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BEBEBE"> ① 국경을 넘어 생의 한계를 넘어</font>
<font color="#BEBEBE"> ② 아이들이 아니었으면</font>
<font size="4">③-(1) 꼴찌 난민, 보트피플을 꿈꾸다</font>
<font color="#BEBEBE">③-(2) 국경 열었지만 일자리 없어</font>
<font color="#BEBEBE">③-(3) 단속 피해 정원 초과한 배 탄 흔적</font>
<font color="#BEBEBE">③-(4) 캄캄한 밤바다에 온 가족이 떠있다</font>
<font size="2"><font color="#991900">*각 항목을 누르면 해당 기사를 보실 수 있습니다. </font></font>
터키 보드룸에서 독일 베를린까지 난민들을 따라 2천km를 다녀왔다. 지난해 11월29일 출국해 12월22일 귀국했다. 취재기자 1명, 사진기자 1명, 아랍어 통역사 1명, 세르비아인 가이드 1명이 동행했다. ‘유럽의 난민 현황과 역사’(1회)와 ‘유럽 현지 난민 부모와 아이들’(2회)을 소개한 데 이어, 이번 3회부터 현지 르포를 싣는다.
국내외 언론은 그동안 그리스로 출항한 난민, 독일에 도착한 난민, 그리고 유럽 국경에서 입국을 거부당한 난민들에 주목했다. 거의 모든 난민들의 출발지인 터키는 거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한국 언론 가운데는 처음으로 터키 현지 난민들을 장기간 밀착 취재했다. 독일로 향하려 했지만 끝내 터키에서 머물게 될지도 모를 난민들을 만났다. _편집자</font>
한반도 크기의 3.5배 면적인 터키는 기다란 배 모양을 하고 있다. 그 남단에 자리한 보드룸은 휴양도시다.
지난해 9월, 3살 꼬마 난민 알란 쿠르디가 이 휴양도시의 해변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아이는 시리아 난민이 겪는 고난의 상징이 됐다.
지난해 11월30일, 우리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알란의 주검이 발견된 그곳, 보드룸의 케메르 해변이었다. 현지 주민들에게 묻고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알란의 해변 사진을 비교·대조한 끝에 반나절 만에 바로 그 지점을 찾아냈다. 3~4m 폭의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었지만, 휴양객들이 찾을 만한 곳은 아니었다. 백사장의 폭이 좁고 평평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젠 다 됐다”며 마음을 놓았다. 알란이 누웠던 해변에 도착했으니, 난민을 금방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하루 종일 그곳에 머물렀어도 단 한 명의 난민도 해변에 나타나지 않았다. 난민은 어디에 있을까.
<font size="4"><font color="#008ABD">알란의 해변에 난민이 없었다</font></font>터키에 도착한 대다수 난민들은 그리스 레스보스섬의 해변을 1차 목적지로 삼는다. 그곳과 가장 가까운 터키 서부 해변의 곳곳에서 그들은 보트를 타고 그리스로 옮겨간다. 그곳 어딘가에 단서가 있을 것이다.
난민의 자취를 찾아 12월1일 터키 서부 해안에 위치한 대도시 이즈미르를 찾아갔다. 모름지기 모든 정보는 시장에 모이는 법이다. 이즈미르 도심의 어느 전통 시장에서 케밥을 먹다가 4대째 카펫 장사를 하고 있다는 상인을 만났다. 진한 터키식 커피 한잔을 얻어마시며 시리아 난민들이 모여 있는 곳을 물었다. 그는 “싸구려 호텔들이 모여 있는 저쪽 블록”이라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시장 건너편 2~3m 폭의 허름한 골목에는 식료품점, 술집, 식당, 만물상 등이 늘어서 있었다. 주황색 구명조끼를 파는 좌판도 보였다. 5분쯤 걸어 올라가자 이슬람사원 앞 작은 공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공원이라 부르기에는 너무 작은, 기껏해야 한국 아파트 단지의 놀이터 넓이에 불과한 그곳에 난민들이 살고 있었다. 대도시 이즈미르에서 시리아 난민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라고 난민들은 말했다. 이라크, 아프가니스탄과 아프리카 지역 출신 난민들도 모여드는 곳이었다. 넉넉잡아 100여 평 정도의 공간에 어른 30여 명과 아이 20여 명이 지내고 있었다.
그나마 줄어든 수였다. 지난해 여름까지만 해도 발 디딜 틈조차 없었지만, 날씨가 추워지자 난민들이 여기저기로 흩어졌기 때문이다. 작은 공원엔 야자수 일곱 그루가 서있다. 나무 그늘 아래 돗자리를 펴고 옷을 파는 좌판 두 개도 차려져 있다. 난민에게 옷을 파는 이도 난민이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새벽마다 아이들은 추위에 깬다 </font></font>공원 한가운데 전봇대엔 아랍어로 쓰인 전단지 한 장이 붙어 있다. ‘가구가 있는 집을 빌려줍니다. 하루씩 빌릴 수 있습니다. 가족을 위한 집입니다.’ 목돈 없는 난민들을 겨냥해 일세를 놓는다는 광고다. 집주인들이 난민의 처지를 정부보다 잘 안다.
