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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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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만에 또 헤어졌어요”

20대 시리아 신혼부부, ‘꿈의 나라’ 독일에 도착했지만 거주 이전의 자유 없는 난민 정책 탓에 강제 이별
등록 2016-02-23 10:25 수정 2020-05-02 19:28

두툼한 꽃다발 모양의 독일은 한반도 면적의 1.6배 크기다. 최근 난민들이 이동 경로로 삼고 있는 출발지 터키부터 북서쪽 독일 국경까지 약 2천km 여정에서 만난 대부분의 난민들은 독일로 가고 싶다고 말했다.

독일이 난민들에게 집과 돈을 제공한다며 그들은 꽤 구체적인 이유를 댔다. 집과 돈은 단지 눈에 보이는 물질적 혜택만이 아니었다. 안전하고 평범하게 살아가길 원하는 이방인에게 손을 내미는 보이지 않는 환대와 같은 것이었다.

독일행은 브로커한테 사기를 당해 여비를 날리고 출발지 터키에 발이 묶여 있는 난민에겐 머나먼 꿈이었고 유럽에서 육로를 밟아 이동하는 난민에겐 꿈같은 현실이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터키 서쪽 바다에서 아이들과 함께 고무보트에 올라탈 만한 가치가 있는 길이었다. 그 결과 2015년 한 해 동안 인구 8100만 명의 독일 땅에 역대 최대 규모인 109만여 명의 난민이 들어왔다(독일 내무부).

출입이 허용되지 않는 난민캠프

지난해 12월16일 독일에 도착한 난민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 찾아간 도시는 남부에 있는 파사우였다. 국경 근처 도시 가운데 가장 많은 난민이 수용돼 있다고 알려진 도시였다. 독일에 도착한 난민들은 한 도시 안에서도 여러 난민캠프에 분산 수용된다.

파사우에서 처음 찾아간 난민캠프는 병원이나 학교에 있을 법한 흰색 콘크리트 건물이었다. 관리자들은 예상 밖으로 고압적이었다. 난민들이 취재진과 대화하지 못하게 막았고 출입 요청을 거부할 뿐 허가 절차에 대해선 모르쇠로 일관했다. 대신 그곳 관리자들은 귀찮은 일을 떠넘기듯 파사우에서 가장 큰 난민캠프를 일러줬다. 난민 500명가량을 수용한 곳이라고 했다. 차로 20분 거리에 있었다.

파사우에서 가장 크다는 난민캠프에서도 출입 통제는 마찬가지였다. 캠프 미디어 담당자는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캠프를 지키고 있던 한 경찰은 양해를 구하며 말했다. “지금 우리는 (지난해 11월13일 ‘파리 테러’를 자행한 수니파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세력인) 이슬람국가(IS) 대원이 캠프에 진입하는지를 확인하고 있다. 미디어 출입에 대해서도 엄격할 수밖에 없다.”

발길을 돌려 차로 2시간 거리의 뮌헨으로 갔다. 뮌헨 최대 난민캠프 안에서 난민들 사이에 며칠 전 싸움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터였다. 그 캠프는 축구장 4분의 1 크기 정도의 반구형 비닐하우스 모양이었다. 이곳 역시 캠프를 둘러싼 철제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용치 않았다. 캠프를 드나드는 난민도 드물었다.

오후 4시 캠프를 빠져나온 파키스탄 난민 하산(28)은 독일어 수업을 들으러 가는 길이었다. 손엔 독일어 교재가 들려 있었다. 그는 이곳에 난민 300명가량이 있고 그들은 알제리, 세네갈, 모로코,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에서 가족 없이 혼자 독일에 온 이들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며칠 전 난민들 사이에 다툼이 벌어져 이곳 경비가 더 삼엄해졌다며 20분 거리의 다른 캠프 위치를 일러줬다.

그가 일러준 캠프의 분위기는 남달랐다. 캠프를 둘러싼 철제 울타리에 색실로 나무, 꽃 무늬와 함께 ‘WELCOME!’(환영합니다!)이라고 써놓았다. 공원 공터에 2층짜리 흰색 가건물 4개를 설치한 이곳은 2.5m 높이의 철제 울타리가 둘러쳐져 있다. 울타리 안에선 어린아이 4명이 자전거를 타며 놀고 있었다.

