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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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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 그가 있기에…

등록 2006-01-06 00:00 수정 2020-05-03 04:24

나라 잃고 떠도는 티베트인들이 인도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동력은

▣ 델리=우명주 전문위원 greeni@orgio.net

4년 전 여름, 처음으로 티베트 망명정부가 있는 매클레오드 간즈로 여행을 갔다. 어느 날 새벽 우연히 달라이라마가 주최한 법회를 듣게 되었다. 그의 목소리는 마이크를 타고 건물 안에서 흘러나왔지만 그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 참석한 티베트인들은 그곳에 살면서 달라이라마를 뵐 기회가 많았을 터이므로 그의 모습을 보는 데 그다지 관심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법회가 끝나면 얼른 입구 쪽으로 달려가서 노벨상 수상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그 유명인사를 실물로 보리라 작정을 하고 있었다. 법회가 끝나고 달라이라마가 나오는 순간, 티베트인들은 꼭 공중에 떠서 움직이듯 순식간에, 그러나 어떤 소리도 내지 않고 입구 쪽으로 몰려들었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지만 그들의 흥분과 설렘은 피부로 느껴질 정도로 강렬했다. 당연히 내 알량한 호기심은 그들의 존경 앞에서 맥을 못 춘 채 뒤처져버렸고 그의 얼굴은커녕 승복 자락도 볼 수 없었다.

그 뒤 몇 년 동안 달라이라마를 가까이서 뵐 기회가 몇 번 있었다. 몇백 명이 모이는 대중집회에 천연덕스럽게 값싼 슬리퍼를 신고 나오는 소탈한 모습이나(심지어는 그 슬리퍼를 신고 백악관까지 갔다!) 자신의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보기 원하는 티베트인들을 위해 먼 길을 돌아 걸어가는 그의 모습을 보면 남에 대한 배려가 몸에 배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온화하고 천진한 미소는 보는 사람을 행복하고 즐겁게 만든다. 유머감각은 또 어떤지!

그러나 그런 달라이라마 못지않게 감동을 주는 것은 그를 대하는 티베트인들의 모습이다. 6살, 10살 아이들을 업고 눈 덮인 설산을 20일 동안 걸어 인도로 온 한 티베트인 부부는 아이들만을 남겨둔 채 다시 티베트로 돌아간다고 했다. 앞으로 평생 아이들을 만나지 못할 텐데 괜찮겠느냐는 질문에 아이들 엄마가 한 대답은, “달라이라마 성하님께서 가호해주시기 때문에 괜찮다”는 것이었다. 어느 티베트 승려도 “달라이라마 스님께 직접 수계를 받고 싶어서 인도로 왔다”고 말했다. 행사장에서 그가 입장하면 눈물을 흘리며 합장을 하는 티베트인들을 보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를 가장 가까이서 모시는 비서 스님들은 조금 편하게 그를 대할 것도 같은데 스승을 모심에 있어 언제나 극진하고 조심스럽고 정중했다.

하지만 달라이라마는 언제나 자신을 평범한 불교 승려라고 칭한다. 얼마 전 열린 한국인을 위한 법회의 마지막 날, “당신은 살아 있는 부처라고 불리는데, 그런 당신도 인생에서 후회해본 적이 있습니까?” 하는 질문을 받고 달라이라마는 말했다. “나는 살아 있는 부처가 아닙니다. 나는 평범한 불교 승려입니다. 이 자리에 오기 전에 나는 최근에 티베트에서 망명한 사람들을 만나고 왔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말을 많이 했더니 지금 목이 몹시 마릅니다. 내가 정말 신이라면 어떻게 목이 마를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모두 웃음을 터뜨렸지만 어쩌면 그는 ‘나도 한 인간인데 어떻게 후회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을 하려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살아 있는 부처이건 평범한 불교 승려이건 그를 향한 티베트인들의 사랑과 존경은 변함없이 깊다. 진심으로 존경할 만한 지도자가 있고 그 지도자를 아무런 조건 없이, 어떤 의심도 없이 존경할 수 있으며 또한 그 지도자는 존경을 받아 마땅한 사람일 때, 그들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국민이 아닐까. 어쩌면 그것이 지금 나라를 잃고 떠도는 티베트인들이 인도에서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동력인지도 모른다. 그들을 보면 현대사에서 전 국민적으로 존경할 만한 지도자 한번 제대로 가지지 못했던 우리 처지가 참으로 초라하게 느껴진다. 더구나 ‘박정희 박물관’ 운운하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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