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무함마드, 고맙습니다

상상한 모습과 달리 오히려 선행을 베푸는 데 익숙했던 난민들… 수는 느는데 반난민 정서는 거세져, “분산 수용 합의”만이 해법
등록 2016-03-01 08:27 수정 2020-05-02 19:28
시리아  난민의  길  2천km  종단  르포


알란의  집은  어디인가


① 국경을 넘어 생의 한계를 넘어
② 아이들이 아니었으면
③-(1) 꼴찌 난민, 보트피플을 꿈꾸다
③-(2) 국경 열었지만 일자리 없어
③-(3) 단속 피해 정원 초과한 배 탄 흔적
③-(4) 캄캄한 밤바다에 온 가족이 떠있다
④ 닫힌 국경에서 통곡하다
⑤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어디인가
⑥ 흩어진 가족 떠올리며 눈물짓다
⑦ “하루 만에 또 헤어졌어요”
⑧ 무함마드, 고맙습니다- 마지막 회
*각 항목을 누르면 해당 기사를 보실 수 있습니다.


시리아 난민 무함마드(33·가명)와 그의 아내가 2015년 12월10일 난민캠프로 쓰이는 그리스 아테네 경기장 안에서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취재진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정용일 기자

시리아 난민 무함마드(33·가명)와 그의 아내가 2015년 12월10일 난민캠프로 쓰이는 그리스 아테네 경기장 안에서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취재진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정용일 기자

‘어, 이건 아닌데….’ 유럽에 있는 난민들을 3주간 현지 취재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을 때 든 생각이다. 유럽을 향해 지중해를 건너다 시리아 난민 세 살배기 알란 쿠르디가 터키 남부 보드룸 해변에서 숨진 채 발견된 9월2일,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이미 전세계 최대 사건으로 부각된 유럽 난민 사태는 알란의 죽음을 계기로 그에 대한 보도가 쏟아질 대로 쏟아진 상태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난민, 목숨을 걸고 지중해를 건너는 난민, 수천km 거리의 북·서유럽 나라들을 향해 유럽을 종단하는 난민 등. 당시 난민 보도의 주제들이다.

취재 준비에 또 한 달이 걸렸다. 뒤늦게 도착한 유럽 땅에서 어떤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까? 취재 가치에 회의를 느끼면서도 선뜻 ‘이건 아니다’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던 건 너도 나도 난민을 잘 몰랐기 때문이다.

난민. 그들 사정도 어렵지만 난민이란 말부터가 어렵다. “전쟁이나 재난 따위를 당하여 곤경에 빠진 백성.” 난민이란 집단의 이미지는 떼지어 행렬하는 피난민의 이미지다. 그렇다면 난민 한 사람의 이미지는? 먼저 텅 빈 눈동자가 떠올랐다. 전쟁으로 집과 가족과 다른 모든 것을 잃은 자의 슬픈 눈동자. 참혹한 전쟁과 죽음의 현장을 목격한 그들은 분명 냉소적이고 주변을 경계하며 말이 짧을 터였다. 혹은 캄보디아 오지에서 만났던 길거리 아이들처럼 만나는 사람마다 손을 내밀어 구걸하는 이미지. 하루하루 연명하기 위해서라면 모든 자존감을 내려놓는 이들과 진실한 대화가 가능할까? 이렇게 양극단을 오가는, 난민에 대한 이미지를 유럽에서 만난 난민들이 무너뜨려주었다.

선행은 시리아의 전통인가

우리는 인터뷰를 한 뒤에 웬만하면 난민들의 연락처를 받아내려고 했다. 이후 그들의 상황이 궁금해서였다. 인터뷰 이후 연락을 주고받은 난민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사람이 있다. 그는 내가 만나본 사람 중에 가장 길게 안부 인사를 했다. 취재진은 인터넷 채팅앱 ‘와츠앱’을 통해 그와 문자를 주고받을 때마다 웃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 또 안부를 오래 묻는군요.”(다 같이 웃음) 하지만 그의 상황이 먼 나라 취재진의 안부를 신경 쓸 만큼 녹록지 않다는 걸 잘 아는 우리는 그의 따뜻한 마음에 곧 숙연해지곤 했다.

그는 지난해 12월10일 그리스 아테네 태권도 경기장에서 만난 시리아 난민 무함마드(33·가명)다.(무함마드의 사연은 제1096호 ‘닫힌 국경에서 통곡하다’ 참조) “잘 지내냐” 한마디 인사에 그가 보내는 답은 늘 이렇다. “당신은 잘 지내나요? 우린 잘 지내요. 아내와 아이들이 당신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당신과 당신의 친구들에게 행복하고 좋은 일이 있기를 바랍니다. 친구들에게도 안부를 전해주세요. 우리는 당신들을 많이 사랑합니다.” 그러곤 대화 중간이나 마지막에 한 번 더 긴 안부 인사를 보탠다. 그의 행색은 초라했지만 마음 씀씀이는 넉넉했다. 난민캠프로 변한 아테네 태권도 경기장의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누면서 그는 여비도 모자란 살림에 빵 한 조각과 담배를 먼저 권했다.

