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벨기에 축구스타의 사인회에서 원치도 않은 새치기를 했는데…
▣ 브뤼셀=도종윤 전문위원 ludovic@hanmail.net
한국에서 내가 다니던 학과에는 백인 학생들이 몇몇 있었는데, 세계화를 주제로 학교를 홍보할 일이 있으면 꼭 우리 학과에 와서 사진을 찍어가곤 했다(이 경우에는 일본인이나 중국인은 아무런 효용 가치가 없다). 이곳 벨기에에서도 그 경험은 다르지 않다. 다만 백인이 아니라 동양인이나 흑인이라는 것이 다르다. 기업이건 학교건 이곳의 카탈로그에 ‘세계화…’라는 문구가 들어간 페이지를 보면 어김없이 동양인이나 흑인의 사진이 들어가 있기 마련이다(이 경우에는 프랑스인이나 영국인은 아무런 효용 가치가 없다). 그러다 보니 한국 사람인 나도 누런 피부 색깔로 인해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경우가 있다. 유럽인들이 주로 모이는 유럽 관련 학회 세미나에 참석이라도 하면, 모두들 한번 정도는 내게 색다른 관심을 보이기 마련이다. 세미나 스냅사진을 찍을 때면 당연히 그 속에는 내가 꼭 끼어 있다. 회의 시작 전에 “이 모임에는 한국인을 포함해 여러 나라에서 온 석학들이…”라는 회의 진행자의 소개말이 나오는 경우도 있다. 내 지도교수는 다른 교수를 만날 때면 꼭 내 소개를 잊지 않는다. 요즘처럼 개방화된 시대에는 다양한 인종이 함께 공부하고 있다는 것이 학과 평가에도 도움이 된다. 그러고 보니 동양인(정확히 말해 동북아시아인)이라고는 내가 유일하게 있는 우리 학과는 인종 배분적 측면에서 상당한 선전 효과를 누리고 있음이 분명하다.
벨기에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다. 어느 신문사의 요청으로 당시 안데를레흐트에서 뛰던 설기현 선수를 인터뷰하러 간 적이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날 경기에서는 설기현 선수가 후반 끝무렵에야 교체 선수로 투입되어 그다지 큰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그래도 어차피 부탁받은 것이니 한번은 만나야겠다고 생각하고 선수 라커룸 앞에서 물어볼 것을 수첩에 적고 있었다. 그런데 라커룸에서 나온 짧은 머리의 선수 하나가 문 바로 앞에 서 있는 내 손의 수첩을 빼았다시피 가져가더니 자기 이름을 휘갈겨 쓰는 것이 아닌가? 순간 “나는 당신 사인이 필요 없는데…”라며 뿌리쳐버렸다. 그 사람은 어색한 웃음을 짓다가 문 밖에서 기다리던 다른 이들에게 사인을 해주었다. 알고 보니 그 사람은 안데를레흐트의 간판 선수이자 벨기에 국가대표 선수인 월터 바세지오였다. 유명세를 타던 선수라 제법 우쭐했을 텐데, 내가 수첩을 꺼내들고 있는 것을 보고 당연히 자신의 사인을 요구한 줄 알았던 모양이다. 게다가 동양인인 내가 백인들 틈에 서 있으니 당연히 눈에 띄었을 테고, 세계화된 자기 인기를 실감해 배려 측면에서 먼저 사인을 해주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얼마 전 아내와 함께 ‘벨기에 베이커리 이벤트 2005’라는 행사장에 가게 되었다. 행사장을 한참 돌고 있는데, 방송사 카메라가 비치면서 행사장 한쪽이 웅성거렸다. 어느 업체의 접대용 테이블 앞에 한 신사가 앉아서 그 회사의 빵 홍보도 하고 관람객들에게 친필 사인을 해주는 것이었다. 아는 사람이 아니어서 그냥 지나치려는데, 그 업체 관계자가 오더니 사인을 받으라며 손을 내미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방송사 카메라가 이미 이쪽을 비추기 시작했다. 사람 좋아 뵈는 그 신사는 각종 시리얼이 잔뜩 들어간 무슨 ‘건강빵’을 들고 있는 자기 포스터에다 아내의 이름을 물어가며 친절하게 자기 이름을 써주었다. 물론, 의도하지 않은 새치기로 잽싸게 친필 사인을 받은 우리를 부러워하는 주변의 모든 백인들의 눈길을 받으면서. 땀을 삐질 흘리며 뒤로 물러나 옆에 있던 다른 사람에게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그 사람은 파란 눈을 데굴 굴리더니, “누군지 몰라? 장 마리 파프(Jean-Marie Pfaff)잖아?”라면서 침을 튀겨가며 그 사람 소개를 늘어놓는다. 알고 보니 그 사람은 벨기에판 차범근이었다. 그곳에 있던 많은 벨기에인들은 동양인이 자기 나라의 축구 영웅에게서 사인을 받아가는 것을 보며 세계적인 축구 스타를 가지고 있다는 만족감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마치 박지성이 누구인지 안다는 영국인을 만났을 때 우리가 느끼는 만족감과 같은 것이었을 게다.
세계화가 불편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글로벌화는 더 무섭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나도 지금처럼 피부 색깔이 다른 사람을 세계화의 도구로 이용하는 촌스런 세계화나 덜된 글로벌화가 무섭다. 브뤼셀의 어느 거리에서 갑자기 인터뷰하자고 방송사 카메라가 달려들지 모르기 때문이다. 언제 TV 카메라에 잡힐지 모르니 이제는 옷차림을 깔끔하게 하고 다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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