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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월드] 리투아니아의 환전은 계속된다

등록 2006-06-03 00:00 수정 2020-05-03 04:24

물가상승률 0.1% 미달로 유로존 가입 무산… ‘엄격한 잣대’ 시범케이스설도

▣ 빌뉴스=최대석 전문위원 ds@chojus.com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각국은 경제공동체와 아울러 단일통화 도입을 위해 노력해왔다. 1991년 마스트리히트 조약으로 단일통화 도입이 확정됐고, 1995년에는 단일통화 이름이 ‘유로’로 결정됐다. 유로가 정식 화폐로 도입된 것은 1999년. 그리고 마침내 2002년부터 유럽연합 회원국 중 12개국에서 자국 화폐 대신 유로가 일상생활에서 통용되기 시작했다.

지난 5월16일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2004년 유럽연합에 가입한 10개국 가운데 가장 먼저 ‘유로존’ 가입을 신청한 슬로베니아와 리투아니아에 대한 심사 결과를 발표했다. 슬로베니아는 모든 유로존 가입 조건을 통과해 받아들여졌고, 리투아니아는 조건 미달로 거부됐다. 이로써 리투아니아 국민들이 기대했던 ‘2007년 유로 도입’의 꿈은 사라지고 말았다. 유럽연합 국가들과의 무역이 전체 교역량의 65%에 이르는 리투아니아로선 큰 타격이 아닐 수 없다.

주변의 현지인 친구들이 쏟아내는 불만도 적지 않았다. 유럽 각지로 여행 다니기를 좋아하는 빌마는 “귀찮게 유로화 환전을 계속해야 한다”고 푸념했다. 직업상 독일과 은행 거래가 많은 이리나는 “이체 비용을 줄일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고 아쉬워했다. ‘유로존’ 가입을 예상하고 3년 전 무리하게 은행 대출을 받아 부동산을 구입한 비다도 안절부절이다. 그동안 부동산 가격이 3배로 뛰었지만, 유로 도입이 불가능해지면서 부동산 시장이 가장 큰 충격을 받게 될 것이란 전망 때문이다.

리투아니아는 환율 안정성과 재정적자 및 국가채무 규모, 장기 국채 금리 등 모든 자격 조건에서 합격했지만, 물가상승률 때문에 발목을 잡혔다. 유로존에 가입하려면 마스트리히트 조약이 규정한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가입 후보국의 물가상승률이 유럽연합 회원국 중 물가상승률이 가장 낮은 세 나라의 평균에서 1.5%를 더한 것보다 낮아야 한다. 발다스 아담쿠스 대통령은 “성장하는 경제와 세계적 에너지 가격 상승 등 제반 여건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정책으로 물가 상승을 초래하고 말았다”며 뒤늦은 후회를 했다.

이번에 기준이 된 세 나라는 핀란드·스웨덴·폴란드로 조약 규정에 따라 계산된 물가상승률 기준치는 2.6%였다. 리투아니아의 물가상승률은 2.7%로, 기준치에서 0.1%를 넘어섰을 뿐이다. 더구나 핀란드를 제외한 나머지 두 나라는 유로존에 속해 있지도 않으며, 유로존 나라를 기준으로 하면 물가상승률 기준치가 3%에 이른다. 리투아니아에서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신규 회원국의 물가 부문에 대해 너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 것 아니냐는 볼멘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유로존이 시작된 1999년 그리스도 물가상승률 기준치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룩셈부르크·스페인 등의 현 물가상승률도 기준치를 상회하고 있다. 지난해 프랑스·이탈리아 등 유럽연합 7개국은 국가채무 규모 기준치를 넘겼다. 또 독일·포르투갈 등은 예산적자 기준치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여기에 리투아니아의 현 물가상승률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러시아와 맺은 가스 장기 수입계약이 끝나면서 지난 1월부터 가스 수입 가격이 40%나 인상된 것이다.

상황이 이런 탓에 유로존 가입 좌절에 대한 온갖 억측이 난무하고 있다. “리투아니아의 친미적 색채 때문에 거부됐다”는 게 대표적이다. 하지만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는 ‘분석’은 이른바 ‘시범 케이스’설이다. 상대적으로 경제 규모가 큰 폴란드·헝가리·체코 등 유로존 가입을 기다리고 있는 동유럽 국가들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기 위한 ‘선례’로 경제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은 리투아니아를 골랐다는 것이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의 결정을 두고 현지 언론에서 “정치적 노림수가 뭐냐”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아주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닌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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