다른 시리아인들도 그랬다. 그들은 선행을 베푸는 데 익숙해 보였다. 때론 시리아인들이 선행을 좋아한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 같았다. 독일에서 만난 시리아 난민들은 배웅이 길었다. 집을 방문한 손님이 떠날 때 현관이나 집 앞에서 작별 인사를 하는 데 익숙한 한국 취재진은 당황했다. 그들은 인터뷰가 끝난 뒤 우리의 목적지인 숙소 근처까지 배웅하려고 했다.

시리아 난민 리나(36·가명)의 가족은 지난해 12월17일 독일 뉘른베르크 집에서 인터뷰가 끝난 뒤 취재진을 따라나섰다. 지하철을 같이 탔고, 숙소까지 데려다주겠다는 걸 한사코 말려 환승역에서 돌려보냈다. 다음날 뮌헨에 있는 한 카페에서 만난 시리아 난민 사파(20·가명) 부부도 우리를 다음 목적지까지 배웅하려고 했다. 그곳 지리에 아직 익숙지 않은 그들이 길을 헤맨 덕에 우리는 구글 지도를 보고 찾아가겠다며 그들을 중간에 돌려보냈다.(리나와 사파의 사연은 제1100호 ‘하루 만에 또 헤어졌어요’ 참조)

시리아인들에게 실제로 선행의 전통이나 문화가 있는지 전문가에게 물었다. 오랜 기간 중동·이슬람학을 연구해온 이희수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의 설명이다. “아랍 사회는 자신에게 도움을 의탁한 사람을 무슨 일이 있어도 3일 동안 보호해주고 내일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오늘 양식을 나눠 먹는다는 삶의 철학이 있다. 또 공동체 안에서 부자의 곳간에 한 톨의 곡물이라도 남아 있는 한 그 공동체에 굶주리는 자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공동체 철학이 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조금만 여유가 있으면 나누는 게 관습화되고 체질화된 그들의 미덕이다.”

미·러의 합의에도 종전은 멀어

선행의 전통이 살아 있는 시리아에서 전세계 최대 난민을 배출한 점은 아이러니다. 인구 1800만 명가량의 나라에서 1200만 명가량이 국내외 난민이 되었다(2015년 6월 유엔난민기구). 이 가운데 시리아를 떠난 난민이 440만 명에 이른다. 전쟁이 끝나지 않는 한 시리아 난민 규모는 더 늘어날 것이다.

2011년 3월 내전이 시작된 뒤 전쟁은 5년간 지속되고 있다. 종교·부족 간 갈등 그리고 40년간 철권통치를 휘두른 아사드 독재정권에 대한 대중적 불만이 복잡하게 얽힌 전쟁은 러시아와 미국 등 서방 나라가 개입하고 수십 개 반군들이 이합집산하면서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최근 미국과 러시아가 2월27일부터 시리아에서의 적대 행위를 중단키로 합의했지만 시리아의 전쟁 피해가 완화될지언정 전쟁 종식을 이끌 것을 기대하긴 어렵다. 두 나라가 핵심 반군 세력인 이슬람국가(IS)와 알카에다 계통의 알 누스라 전선에 대한 공습은 허용키로 했기 때문이다.

서정민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 대학원 교수는 “이미 공식적으로는 러시아가 테러세력만 공격한다는 명분으로 개입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번 합의로 특별히 달라진 점은 없다. 민간인 시설이나 온건 반군에 대한 공격을 완화하거나 인도적 지원을 강화할 순 있지만 전쟁 종식으로 이끌기엔 이미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고 말했다.

시리아는 붕괴 직전의 상황이다. 시리아의 전쟁 상황을 전세계에 전하는 시리아인권관측소(SOHR)는 2월22일까지 약 5년간 시리아 내전으로 모두 27만여 명이 숨졌다고 발표했다. 이 가운데 민간인이 7만여 명이다. 실종자와 납치 피해자 수만 명을 제외한 수치다.

전쟁의 고통을 죽음만으론 설명할 수 없다. 유럽에서 만난 여러 시리아 난민들은 “우리 마을에선 먹을 것도 약도 구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적을 궤멸하기 위한 시리아 정부군과 반군들의 포위 작전 때문이다. 2월11일 발간한 유엔 시리아 내전 조사위 보고서를 보면 수도 다마스쿠스 외곽 지역 등에 포위된 40만 명의 시민들이 음식, 물, 의약품, 전기 부족으로 극심한 피해를 겪고 있다.