캠프를 오가는 난민들은 이곳에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시리아, 나이지리아, 소말리아 출신 난민 100여 명이 지내고 있다고 전했다. 이곳 역시 출입은 허용되지 않았고 미디어 담당자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더 이상 다른 캠프를 찾아다니지 않고 캠프 밖에 나온 난민들을 만나기로 했다.

지난해 12월17일 낮 12시, 흰색 히잡을 쓴 한 여성이 캠프를 빠져나와 급하게 발길을 옮겼다. 시리아 난민 사파(20·가명)였다. 키 160cm 정도에 작은 체구인 그는 청바지에 부츠를 신고 있었다.

임신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산부인과에 가는 길이었다. 사파는 남편 아딜(27·가명)과 함께 캠프에서 살고 있다.

이튿날 오후 2시 뮌헨의 한 카페에서 사파를 만났다. 남편 아딜도 같이 왔다. 아딜은 여느 아랍인 남성처럼 덥수룩한 턱수염을 길렀다. 머리를 왁스로 가지런히 정리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독일 뮌헨에서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시리아 난민 사파(가명)와 아딜(가명) 부부.

독일 뮌헨에서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시리아 난민 사파(가명)와 아딜(가명) 부부.

새신랑, 결혼 한 달 만에 홀로 탈출

그들은 한국 드라마를 좋아한다고 했다. 둘 다 배우 김태희의 팬이다. 넉 달 전 한국에서 방영한 드라마 (김태희 주연)도 봤다고 했다. 시리아에선 2010년 무렵부터 한국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드라마를 좋아하는 젊은 부부는 낯선 땅에 온 난민이라고 부르기 어색할 만큼 마냥 행복해 보였다.

부부는 사파가 15살이던 2010년에 약혼했다. 아딜이 첫눈에 반했다. 사파가 학교 근처에서 전화카드를 사고 있을 때였다. 아딜이 홀린 듯 다가가 말을 걸었다. “잠깐만요. 당신이 예쁘고 맘에 드는데 앞으로 전화해도 될까요?” 아딜이 전화번호를 알아내 연락했지만 사파는 받지 않았다. 한 달 뒤 사파가 마음을 열었다. 둘은 4년이 지난 2014년 8월 법적인 부부가 됐다.

6년째 이어지는 시리아 내전을 신혼부부도 피할 수 없었다. 아딜이 시리아 알레포에서 운영하던 의류공장은 폭격으로 산산조각 났다. 결혼하자마자 생존에 위협을 느낀 아딜은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결혼한 지 한 달 만의 일이었다.

2014년 9월 아딜 혼자 시리아를 떠났다. 유럽으로 가는 길이 위험했으므로 먼저 독일에서 난민 지위를 인정받고 나서 가족결합제도를 통해 아내 사파를 안전하게 데려올 계획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난민들은 요즘과는 다른 경로를 통해 유럽으로 갔다. 아딜은 시리아에서 레바논, 요르단을 거쳐 리비아에서 바다를 건너 이탈리아로 갔다. 독일까지 오는 데 두 달이 걸렸다.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난민들이 독일에 무더기로 몰려들지 않았다. 도착 한 달 만에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다. 3년 동안 체류할 수 있고 이후 영주권 획득 기회가 주어지는 신분이다. 하지만 아내를 데려오기 위해 신청한 가족결합은 절차가 더뎠다. 독일 관공서에선 1년6개월은 걸릴 거라고 했다. 사파는 남편이 떠난 지 7개월 만인 지난해 4월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시리아를 떠났다. 외삼촌 내외와 친구 부부가 동행했다. 터키에서 바다를 건너 그리스로 넘어가 육로를 통해 독일로 이동하는 경로였다. 한 달이 걸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같이 출발하는 게 나을 뻔했어요.”
“원래 아내는 가족결합제도로 비자를 받아 데려올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가족결합까지) 1년6개월을 더 떨어져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너무 길게 느껴졌어요.”(아딜)
“전쟁으로 고향이 파괴돼서 너무 두려웠어요. 저는 난민 신청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단지 남편과 함께 있고 싶어서 독일에 왔어요. 그런데 독일에 와서도 6개월 동안 남편과 지낼 수 없었어요.”(사파)
8개월 만에 재회, 6개월 또 이별

독일에서 8개월 만에 재회한 신혼부부는 다시 6개월간 떨어져 지내야 했다. 사파가 독일에 도착한 지난해 5월 아딜은 이미 난민 지위를 인정받은 상태였다. 그는 난민캠프에서 나와 일반 주택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같은 캠프에서 지냈던 시리아 난민 7명이 함께 사는 집이었다.

