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주둔 미군의 정신건강 상태 보고서, 3분의 1이 ‘고문’에 찬성하는 무딘 윤리의식 보여
▣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정치학 박사kimsphoto@hanmail.net
. 지난 2006년 여름 무려 1300만 관객을 모아 한국 영화사에 새 흥행 기록을 세웠던 영화다. 영화 속 괴물은 한강의 오염으로 태어난 돌연변이. 따지고 보면, 그 괴물은 환경파괴의 주범인 인간이 만들어낸 생명체다. 우리 인간이 만들어낸 파괴적인 발명품 가운데 으뜸은 무엇일까. 다름 아닌 ‘전쟁’이란 괴물일 것이다. 영화 속 괴물은 불화살에 죽고 말지만, 전쟁이란 괴물은 그렇지 못하다. 일단 전쟁 괴물이 일으키는 광풍에 휩싸이면, 우리 인간은 로봇 병사처럼 거리낌 없이 살인과 폭력(고문·강간)을 저지르기 일쑤다.
7만명, 침공이 없었다면 살아 있었을 목숨
2400년 전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전쟁은 일상적인 시민생활의 규범을 혼란 속으로 몰아넣을 뿐 아니라, 법과 정의의 이념을 제쳐놓고 우리 인간의 본성을 공격적이 되도록 만든다.” 그리스 문명의 꽃을 피웠던 아테네 시민들이 전쟁의 광풍에 휩싸이는 것을 지켜보면서 투키디데스는 우리 인간의 공격적 본성에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 그런 모습을 우리는 21세기 이라크에서 본다.
지금 이 시간에도 이라크에서는 많은 민간인들이 전쟁의 광풍에 희생되고 있다. 가해자는 이라크 주둔 미군과 그 실체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차량폭탄 테러범들이고, 피해자는 이라크 민초들이다. 2003년 3월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래 지난 4년 동안 생목숨을 잃은 민간인들의 머릿수를 꼽아온 ‘이라크 바디 카운트’(www.iraqbodycount.org)는 2007년 5월 말 현재 7만 명쯤(최소 6만4500명, 최대 7만700명)이 죽은 것으로 발표했다. 미국의 침공이 없었다면 살아 있을 목숨들이다.
이라크 주둔 미군 사상자도 만만치 않다. 지난 2006년 12월 드디어 3천 명을 넘어서더니, 이제는 곧 3500명에 이를 채비다. 미국의 현충일(메모리얼데이)인 5월28일 하루 동안 10명의 미군이 죽은 것을 비롯해, 5월 한 달 동안에만 115명의 미군 병사가 죽었다. 사상자가 늘어나면서, 미군 병사들의 신경도 날카로워져 거리의 이라크 민간인들을 함부로 대한다는 소식이다.
미국 언론이나 국내 언론에는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지만, 이라크 주둔 미군의 정신건강 상태를 조사한 보고서가 하나 있다. 2006년 11월 미 육군의무감실에서 펴낸 89쪽 분량의 보고서다. 그 내용이 워낙 민감해 대외비로 다뤄지다가 반년 뒤인 지난 5월 초 미 언론에서 일부 내용만을 보도했을 뿐이다
(www.armymedicine.army.mil/news/mhat/mhat_iv/
_IV_Report_17NOV06.pdf).
미군 병사 1800명(육군 1320명, 해병대 447명)을 대상으로 한 보고서의 ‘전장윤리’(Battlefield Ethics) 항목을 보면, 이라크 주둔군의 무딘 전쟁윤리 의식이 드러난다. 3분의 1이 넘는 미 육군과 해병대원들이 “동료 병사의 목숨을 구하거나 저항세력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면 고문을 해도 좋다”고 여기며, 단지 47%의 육군 병사와 38%의 해병대원들만이 “비무장 민간인들을 정중하게 대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미 육군 병사의 28%, 해병대원의 30%가 “이라크 민간인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을 욕하거나 모욕을 준 적이 있다”고 털어놓았고, 육군 병사의 55%, 해병대원의 40%만이 “동료 부대원이 죄 없는 비무장 민간인을 살상했을 경우 이를 상관에게 보고하겠다”고 했다. 또 육군 병사의 43%, 해병대원의 30%만이 “동료 부대원이 이라크 민간인 재산에 손상을 입혔을 경우, 이를 상관에게 보고하겠다”고 밝혔다.
문제는 위의 조사 결과가 과연 정확하겠느냐는 것이다. 민간인 학대는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이라크 주둔 미군 병사들은 나이로 봐서 이제 갓 스무 살을 넘긴 이들이 대부분이다. 고등학교를 중퇴한 17살 미성년자의 입대가 가능한 곳이 미군이다. 그런 젊은이들이 미 국방부 조사요원에게 “내가 이라크 민간인들을 학대했다”고 떳떳이 밝히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실제로 저질러진 잔혹행위들이 은폐됐을 가능성이 크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높은 자살률
이라크 주둔 미군 병사들의 난폭성과 무딘 전쟁윤리는 심리적 스트레스와 무관하지 않다. 지난날 베트남과 마찬가지로 미군 병사들은 전선이 따로 없는 전장에서 적과 얼굴을 맞대다시피 싸워야 한다. 누가 적인지 분간이 어렵고, 폭발물이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형편이다. 낮에 훈련시킨 이라크 병사가 밤에는 총부리를 미군에게 돌리는 일도 벌어진다. 따라서 미군들의 태도는 거칠어지고, 그런 일이 거듭될수록 정신건강도 엉망이 돼 자살 충동으로 이어진다. 위의 미 육군의무감실 보고서는 2003년부터 2006년까지 3년 동안 이라크 주둔 미군의 자살률은 10만 명당 16.1명이라고 했다. 미군 평균 자살률(10만 명당 11.6명)에 비해 훨씬 높다.
자살이건 타살이건 이라크에서 그렇게 짧은 삶을 마감했거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괴로움을 겪는 미군 병사들, 전쟁윤리 의식이 무딘 미군 병사의 화풀이 총질과 군홧발의 표적인 이라크 민초들, 이들 모두는 석유와 세력 확장을 노리는 21세기 유일 패권국가 미국이 벌이는 ‘더러운 전쟁’의 희생양들이 아닐까.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윤석열, 연락 안 받는 사연 [그림판]
군복 벗은 노상원, ‘김용현 뒷배’ 업고 장군들 불러 내란 모의
[단독] 여인형 “윤, 계엄 사흘 전 국회에 격노…작년부터 언급”
한덕수, 내란·김건희 특검법엔 시간 끌며 눈치 보나
“닥쳐라” 김용원이 또…기자 퇴장시킨 뒤 인권위원에 막말
[속보] 검찰, ‘계엄 체포조 지원’ 혐의 경찰 국수본 압수수색
[단독] 백해룡의 폭로… 검찰 마약수사 직무유기 정황 포착
현실의 응시자, 정아은 작가 별세…향년 49
[단독] 국회 부수고 “헌법 따른 것”…계엄군 정신교육 증언 나왔다
탄핵 탓하는 권성동 “기각 땐 발의·표결 의원 처벌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