지난해 6월 정부군과 레바논 헤즈볼라가 포위한 다마스쿠스 근처 마다야 마을이 대표적이다. 이곳에선 물품 반입이 차단돼 주민들이 풀과 고양이를 먹고, 전기와 연료가 없어 쓰레기로 불을 피워 음식을 조리한다고 전해졌다. 그 밖에도 의료 후송 시설 부족으로 시리아에서 약 500만 명이 고통받고 있다고 한다.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한 반이슬람
독일 반이슬람 운동단체인 ‘유럽의 이슬람화를 반대하는 애국적 유럽인들’(PEGIDA) 지지자들이 2월15일 독일 드레스덴의 한 교회 앞에서 시위하고 있다. DPA 연합뉴스

독일 반이슬람 운동단체인 ‘유럽의 이슬람화를 반대하는 애국적 유럽인들’(PEGIDA) 지지자들이 2월15일 독일 드레스덴의 한 교회 앞에서 시위하고 있다. DPA 연합뉴스

고국을 떠난 난민들이 기댈 곳은 다른 나라 정부와 국민들의 선의다. 선의가 아닌 책임이라 부르기엔 강제할 수단이 변변찮다. 난민 대부분은 그럴 의지와 능력이 있어 보이는 독일을 목적지로 삼았다. 난민 수용에 적대적이거나 소극적인 헝가리 같은 나라로 가면 나중에 신변을 보장받을 수 없거나 정착하는 데 애먹을 것을 걱정했다.

하지만 지난해까지만 해도 난민들에게 관대한 것처럼 보였던 독일, 오스트리아 같은 나라들도 끝없이 밀려드는 난민 행렬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 독일 정부는 지난해 10월 유럽연합(EU) 가입을 도울 테니 난민들이 유럽으로 들어오는 걸 사전에 차단해달라고 터키 정부에 요청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2월24일 발칸반도 9개국 정부와 난민 대책 회의를 열어 여행증명 서류 등이 없는 난민들은 수용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세웠다.

EU 차원에서 지난해 9월 각 회원국이 난민 16만 명을 경제력 등에 따라 분산 수용하는 원칙에 합의했지만 구체적 실행안은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독일 등 유럽에선 반난민·반이슬람 정서가 번지고 있다. 독일 반이슬람 운동단체 ‘유럽의 이슬람화를 반대하는 애국적 유럽인들’(PEGIDA)은 2월6일 유럽 9개 도시에서 반이슬람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집회에서 난민 수용에 반대하며 난민 유입으로 서구 문명이 이슬람 문화에 정복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지난해 말 독일 쾰른 새해맞이 행사에서 벌어진 집단 성폭력·절도 사건에 대해 검찰이 용의자 대부분을 알제리·모로코 등의 출신 난민들로 지목하자 이들은 ‘강간’(rape)과 ‘난민’(refugee)을 합성해 “Rapefugee는 환영하지 않는다”는 팻말을 들기도 했다.

이런 ‘이슬람 포비아(혐오)’는 유럽 난민 사태에 직접적 영향을 받지 않는 한국에서도 드러난다. 인터넷에서 10차례 연재한 ‘시리아 난민의 길 2천km’ 기사에 달린 수백 개의 댓글 대부분은 이슬람 문화의 성격을 ‘테러’와 ‘성폭력’으로 규정했다. 그러곤 이슬람을 믿는 자들은 언제든 테러분자가 될 수 있으니 수용할 수 없다는 절대수용 불가론, 이슬람 종교를 버린 자들만 수용해야 한다는 조건부 수용론, 국내에 있는 어려운 이웃이나 살피라는 국내 집중론을 폈다.

이희수 교수는 이슬람 포비아에 대해 “극단적인 일부 기독교 세력이 종교적 도그마로 글로벌 이슈를 판단하는 가치관이 그 첫 번째 원인이고, 이슬람권에서도 반이슬람적 범죄행위로 규탄받는 알카에다와 IS 같은 극단적인 테러행위를 이슬람권 전체 문화로 일반화하고 난민 문제에 잘못 대입하는 인식의 오류가 또 다른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유럽에서 만난 시리아 난민들은 탈출 원인으로 크게 두 가지를 꼽는다. 정부군의 폭격과 IS의 처형·납치·성폭행. 그들은 IS에 탄압받고도 IS와 동일시되고 있다.

그리스에 있나요? 어디에 있나요?

난민 행렬은 끊이지 않고 있다. 유엔난민기구가 2월23일까지 집계한 올해 1~2월 지중해를 건너 유럽 땅에 도착한 난민은 11만여 명이다. 지난해 하반기에 견줘 적은 규모지만, 전년 동기 대비 약 10배다. 당분간 이어질 난민 사태는 전쟁 종식과 재건, 난민 분산 수용 말고는 왕도가 없어 보인다. 이희수 교수는 “터키, 요르단, 유럽 각국이 이미 품에 안고 있는 난민을 자기 사회에 어떻게 안착시키고 이를 국제사회가 어떻게 분담하고 지원할 것인지 당장 본격적으로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무함마드의 긴 안부 문자는 1월11일 이후로 끊겼다. 그와 연락이 닿은 한 달 동안 그의 사정은 변함이 없었다. 브로커의 재촉에 떠밀려 터키 해변에 가방을 두고 배에 올라탄 그는 시리아 국적을 증명할 서류가 없었다. 그는 아내, 세 아들과 함께 그리스 국경을 넘지 못한 채 발이 묶여 있었다. 현재 그의 가족이 그리스에 정착하기로 했는지 어딘가로 쫓겨났는지 알 수 없다. 여전히 그가 길게 안부 인사를 하는지도 알 수 없다.

김선식 기자 kss@hani.co.kr

※카카오톡에서 을 선물하세요 :) ▶ 바로가기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