하지만 사파는 난민신청자 신분이어서 난민캠프에서 살아야 했다. 독일 망명법상 난민신청자는 심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주거지를 선택할 수 없다. 부부는 결국 같이 살기 위해 노숙하기로 했다. 지난해 6~7월 그들은 지하철역에서 생활했다. 마침 무슬림들이 한 달 동안 금식하는 라마단 기간(6월18일~7월17일)이 겹쳤다. 아딜은 “아내와 같이 있어서 좋았지만 너무 힘든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노숙하면서 집과 일자리를 구하러 다녔지만 매번 헛수고였다. 시리아 난민에게 일자리와 집을 내주려는 이들을 찾을 수 없었다.

노숙 생활에 지친 아내를 보다 못한 아딜이 전에 살던 일반 주택으로 아내를 데려갔다. 그곳에서 동거인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지내볼 생각이었다. 동거인 중 하나가 경찰에 신고했다. 아딜은 그 동거인이 어렵게 얻은 난민 지위를 잃는 빌미가 되지 않을까 겁먹고 신고한 것이겠거니 짐작할 따름이다.

결국 아딜은 그 집에서 쫓겨나 다시 난민캠프에서 지내야 했다. 사파는 또 다른 난민캠프에서 남편과 떨어져 지내야 했다. 아딜이 사파가 생활하는 캠프에 찾아가도 캠프 관리자들은 출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사파는 난민캠프에서 외출 보고를 하고 길에서 남편을 만나야 했다.

사파는 난민캠프 생활을 시작한 뒤 3개월 내내 캠프 관리자에게 남편과 같이 살게 해달라고 애걸복걸했다. 차라리 다시 길바닥에서 지내겠다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해보기도 했다. “관리자는 난민신청자는 주거지를 선택할 수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고 사파는 말했다.

결국 사설 경비원들이 사파 부부를 도왔다. 관리자 몰래 남편이 사파의 방에서 지낼 수 있도록 해줬다. 관리자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부부는 또다시 이별해야 한다. 지난해 난민들이 독일로 몰려들어 사파는 얼마나 더 걸려야 난민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을지 불분명하다. 독일 정부가 월세를 지원하지만 살 집을 찾는 건 세입자의 몫이다. 아딜은 매일 수소문하고 있지만 집을 찾기가 어렵다고 했다.

“앞으로 계획은 뭔가요?”
“아내와 살 집을 찾아서 아이를 낳고 일자리를 찾아야죠. 시리아에 있는 부모님과 형제들도 데려오고 싶어요. 그런데 계속 이렇게 세들 집을 찾지 못하고 지낼까봐 걱정돼요.”(아딜)
“요즘엔 고향에 그대로 있었으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거기엔 집이 있어요. 전쟁 중인 고향이 차라리 더 안전했다는 생각까지 들어요. 남편이 여기 오지 않았으면 저는 독일에 오지 않았을 거예요.”(사파)

뮌헨에서 차로 40분 거리에 있는 뉘른베르크에 사는 시리아 난민 리나(36·가명)도 집을 겨우 구했다. 2014년 10월 독일에 도착한 그는 먼저 도착한 여동생 잔나(32·가명)와 사촌동생 무스타파(24·가명), 그리고 난민 지원 활동을 하는 독일인 여성 2명에게서 집을 찾을 때 도움을 받았다.

독일 남성이 어깨를 세게 친 이유
독일 뉘른베르크에 사는 시리아 난민 리나(가명·뒷줄 가운데)의 가족들.

독일 뉘른베르크에 사는 시리아 난민 리나(가명·뒷줄 가운데)의 가족들.

