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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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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먹을거리의 양극화

등록 2006-08-04 00:00 수정 2020-05-03 04:24

화학첨가물 범벅이 ‘최저가’와 자국 원재료로 한 ‘프리미엄’의 전쟁

▣ 제네바=윤석준 전문위원 semio@naver.com

스위스의 유통업은 2개의 대형 유통업체가 시장의 70% 이상을 지배하는 과점 상태에 있다. 이 때문인지 먹을거리의 가격 거품이 적지 않아, 이웃한 독일이나 프랑스에 비해 장바구니 물가가 품목별로 최대 2배까지 비싼 경우도 있다.

그러나 최근 유럽연합 기업들의 스위스 시장 진입을 위한 제도적 장벽이 낮아지면서, 독일과 프랑스의 대형 유통업체들이 스위스 진출을 모색하게 됐다. 이에 따라 기존의 스위스 유통업체들은 대응책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스위스 유통업체들이 내놓은 대응책은 이른바 ‘양극화’ 전략이었다. 모든 상품을 궁극적으로 ‘프리미엄’ 제품과 최저가 제품으로 양분하겠다는 것이다.

소득과 소비 수준의 양극화라는 세계적 추세가 스위스에서도 예외는 아니라는 점을 주목한 것이다.

우선 지난해부터 대대적인 광고 공세를 펼치며, ‘최저가 보장’ 상품들을 새로이 선보였다. 가격은 기존 제품들보다 20%에서 최대 50%까지 내리고 소비자들의 반응을 살폈다. 그동안 높은 장바구니 물가에 시달리던 스위스 소비자들의 반응은 실로 뜨거웠다. 불과 몇 개월 만에 최저가 보장 상품들이 스위스 유통업계 전체 매출액의 20% 이상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소비자의 반응이 우호적이자, 유통업체들은 최저가 보장 상품의 종류를 지속적으로 늘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젠 대부분의 식품매장 진열대에서 최저가 보장 상품들을 찾아볼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일반 상품들보다 20~50% 이상 저렴한 최저가 보장 상품에는 공공연한 비밀이 있다. 물론 이들 제품 역시 스위스의 엄격한 식품위생법에 부합하는 생산 방식을 갖추고 위생적으로 생산됐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으니, 바로 원재료에 포함된 식품첨가물들이다. 최저가 보장 식품들에 각종 화학첨가물의 양과 종류가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이름은 제각각이지만 결국 방부제 역할을 하는 각종 화학첨가물의 증가가 눈에 띈다.

이에 대해 일부 소비자 단체들이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지만, 그동안 높은 장바구니 물가에 시달리던 소비자들의 반향은 생각보다 썰렁했다. 오히려 이런 문제 제기가 나오는 틈을 활용해 유통업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프리미엄’ 상품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프리미엄 상품들은 최저가 상품들과는 정반대로 주로 스위스 자국 유기농 농산물을 원재료로 한다. 화학첨가물은 일절 넣지 않는다. 포장도 ‘프리미엄급’이어서 금테 혹은 은테를 두르고 있으며, 가격은 일반 제품보다 20~30% 정도 비싸다. 최저가 보장 제품들에 비해 2배 이상 비싼 경우도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프리미엄 상품들의 매출 추세가 과거 최저가 상품의 초기 매출에는 미치지 못하나, 그래도 기대 이상의 수준”이라고 말했다. 이를 두고 스위스 현지 언론들은 “유통업체들의 먹을거리 양극화 전략이 성공을 거뒀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에 소비자들이 구매하던 일반 상품들은 조금씩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프리미엄 상품들처럼 친환경적 고급 재료를 쓴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최저가 보장 상품들처럼 각종 화학첨가물이 들어 있는 것도 아닌 제품들 말이다.

결국 소비자들은 가계 소득수준에 따라 질적으로 양극화된 먹을거리를 선택해야 할 상황에 놓이게 됐다. 문제는 적지 않은 소비자들이 각종 약자·기호로 표기된 식품첨가물의 존재 여부보다는 가격에 더 신경쓰는 것이 현실이라는 점이다. ‘경제·사회적 양극화’는 ‘먹을거리의 양극화’를 통해 궁극적으로 ‘건강의 양극화’로 이어질지 모른다. 좋은 먹을거리를 먹는 것도 각자 개인의 능력에 맡기는 게 우리네 자본주의지만, 밥상에서만은 조금만 더 인간다운 모습을 보여주면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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