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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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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

등록 2014-03-11 15:22 수정 2020-05-03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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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아의 피겨스케이팅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보여주었다. 최고가 무엇인지를, 그리고 최고는 왜 아름다운지를. 은퇴 무대가 된 소치 올림픽에서도 그녀는 정말 중요한 무언가를 우리에게 선사했는데, 그것은(개인적 견해이긴 하지만) 최고와 1등은 다르다는 ‘자각’이었다. 그렇다. 1등과 최고는 분명 다른 것이다. 올림픽에선 4년마다, 세계선수권대회에선 1년마다, 국내에선 대회 때마다 1등이 바뀔 수도 있겠지만 최고는 영원하다.

1등이라는 이유로 1등을 기억하지 않는다

우리는 정말 1등을 사랑했다. 여태껏 우리가 상대적 경쟁을 해왔기 때문이고, 1등이 모든 걸 독식했기 때문이다. 1등을 해라. 1등 하면 짜장면 사줄게부터 시작해서 1등 하면 동네 초입에 플래카드를 높이 걸었다. 1등은 모두의 지향점이었고 모든 걸 아우르는 그야말로 ‘전부’였다. 비자금을 조성하고 불법 증여를 해도 1등이면 1등이고, 정부기관이 선거에 개입해도 1등은 물릴 수 없는 거였다(안다, 러시아 심판이 선거에 개입한 게 아니라서 당신이 참았다는 거 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안다. 1등과 최고는 다르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 오랫동안 우리에게 각인돼온 모 기업의 캠페인 문구를 수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다. 역사는 1등이라는 이유로 1등을 기억하지 않는다. 오직 최고만을 기억할 뿐이다. 오매불망 우리의 1등들이 이제 1등이 아닌 최고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 나라의 미래가 너무나 어둡기 때문이다. 굳이 역사를 거론할 필요 없이.

오늘 집을 나서는 아이에게 1등이 되라고 하지 말자. 1등을 목표로 한 아이는 반에서 마흔다섯 명의 아이와 싸워 이겨야 한다. 만약 1등이 아닌 최고가 되라고 한다면 아이가 싸워야 할 사람은 한 사람으로 준다. 최고가 되는 과정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아마 당신에게도 당신의 아이에게도 그쪽이 더 이익일 것이다. 그래도 1등이 짱이지, 생각이 든다면 굳이 이런 말까지(죄송합니다, 소생의 필력이 누추해) 덧붙이고 싶다. 당신은 언제 한 번이라도 ‘1빠’(1순위)인 댓글이 베스트 댓글에 오르는 걸 본 적이 있습니까, 이 얘기다. 스스로의 성질을 개선하지 않으면, 그리고 개개인의 방향을 수정하지 않으면 우리가 구축한 이 1빠 사회의 불행은 끝없이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1등 자리는 한 사람에게만 열려 있지만 최고의 자리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가능성 제로인 변방의 국가에서 김연아는 그것을 몸소 보여주었다. 1등의 길을 걸은 게 아니라 최고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등이라서 최고가 아니라 최고였으므로 1등이었다는 걸 증명했으며, 고맙게도 최고는 등수와 무관하다는 자각까지 우리에게 선사해주었다.

퍼스트가 아니라 베스트

그녀의 마지막 무대를 장식한 노래는 존 레넌의 이었다. 정말이지 상상해본다. 퍼스트가 아니라도 베스트인 한국을. 1등 한국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1류 한국은 가능한 일일 것이다. 우리에게 각인된 1등이라는 어릿광대를 이제 그만 보내주자. 그것은 이미 죽은 아버지들의 단어이자 가치이다. 아디오스 노니노~ 파이팅 코리아!

박민규 소설가* 간판 갈고 신장개업이랄 순 없지요. ‘논단’을 ‘노 땡큐!’로, 마지막 페이지의 문패를 가는 것만으로는 안 됐습니다. 간판에 맞는 요리사가 필요했습니다. 2003년 과 으로 두 장편문학상을 동시에 수상하며 등장한 소설가 박민규는 글을 받고 싶은 리스트의 맨 꼭대기에 있었습니다. 소설가는 덜컥 허락합니다. “졌다. 이제는 정말 졌다,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생각이 든다.”(제561호 2005년 5월31일치 ‘주중적국’) 노랫말인 듯 사뿐거리면서 할 말은 다 하는 유례없는 칼럼은 그렇게 열두 편이 쌓였습니다. 두고두고 읽는 시론의 탄생입니다. 이후 ‘노 땡큐!’는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을 가진 발랄한 필자 발굴이라는 어려운 숙제를 해가며 지금도 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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