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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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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유럽·미국 기자 출신 작가를 만나다


‘미스터리팬 기자’가 뽑은 행복한 2008년의 추리·미스터리 물건들
등록 2008-12-25 16:57 수정 2020-05-03 04:25

어떤 출판 전문가와 이야기하다가 살짝 충격을 받았다. 추리·미스터리 소설을 좋아한다니까 “뭐 그런 책을 열심히 읽느냐”고 진심으로 의아해한 탓이었다. 책에 대한 사랑이 빈민을 향한 테레사 수녀의 그것 못지않은 이 양반마저 장르소설에 대한 편견과 문화에 등급을 매기는 습성을 탑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책 전문가는 몰랐던 모양이다. 세상에서 경제적인 책 읽기가 바로 추리소설 읽기라는 것 말이다. 추리소설은 모든 문장이 최후의 결말을 위해 작가가 의도적으로 배치한 것이어서 불필요한 부분이 없다는 오랜 추리 옹호론을 들려주고 싶었다. 그리고 추리소설만큼 시간 보내기에 좋은 소설 장르가 또 있냐고도 묻고 싶었다.

 ‘미스터리팬 기자’가 뽑은 행복한 2008년의 추리·미스터리 물건들

‘미스터리팬 기자’가 뽑은 행복한 2008년의 추리·미스터리 물건들

노후를 위해 써놓곤 갑자기 죽어버리다

그러나 무작정 추리소설이 좋다고 우겨서는 동의를 얻기 어려운 법. 일반 소설들을 공격하기로 했다. 순수문학 좋지요, 그런데 요즘 우리 소설 속에 우리 사회가 있나요? 입시, 토지 오염, 고등학생들의 고민, 주상복합 건물이 부추기는 집값 거품 문제 같은 것들 말입니다, 라고. 우리가 지금 고민하는 문제를 순수소설들이 안 다루니 추리소설을 읽게 된다고 몰아쳤다.

물론 진짜 중요한 사실은 숨겼다. 올해가 한국 추리소설 100주년이건만 우리 추리소설은 바닥을 기고 있고, 대신 외국 추리소설들이 이런 사회적 흐름을 다루는 실정 말이다. 어찌됐든 공격 성공. 일단 미야베 미유키의 을 한번 읽어보라고 권해 확답을 받아냈다.

비록 한국 추리가 부진해도 추리팬으로 사는 것은 점점 더 행복해지고 있다. 외국 추리소설이 쏟아져나오는 덕분이다. 전에는 1년에 여남은 권만 사면 그해 신간을 섭렵할 수 있었는데, 요즘에는 100권을 사도 모자란다. 시간과 책값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올해에도 전작 독파에 도전했지만 결국 60여 종을 새로 읽는 데 그치고 말았다. 읽어본 책들 중에서 2008년 국내에 선보인 추리와 미스터리의 물건들을 골라봤다.

추리팬으로서 지난해는 요코야마 히데오와 만나 행복한 해였다. 인간적인 중년 남성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그의 소설이 페미니즘 관점에선 좀 트집 잡힐 구석이 있을지 몰라도 그 재미에 열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사건 기자’ 출신이라니 기자로서 어찌 주목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올해에는 유럽과 미국의 기자 출신 작가들이 행복하게 해줬다. 2008년을 정의하자면 ‘스티그 라르손과 마이클 코넬리를 만난 해’라고 하겠다. 물론 기자라서 팔이 안으로 굽은 것은 절대 아니다. 스웨덴 기자 스티그 라르손은 노후 대책을 위해 3부작 소설 을 썼다고 한다. 이 책이 대단한 성공을 거뒀는데 정작 그는 마지막 3부를 쓴 직후 갑자기 죽어버렸다. 좌우지간 스웨덴 미스터리로선 모처럼 나온 글로벌 히트작이다. 국내에서도 적잖게 팔렸는데, 책의 재미를 생각하면 두 배는 더 팔려야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출판사엔 미안한 말인데 표지가 안티 수준이다. 시대착오적이고 키치적인 표지에 거부감을 느껴 잠깐 고민하다 도전했는데, 독립된 이야기인 1부의 경우 올해 건진 최고의 미스터리로 드러났다.

이 책 최고의 매력 포인트는 단연 주인공 리스베트 살란데르다. 스웨덴의 국민 캐릭터 ‘말괄량이 삐삐’가 심한 학대와 사회적 무관심 속에 자라나면 아마 이랬을 법한 아가씨다. 빼빼 마른 발육부진 몸매에 보호관찰 대상에다 한정치산자인 사이코인데, 대신 천재적인 컴퓨터 실력이 있다. 해킹 실력 하나로 남의 컴퓨터를 드나들며 거대한 비리와 끔찍한 범죄를 풀어낸다. 시리즈는 술술 읽히는 이야기의 힘 자체가 세다. 스티그 라르손의 따뜻한 문체 덕분에, 범죄의 묘사는 실로 끔찍하고 짜증 나는 수준인데도 전혀 부담스럽지 않게 읽히는 묘한 경험을 하게 해준다.

