 어기는 군 지휘관은 전쟁범죄자가 된다.
‘로마협약’ 외면하는 미국·이스라엘
전쟁에서 지나친 환경파괴를 금지하는 국제법을 찾아보면 또 있다. 국제형사재판소(ICC)의 바탕이 된 ‘로마협약’이 그러하다. 1998년에 만들어져 2002년부터 효력을 지닌 로마협약의 제8조는 “어떤 군사적 공격이 자연환경에 광범하고 장기적이면서도 심각한 손상을 끼친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의도적인 공격을 펼치는 행위”를 ‘전쟁범죄’라고 못박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제1추가의정서가 나온 뒤 지금껏 30년 동안, 그리고 ICC의 로마협약이 발효된 지 5년 동안 이 규정들을 어겼다고 전쟁범죄 혐의로 기소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다. 21세기 패권국가인 미국과 그 제1동맹국인 이스라엘은 로마협약에 비준조차 하지 않은 상태다.
궁금한 것은 미국이나 이스라엘의 일선 지휘관들이 과연 그런 국제법 장치들로부터 얼마만큼 심리적 압박을 받는가다. 2001년 아프가니스탄 침공, 2003년 이라크 침공 과정에서 미군은 마구잡이 공습(그리고 이에 따른 오폭)으로 환경을 파괴해 국제사회의 거센 비판을 받았다. 2006년 7월 이스라엘이 레바논 헤즈볼라와 전쟁을 벌이면서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뿐인 지구환경을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쟁범죄자로 몰릴 수도 있다”는 국제법 규정들은 미국과 이스라엘엔 구속력 없는 문서상의 조항에 그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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