지난해 12월17일 리나가 사는 뉘른베르크에 있는 연립주택을 찾았다. 4층에 있는 30평가량 되는 집이었다. 거실에선 리나의 아이 셋(6살, 10살, 13살)이 내복을 입은 채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코가 오뚝한 리나는 말수가 적고 침착했다. 난민 지위를 인정받은 리나는 독일 정부로부터 월세를 지원받고 있다. 5명이 사는 집의 경우 월세보조금이 최대 975유로라고 그가 설명했다. 생활비는 성인 400유로, 아이 267유로 정도씩 지원받는다. 리나는 “세 아이의 옷을 사줄 수 있는 형편이 안 된다. 겨우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낯선 땅에 정착한 이방인들에게 차별은 느닷없이 찾아왔다. 여동생 잔나는 아랫집에 사는 이웃 사람이 계단을 올라오자 ‘헬로’(Hello)라고 인사했다. 하지만 이웃은 인사하는 대신 문을 쾅 닫고 들어가버렸다. 지난해 11월13일 IS 대원들이 자행한 ‘파리 테러’ 2주 뒤, 리나는 동생과 시장에 가는 길에 갑자기 어깨가 밀려 휘청거렸다. 50대로 보이는 한 독일 남성이 어깨로 리나의 어깨를 세게 치고 지나간 것이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리나와 동생은 놀랐다가 웃고 말았다.

“일부러 치고 간 건가요?”
“네. 당해보면 일부러 그런 건 줄 알죠.”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제가 뭘 할 수 있겠어요. 가만히 있었죠. 제가 아직 독일어로 욕을 못해요.”(웃음)

리나는 2014년 5월 전쟁을 피해 홀로 시리아 야르무크를 떠났다. 이집트에서 두 달간 머문 뒤 리비아로 밀입국했다. 수출용 화물트럭 짐 사이에 몸을 숨겨 밀입국하는 방법이 당시 널리 알려져 있었다. 트럭이 한쪽으로 쏠리면 엄청난 무게의 짐들 사이에서 압사할 위험이 있었다. 리나는 “시리아에 있어도 죽고 밀입국해도 죽는데 어차피 마찬가지라는 생각이었다”고 회상했다.

여동생 잔나가 리나의 아이들을 리비아에 데려다줬다. 리비아 사브라타에서 100명 이하 정원의 나무보트에 400명이 탔다. 리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이탈리아로 가는 지중해 위에서 19시간을 떠 있었다. 어디를 봐도 바다뿐이었고 아이들과 함께 있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이탈리아에서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를 거쳐 독일로 갔다. 20일이 걸렸다.

남편 무함마드(39·가명)는 시리아에 남았다. 돈이 부족했다. 남편은 실내 인테리어 일을 하면서 돈을 모아 따라오기로 했다. 드디어 지난해 12월 초 남편도 고향을 떠나 독일로 향했다. 남편을 기다리는 일주일 동안 리나의 속은 새까매졌다. 남편이 12월16일 리나가 있는 뉘른베르크 집에 도착했다. 하지만 이튿날 독일 정부는 남편을 데리고 갔다. 난민신청자는 심사가 끝날 때까지 난민캠프에 머물러야 한다고 했다. 남편은 집에서 400여km 떨어진 도르트문트 난민캠프로 갔다. 집에 하루 들를 수 있게 한 것도 담당자의 배려 덕분이었다.


“남편과 1년6개월이나 떨어져 지냈는데 하루 만에 또 헤어졌군요.”
“1년6개월이 아니라 1년7개월이에요.”
“언제 집에서 같이 살 수 있죠?”
“그건 저도 모르고 남편도 몰라요.”

다음날 도르트문트 난민캠프에 있는 리나의 남편 무함마드에게 인터넷 채팅앱 ‘와츠앱’으로 말을 걸었다. 찾아가겠다고 하자 그는 “나는 캠프 문까지만 나갈 수 있고 그 이상은 나갈 수 없다. 경비원들이 밖에 나가는 것을 허용해줄지도 모르지만 난 여기 상황을 잘 모른다”고 말했다.

리나가 1년7개월 만에 만난 남편은 400여km 거리의 난민캠프에 수용돼 당장 밖에 나갈 수 있는지도 불분명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리나는 취재진을 배웅하려고 탄 지하철 안에서 남편 얘기가 나오자 “도대체 왜 따로 살게 하는지 모르겠다”며 눈물을 흘렸다. 리나는 시리아 전쟁으로 부모·형제와 이별했고 새로 정착한 독일에서도 남편과 격리된 채 지낸다.

