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지 고약한 술자리 버릇이 생겼다. 바로 휴대전화 카메라로 술 취한 이들의 모습- 주로 자는 장면- 을 찍는 것이다. 단순히 놀려줄 생각에 시작된 일인데, 이튿날 당사자를 놀려주는 재미가 쏠쏠했다.
K 여기자는 곤히 잠은 자신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더니 화들짝 놀라며 “누구 시집 못 가게 하려고 작정했냐. 무슨 소원이든 다 들어줄 테니 사진만은 지워달라”고 애원했다(사진이 좀 흉물스럽긴 했다). 나는 큰 인심이라도 쓰는 양 생각해보겠다는 듯이 눈을 끔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는데, K는 며칠 뒤 소개팅녀의 전화번호를 내 손에 쥐어줬다. 사진이 찍힌 다른 이들도 “허락도 없이 왜 찍었냐. 지워달라”며 항의성 애원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난 “그럴 수 없다”는 말로 버티며 그런 상황을 즐기곤 했다.
그런 버릇이 생긴 지 어언 2년여, 휴대전화에는 다양한 사진들이 쌓였다. 고개를 치켜든 채 코를 골며 자고 있는 고위공직자(맨 위 사진)부터 각기 기묘한 포즈로 꿈나라를 헤매는 회사 선후배들(두 번째~다섯 번째 사진)까지….
그러던 내가 최근 정반대 상황에 놓이는 일이 벌어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며칠 뒤, 울적한 마음에 친한 친구 몇몇과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을 찾았다가 번개 술자리를 가졌다. 꼴통 보수신문 기자, 국영방송이 된 듯한 공영방송 기자, 대형 로펌의 변호사가 멤버였다. 서너 평 되는 공간에 테이블 세 개가 전부인, 신용카드 계산도 안 되는 조그만 선술집에서 나는 서울장수막걸리를 마구 들이켰다.
이튿날 집에서 눈을 떴는데 속이 쓰렸다. 전날 술자리가 어떻게 마무리됐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평소처럼 알아서 찾아왔겠거니 하고 몸을 추스렸다. 그런데 출근해 노트북을 켜보니 아침 일찍 전자우편 한 통이 와 있는 게 아닌가. 전날 만난 친구 가운데 하나가 보낸 것이었다. 내가 쓰러져 잠들어버리는 바람에 모두가 고생스레 나를 일으켜세웠고 모범택시에 실어 집 현관까지 ‘배달’했다는 내용과 함께 사진 몇 장이 첨부돼 있었다. 거의 혼수 상태로 친구의 부축을 받아 길을 걷고 있는 내 모습(여섯 번째 사진 오른쪽)을 보는 참담함이란…. 누가 볼까 낯이 뜨거울 정도로 민망했다.
한창 화가 나려던 순간,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평소 내 취미가 생각났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야, 뭐 이런 사진을 찍었냐”며 웃고 말았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격언은 술자리에서도 적용되나 보다.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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