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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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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습을 쳐서 칼을?

등록 2007-06-22 00:00 수정 2020-05-03 04:25

<font color="darkblue"> 제2의 군비경쟁 시대인가, 2007년 SIPRI 연감의 놀라운 숫자들</font>

▣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정치학 박사kimsphoto@hanmail.net

평화를 사랑하는 독자들을 비롯해 지구촌의 많은 반전·평화주의자들이 군비축소 하면 떠올리는 말은 무엇일까? 아마도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쟁기를 만든다”는 구절이 아닐까. 여기서 ‘보습’이란 농촌에서 소를 몰아 밭을 가는 데 쓰이는 쟁기 끝에 붙은 쇠붙이다. 성서 ‘미가서’에 나오는 이 구절은 전쟁 상태를 끝장내고 평화를 만들어내려는 노력을 뜻한다. 스웨덴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의 자료를 보면, 이 세상이 거꾸로 보습을 녹여 칼을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지난해 지구촌 국방비, 냉전 이후 가장 많아

SIPRI는 국제평화와 군사와 관련된 조사연구에서 세계적인 권위를 지닌 싱크탱크다. 해마다 초여름이면 SIPRI는 을 발행하고 있다. 이 연감에는 지구촌의 분쟁 현황과 국제사회의 평화유지 노력, 전세계 국방비 지출과 무기수출 현황, 핵무기와 군비축소에 관련된 여러 세부적인 정보가 담겨 있다.(http://yearbook2007.sipri.org 참조).

지난 6월11일 발표된 2007년 SIPRI 연감의 주요 내용을 보면, 21세기 강대국 지도자들에게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기’를 바라기는 어렵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보고서의 결론부터 밝힌다면, “지구촌 평화는 아직 멀었다”는 것이다. 지난해 지구촌의 국방비 지출 규모는 1991년 옛 소련이 분해되고 냉전이 막을 내린 뒤로 가장 많다. 10년 전인 1997년에 견주면 무려 37%나 늘어났다. 무기산업도 호황을 누리는 반면에, 재래식 무기와 핵무기의 감축은 한마디로 거북이 걸음이다. 강대국들의 군축 발언은 결국 말잔치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2007년 SIPRI 연감에서 보이는 각종 숫자들은 지구촌이 평화의 길로 가기는커녕 제2의 군비경쟁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우려마저 품게 한다. 2006년 전세계 국방비 지출 총액은 2005년보다 3.5% 늘어난 1조2040억달러. 우리 돈으로 치면 1천조원이 넘는 어마어마한 규모다. 그렇다면 어느 나라가 가장 많은 국방비를 지출하는 것일까? 역시나 미국이다(5287억달러로 전체의 46%). 미국인 1인당 군사비 지출은 1756달러로, 전세계 평균의 10배에 가까운 수치다.

미국의 국방비 지출이 천문학적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무엇일까? 미국은 지난 2001년부터 아프가니스탄, 2003년부터 이라크에서 전쟁을 벌여왔고, ‘악의 축’이라 낙인찍은 북한과 이란의 위협을 막는다는 명분으로(실제로는 중국과 러시아를 겨냥한) 미사일방어망(MD) 구축에 골몰하고 있다. 또 실전에 언제라도 투입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될 게 뻔한 개량형 핵폭탄까지 개발하는 데 드는 비용이 만만찮다. 하나하나 따져보면, 21세기 초강대국의 패권적 지위를 고집하는 데 드는 비생산적 항목들이다. 이런 돈을 줄였다면,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미국 노숙자들을 훨씬 많이 살려낼 것이다.

SIPRI 연감은 미국이 ‘이라크 수렁’에 빠져 허우적댈 경우, 2016년까지 앞으로 10년 동안 군비지출이 무려 2조2670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내다본다. 그럴 경우 미국 경제에 상당한 부담을 안겨줄 것임은 물론이다. 미국 다음으로 ‘군비지출 빅10’에 드는 나라는 △2위 영국(592억달러) △3위 프랑스(531억달러) △4위 중국(495억달러) △5위 일본(437억달러), 그 뒤로는 독일·러시아·이탈리아·사우디아라비아·인도 순이다. 한국의 2006년 국방비는 219억달러로 세계 11위. 국방비 지출 규모로 ‘축구 드림팀’을 짠다고 치면, 한국도 베스트11에 끼는 셈이다.

한국도‘베스트11’

2007년 SIPRI 연감에서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대목이 핵무기 관련 정보다. SIPRI는 2006년 10월 핵실험으로 ‘핵클럽’에 새로 가입한 북한을 포함해, 현재 모두 9개국(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중국·인도·파키스탄·이스라엘·북한)이 2만6천 개쯤의 핵탄두를 보유한 상태라고 전했다. SIPRI는 북한이 6개 정도의 핵탄두를 만들었을 것이라 짐작한다. 문제는 미국과 러시아다. 전세계 핵무기의 90%를 지닌 두 나라는 언제든지 실전에 쓸 수 있는 핵탄두만도 5천 개쯤씩 보유 중이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1964)에서처럼 “적이 선제공격해 들어올 것이다”라는 과대망상증에 걸린 지도자가 어느 날 핵전쟁을 일으킨다면, 기상이변에 따른 핵겨울로 말미암아 인류는 ‘운명의 날’(doom’s day)을 맞게 될 수도 있다.

우리의 현실적인 고민은 한반도의 평화와 생존이다. 핵 강대국인 미국, 중국, 러시아, 그리고 미국의 양해 아래 보유 중인 40t의 플루토늄과 재처리 시설로 언제라도 핵탄두를 개발해낼 능력을 갖춘 일본이 한반도를 긴장 속으로 몰아가는 모습이다. 남북 합쳐 170만 병력이 마주하는 한반도와 그 주변 국가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쟁기를 만드는’ 날은 언제쯤 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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