또 다른 기자 출신 미국 작가 마이클 코넬리는 올해 로 한국 독자와 처음 만났다. 미국에서 인기가 대단한데도 뒤늦게 국내에 선보인 작가다. 코넬리는 이 소설에서 능글능글한데다 돈독이 잔뜩 오른 독특한 변호사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극악한 범죄자의 사건을 맡은 변호사가 의뢰인의 협박을 피해가며 멋지게 한 방 먹이는 이야기다. 빨리 다음 작품이 나오기를 기대하게 되는 미국식 ‘버터맛’ 미스터리다.

, 이런 설명 불가 책까지

기존 강자들의 새 책들은 어땠을까? ‘미미 여사’ 미야베 미유키는 최고 걸작 의 속편 격인 으로 팬들을 설레게 했다. 그러나 은 나쁘진 않은 수준이어서 이 왜 걸작인지 다시 확인시키는 데 그쳤다. 역시 기본은 보장했지만 지난해의 처럼 신선하진 못했다.

왕성한 생산성이 고마운 히가시노 게이고도 올해는 기본 유지에 충실했다. 물론 히가시노의 기본은 다른 작가들에게는 최고 수준이다. 그가 놀라운 점은 과연 어떻게 마무리지으려고 이렇게 설정했나 싶을 정도로 기묘하게 시작해놓고서 신통방통하게 이야기를 정리하는 점이다. 은 히가시노 특유의 이런 힘을 잘 보여줬다. 은 뻔한 듯하다가 독자를 때리는 반전으로 책값을 했고, 은 초기 히가시노의 재미를 다시 한번 만나는 기쁨을 줬다.

올해는 신작 못지않게 일본 추리소설사의 주요작들이 줄줄이 소개됐다. 으로 일본 추리소설의 아버지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들이 이제야 번역 출판된 것은 특히 반가운 노릇이었다. 요코미조 세이시의 고전 이 국내에서 예상 이상의 인기를 모은 것도 인상적인 장면이다. 너무나 일본적인, 일본에서만 가능한 괴담풍 추리소설 특유의 극단적인 설정을 국내 팬들도 어느 정도 즐기게 됐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런 유의 기괴한 일본 추리물의 극단을 보여주는 소설이자, 개인적으로 올해 가장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는 책이 (유메노 큐사쿠 지음)다. 이상하게 쓰려고 작정한 이 설명 불가능 소설을 펴낸 출판사의 용기가 놀랍다. 책을 읽는 과정은 괴롭고 난해했지만 이런 책까지 나올 정도로 우리 출판시장의 폭이 넓어진 점이 반가웠다. 올해 읽은 가장 몽환적인 미스터리 (제임스 처치 지음)도 독특하긴 하나 괴상하기로는 이 책에 게임도 안 된다.

올해 새로 만난 반가운 캐릭터로는 우선 오츠이치의 〈GOTH〉(고스) 주인공을 꼽고 싶다. 요즘에는 연쇄살인범이 연쇄살인범들을 잡아 족치는 미국 드라마 시리즈처럼 범죄자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게 유행이다. 〈GOTH〉는 괴물 같은 본성을 숨기고 사는 한 고등학생이 주변의 사건들에 휘말리면서 살인마 특유의 감각으로 범죄자를 찾아나간다는 설정이다. 내용은 잔인한데 이상하게 상큼한 구석이 많다. 지난해의 충격·잔인 베스트 미스터리가 이었다면 올해는 단연 〈GOTH〉와 이라고 하겠다. 〈GOTH〉는 올해 최고로 재수 없었던 미스터리이기도 하다. 19살 이하 판매금지 조처를 당하는 바람에 장사를 망쳤다. 그런데 정작 글보다 훨씬 잔인한 그림이 나오는 만화 〈GOTH〉는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았다. 도대체 왜?

올해 최고의 루키는 60살에 데뷔한 여성작가

이 밖에 베스트셀러 작가 딘 쿤츠는 영혼을 보는 새로운 주인공 오드 토머스 시리즈를, 제프리 디버는 새 여성 페르소나 캐스린 댄스를 내놨다. 캐스린 댄스는 제프리 디버가 명캐릭터 링컨 라임에 이어 신작 에서 선보인 여성 경찰로, 심리학 지식과 관찰 분석으로 사람의 마음을 읽어 추리하는 심문의 달인으로 이후 시리즈를 기대하게 만든다.

올해 최고의 루키로는 세련된 차가움이 매력적인 의 작가 아마노 세츠코를 뽑고 싶다. 늦깎이 데뷔 작가가 흔한 추리소설계에서도 드문 60살에 데뷔한 여성작가다. 은 가히 올해 최고의 여성적 미스터리다.

구본준 기자 한겨레 기획취재팀장 bon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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