그의 스마트폰 배경화면에는 리비아에서 찍은 부모님 사진이 있다. 리나의 부모는 시리아 전쟁을 피해 리비아에 머물고 있다. 리비아는 2011년 카다피 정권이 붕괴한 이후 6년째 전쟁 중이다. 두 개의 정부가 있고 IS가 세력을 넓히고 있다. 부모님 근황을 묻자 리나는 “전쟁 때문에 가족이 모두 흩어지게 됐다”고 말하며 다시 한번 눈물을 흘렸다.


“독일에서 정착하는 데 가장 힘든 점은 뭐죠?”
“당연히 언어죠.”(사촌동생 무스타파)
“이 장난꾸러기 아이들을 키우는 일이겠죠.”(여동생 잔나)
“모든 게 어려워요. 언어도 어렵고, 일을 어떻게 구할지도 모르겠고,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독일은 우리 사회가 아니고, 부모님이 멀리 리비아에 있는 사실 등 모든 게 힘듭니다.”(리나)
“낯선 곳에 있는 것 자체가 힘들죠. 특히 가족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힘들어요. 어디에 사는 건 중요하지 않아요. 가족 모두 함께 사는 것이 중요하죠.”(무스타파)
시리아 난민 사파(가명)가 머물고 있는 뮌헨의 난민캠프 전경.

시리아 난민 사파(가명)가 머물고 있는 뮌헨의 난민캠프 전경.

전쟁으로 가족 모두 흩어졌다

독일에 도착한 난민들은 ‘1등 난민’이다. 출발지 터키에 발이 묶였거나 중간 지점 그리스에서 국경 통과를 제지당한 난민들이 그토록 가길 원하는 독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으로 가족과 한 번 이별한 시리아 난민 사파와 리나는 독일에서 또다시 이별해야 했다. 시리아에서의 탈출도 독일에서의 격리도 모두 강제 이별이었다.


난민신청자로  사는  법


집도,  일자리도  없다



공식적인 난민 지위를 인정받기 전 단계인 난민신청자(Asylum Seeker)는 독일에서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다.
비영리기구 ‘유럽 난민·망명자 위원회’(ECRE)가 지난해 11월 발행한 독일 보고서를 보면 독일에서 난민신청자들은 첫 접수센터(또는 난민캠프)에서 6개월간 머물러야 한다. 이 보고서는 전달에 시행된 독일 망명법 개정안 내용을 반영하고 있다. 독일은 새 법에서 난민들이 첫 접수센터에서 머물러야 하는 기간을 3개월에서 6개월로 늘렸다.
독일에서 난민 지위를 신청한 자들은 거주지를 선택할 권리가 없다. 첫 접수센터 거주 기간이 지나면 난민 심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해당 주 안에 있는 다른 난민캠프에서 생활해야 한다.
독일 난민캠프의 반인권적 처우도 문제다. ECRE는 대표적 문제점으로 음식 질이 나쁜 점, 캠프 출입 보고를 해야 하는 점, 가족 등의 방문 시간이 제한되고 배우자조차 밤새 머무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점, 아이들 놀이·학습 공간이 마련돼 있지 않은 점 등을 꼽았다.
난민신청자들은 구직도 제한된다. 첫 접수센터에 머무는 동안 구직 활동은 원천적으로 금지된다. 이후 난민캠프로 옮겨간 뒤에도 일자리를 구하려면 연방 이민난민청으로부터 고용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이때 고용주의 확인서와 직업 설명서 제출을 요구받는다. 또 주정부에서 해당 사업장의 노동조건 등을 점검해 구직 자체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독일 정부는 난민신청자에게 구직을 제한하는 대신 생활비를 지원한다. 성인 난민신청자의 경우 가족이 없을 때 난민캠프 안에서 생활하면 143유로어치의 지원을 받는다.
난민 심사 결과가 나오기까지 수개월~수년이 걸린다. 그 결과는 네 종류의 지위로 구분된다. ‘난민 지위’(Refugee Status)는 3년 체류가 가능하며 이후 특별한 사정 변동이 없고 경제능력과 언어능력이 검증되면 영주권을 얻을 기회를 준다. 그 아래 단계로 ‘보완적 보호’(Subsidiary Protection·1년 체류 및 2년 연장 가능)와 ‘인도적 보호’(Humanitarian Protection·1년씩 체류 연장 가능) 지위가 있다. 이 두 단계는 7년 뒤 영주권 획득 기회가 주어진다. 이상의 세 단계는 체류가 허용된다. 이 지위를 얻으면 노동비자 없이 구직 활동이 가능하고 월세 보조금과 건강보험 등 기본적 사회안전망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난민 심사를 통해 ‘거부’(Rejection) 결과가 나오면 30일 안에 독일을 떠나거나 법원에 이의제기를 해야 한다. 이들 가운데 다른 나라로 가는 데 필요한 필수 서류가 없거나 인도적 차원에서 추방할 수 없는 경우 ‘인내’(Toleration) 단계로 분류한다. 독일 사회가 그들을 인내한다는 의미다. 이들은 구직과 사회보장 혜택에 제약이 따른다.





