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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조’가 차라리 낫다

월드컵 조편성과 한·일 축구
등록 2013-12-11 14:39 수정 2020-05-03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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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아시아에서 가장 매혹적인 축구를 하는 팀이 일본이라는 사실엔 이견이 없는 듯하다. FC 바르셀로나의 패스축구를 상징하는 ‘티키타카’를 인용해 ‘스시타카’라 불리는 일본의 패스축구는 이탈리아와 네덜란드를 그로기 상태로 몰아가더니 마침내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5위 벨기에를 적지에서 무너뜨렸다. 지난 11월 네덜란드와의 평가전에서 단 6번의 패스로 네덜란드 수비진을 마비시켜버린 일본의 동점골은 일본 축구가 가닿은 어떤 경지였다. 지금 일본은 내년 월드컵에서 가장 주목받는 팀이 되었고, 축구 강국들이 가장 원하는 스파링 파트너가 되었다. 한국이 슈퍼팀과의 A매치 성사를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지금 세계 축구계에서 한국과 일본의 입지가 이렇게까지 차이가 난 이유는 목표 설정의 차이 때문으로 보인다. 한국은 지난 28년간 8차례 연속 본선 진출에 성공한 6개국 중 하나다(나머지는 브라질·아르헨티나·이탈리아·스페인·독일). 2002년 월드컵 전만 해도 한국 축구의 목표는 월드컵 ‘1승’이었다(한-일 월드컵 이전까지 한국 축구는 4무10패를 기록 중이었다). 2002년에 너무 많은 걸 이룬 한국의 다음 목표는 ‘원정 1승’이었고 이것은 2006년 독일 월드컵 토고전에서 달성되었다. 그다음 목표는 ‘원정 16강’이었으며 이것은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에서 완성되었다.

아시아 최초의 월드컵 4강 진출 등 월드컵에서의 주요 실적을 한국에 선점당하고 난 일본의 목표는 달랐던 것 같다. 전시용 실적보다는 세계무대에서의 경쟁력을 갖추고자 한 일본은 2010년 월드컵이 끝나자마자 유벤투스의 명장 알베르토 차케로니를 데려와 3년째 팀을 맡기고 있다(그사이에 한국은 3명의 감독이 들어섰다).

냉정하게 말하자. 2002년 월드컵을 제외한 한국의 월드컵 성적은 2승6무12패다. 2승은 토고와 그리스에 거둔 것이다. 우리는 원정 1승도, 원정 16강도 해냈지만, 지더라도 세계 최강과 난타전을 펼친 일본보다 임팩트가 있는 것 같진 않다.

한국 축구의 다음 꿈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항상 1승, 16강 등의 숫자로 목표를 설정하는 것에 익숙해 있던 한국에 모든 걸 달성한 지금 브라질 월드컵의 목표를 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사실 한국 축구팬들은 월드컵에서 한국팀의 실력으로 상상할 수 있는 보고 싶은 장면은 거의 다 보았다. 월드컵 출전이 주는 열기와 흥분이 예전 같지 않은 이유다. 그렇다면 이제는 우리도 조추첨의 행운으로 만드는 16강, 8강이 아니라 월드컵에서만 볼 수 있는 월드클래스 팀과 죽음의 조에서 펼치는 정면 승부를 즐겨야 할 때가 아닐까. 3패를 당하면 어떤가. 토고와 그리스에 거둔 승리보다, 20년 전 미국에서 (비록 승리하지 못했더라도) 스페인·독일과 펼쳤던 난타전이 여태 우리에게 더욱 강렬한 추억으로 남았듯, 이제는 월드컵이 자족적인 실적보다는 오래가는 추억을 선물받는 대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김준 사직아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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