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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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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언달러 베이비

등록 2013-02-05 21:32 수정 2020-05-03 04:27
나·들 제 4호 표지

나·들 제 4호 표지

어린 시절, 국민적인 사랑을 받던 스포츠 스타는 단연 권투선수였습니다. 장정구의 근성과 유명우의 연타는 전국을 흥분시켰고, 경기가 있는 날이면 사람들은 TV 앞에서 섀도복싱을 하며 영웅을 응원했으며, 동네 체육관에서는 수많은 무산계급의 청년들이 인생역전을 꿈꾸며 샌드백을 두들겼습니다. 그러나 이제 아무도 권투를 하지 않습니다. 권투가 돈이 되는 시절도 끝났습니다. 주먹으로 상대의 육체를 파괴하는 가장 원초적이던 스포츠는 이제 몇 가지 동작을 댄스음악에 버무려낸 귀여운 다이어트용 율동으로 변했습니다.

탤런트 이시영이 샌드백 앞에 섰습니다. 처음 이시영이 권투를 한다고 했을 때 오랜 권투팬으로서 살짝 비웃었음을 고백해야겠습니다. 당연히 다이어트를 위해서라거나, 이미지메이킹을 위한 단발성 ‘쇼’라고 생각했습니다. ‘사각의 링’이라는 단어에 묻어 있던 인생의 무게를 잊지 못하는 저로서는 권투를 한다는 젊고 예쁜 여자 배우에게 고운 시선을 보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좀 이상합니다. 이시영은 다이어트가 아니라 진짜 권투를 하고 있었습니다. 정식 시합에 출전했고 링에 올라갔습니다. 아마추어 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했고 서울시 대표선발전에서도 우승을 했습니다. 그녀의 경기 모습은 진지했습니다. 가드를 올리고, 스텝을 유지하며 큰 신장과 긴 리치로 잽을 날리고 상대와의 거리를 조율했습니다. 상대의 허점을 파고들었고, 카운터펀치를 적중시켰으며, 속절없이 두들겨 맞기도 했지만 등을 돌리진 않았습니다. 시합이 끝나고 헤드기어를 벗은 여배우의 얼굴은 부어올라 있었습니다.

예쁜 모습만 보이려 하고, 멀쩡한 얼굴도 깎고 다듬으며 1mm라도 콧대를 올리려 애쓰는 시대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여배우 이시영은 주먹에 맞아 눈이 부어오르고 코피를 흘리는 ‘생얼’을 노출합니다. 보디가드들이 주변을 둘러싸는 다른 여배우들과 달리, 이시영은 으르렁거리는 적이 기다리는 링 위의 육탄전에 스스로 맨몸을 던져넣었습니다. 얼마 전 이시영은 인천시청 복싱팀에 입단했습니다. 이제 그녀는 직업 배우이자, 직업 복서입니다. 아름다운 권투영화 의 여주인공 매기는, 너무 많은 나이 탓에 권투를 만류하는 코치에게 말합니다. “32살이 늦은 거라면, 저한텐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올해 이시영은 32살입니다. 영화 속 매기와 같이 이시영도 왼손잡이입니다.

고통이 와도 피하기는커녕 더욱 그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권투입니다. 심장이 뛰는 곳으로 자신을 던져넣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 이 여배우의 ‘꿀주먹’을 응원하며, 이제 직업 복서가 된 이시영에게 에서 코치로 분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 따뜻하고 감동적인 조언을 전합니다. “항상 자신을 보호하라.” 파이팅 이시영!

사직아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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