독일  난민  정책


터키가  막아라



독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난민 정책에서 명분과 실리를 모두 챙길 수 있을까?
독일은 지난해 8월 급진적인 난민 수용 방침을 발표했다. 5년째 전쟁 중이던 시리아 난민에 한해 더블린 조약(난민이 처음 발을 들인 유럽연합(EU) 회원국이 그 난민을 책임지기로 한 조약)을 적용하지 않고 전면 수용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최근 지중해를 건너 그리스와 이탈리아를 발판 삼아 유럽으로 들어오는 중동·아프리카 난민들을 이 두 나라에만 책임지도록 할 수 없다는 취지였다.
이미 서유럽의 부국인 독일은 대다수 난민들이 가고 싶어 하는 나라였다. 난민들은 독일로 더 몰렸다. 9월 초 그리스를 거쳐 독일로 가기 위해 바다를 건너다 숨진 채 터키 보드룸 해변에서 발견된 시리아 난민 3살 알란 쿠르디의 사진이 전세계적인 추모 여론을 불러온 뒤 그 추세는 강해졌다. 독일 내 반무슬림 운동세력과 각 주정부 및 메르켈이 속한 기독민주당에서조차 난민 유입의 차단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점차 강해졌다.
지중해를 건넌 난민 규모가 정점을 찍은 지난해 10월, 독일은 난민 유입을 통제하는 방안을 추진하기 시작한다. 독일 내무부는 시리아 난민 무조건 수용 방침을 철회했다. 하지만 그리스를 거쳐 독일로 밀려오는 난민 수십만 명을 현실적으로 막을 도리는 없었다. 칼날은 시리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대표적 전쟁 지역이 아닌 북아프리카나 발칸반도 출신 난민들에게 향했다. 같은 달 독일 정부는 난민법 개정안을 시행해 이들 난민에 대한 유입과 통제를 강화했다.
난민 지위를 부여하지 않는 ‘안전한 지역 출신 난민’ 목록에 알바니아, 코소보, 몬테네그로를 추가하고 이들의 독일 내 이동과 구직 활동을 제한했다. 이들은 난민 심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첫 접수센터에 거주해야 하며 다른 주로의 이동 및 구직 활동이 제한됐다. 지난해 말 독일 쾰른 새해맞이 행사에서 벌어진 대규모 성추행 및 절도 사건의 용의자 대다수가 알제리·모로코 출신 난민이라고 독일 검찰이 발표한 뒤엔 범죄를 저지른 난민을 빠르게 추방하는 내용의 법 제정도 추진 중이다.
이제 독일 정부는 유럽 전체의 책임을 강조하며 터키의 난민 유입 차단과 유럽 각국의 분산 수용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메르켈 총리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과의 공동 기자회견에서 “터키가 유럽으로 건너오는 난민들을 막아주면 터키의 EU 가입을 돕겠다”고 밝혔다. EU 가입은 터키 정부가 10여 년 동안 추진해온 숙원사업이다. 이후 지난해 11월 EU가 난민지원금 31억9천만유로(약 4조원)를 터키에 주는 대신 터키가 난민들의 유럽 진입을 막기로 합의했다. 메르켈 총리는 지난 2월17일 독일 의회 연설에서 “EU의 국경선을 지키는 것이 급선무이며 이를 위해 EU와 터키가 합의를 실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뮌헨·뉘른베르크·오스나브뤼크·베를린(독일)
김선식 기자 kss@hani.co.kr·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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