한낮의 공원은 조용하다. 난민들은 주로 가족끼리 모여 벤치나 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 그들은 주위에서 들리는 말에 귀 기울인다. 바다 건너 유럽으로 가는 위험한 여정을 대비해 그들이 정보를 얻는 방식이다. 한 남성이 공원의 정적을 깼다.
“알라는 없다! 나무도, 사람도, 돌멩이도 손에 잡히지만 알라는 잡히지 않는다!” 그는 이파리가 몇 개 남지 않은 나무를 손바닥으로 때리며 외쳤다. 나무에 빨랫줄을 이어 널어놓은 담요 두 장이 미세하게 떨렸다.
잠깐의 소동을 바라보던 자밀(30·가명)은 이내 제 가족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의 보금자리는 공원 끄트머리에 있다. 돌바닥에 담요 한 장을 깔고 자신을 포함한 4명의 가족이 20일째 지내고 있다.
아랍인치고 자밀은 작고 마른 편이었다. 키가 170cm쯤 된다. 눈썹이 길고 콧날이 날카로워 고집스럽게 보였다. 항상 검은색 비니를 쓰고 갈색 재킷을 입는다. 그의 아내 디마(23·가명) 옆엔 딸 이만(3)과 아들 타릭(1)이 붙어다닌다. 청록색 히잡을 두른 디마는 남편보다 덩치가 크고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부부는 밤이 되면 두 아이를 담요에 돌돌 말아 대리석 위에 재운다. 새벽마다 아이들은 네댓 번씩 깬다. 타릭의 콧물이 잘 멈추지 않는다. 딸은 엄마를, 아들은 아빠를 닮았다고 하자 부부는 웃었다. 웃을 때마다 자밀의 양 볼에 세 겹의 주름이 졌다.
처음엔 자밀이 인터뷰 요청을 극구 거절했다. 한국에서 인터뷰 요청을 거절하는 시민들에게 자주 들었던 말을 터키에서도 들었다.
<i>“당신 가족의 사진을 찍어도 될까요?”“정부와 언론은 우리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언론을 별로 안 좋아합니다.”
“한국에서도 자주 듣던 말입니다.”
“그런데 왜 계속 난민들을 만나려고 하죠?”
“그게 저희의 일입니다.”
“오늘 터키 언론과 이즈미르 시청도 사진만 찍고 돈은 안 주고 갔습니다.”
“언론과 구호단체는 하는 일이 다르다는 걸 잘 아시잖아요.”
</i>
옆에서 말없이 듣고 있던 아내 디마가 왜 사진을 못 찍게 하냐며 자밀을 타박했다. 고집 센 자밀도 아내에겐 금방 졌다. 나중에 우리는 왜 남편을 설득했냐고 디마에게 물었다. 디마가 차분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했다. “시리아인들이 무엇을 먹으며 얼마나 괴롭게 사는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어요.” 그렇게 하여 자밀 가족이 겪어온 1547km 여정의 일부에 대해 들을 수 있게 됐다.
자밀 가족의 고향은 시리아 동부 데이르에즈조르다. 이 도시는 이슬람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단체인 이슬람국가(IS)의 점령지다. 지난해 11월13일 프랑스 파리에서 테러를 자행한 바로 그 IS다. 파리 테러의 총책으로 지목된 아흐마드라는 조직원이 이 도시의 군사령관을 맡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고향은 IS 점령지… 미사일에 이웃집 산산조각</font></font>파리 테러 며칠 전 새벽, 자밀의 집 근처에서 폭격이 있었다. 200m 떨어진 이웃집이 산산조각 났다. 정부군이 IS 점령지에 미사일을 쏜 것이다. 이웃 8명이 숨졌다. 집 안에서 손전등을 켰기 때문에 폭격당했을 거라고 동네 주민들은 소곤거렸다. 불빛은 미사일의 표적이 된다.
캄캄한 밤의 폭격이 아니라도 사람들은 곧잘 죽었다. 그의 고향에선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정부군이 IS와 자주 교전을 벌인다. 시리아는 2011년 바샤르 정권의 독재에 저항하는 유혈시위가 벌어진 뒤 내전이 번졌다. 소수종파인 시아파 집권 세력과 다수종파인 수니파 간의 오랜 갈등은 내전에 기름을 부었다. 5년째 이어진 전쟁에 참전하는 세력도 불어났다. 정부군, 반군, IS, 러시아군과 미국 중심의 연합군 등이 나섰다. 그 와중에 민간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갔다. 지금까지 시리아에서만 7만6천 명의 민간인이 내전으로 사망했다.
자밀은 스마트폰을 꺼내 동영상 하나를 불러냈다. 시리아에서 러시아군이 농경지를 폭격하는 장면이라고 했다. 재생 중인 스마트폰 화면을 카메라로 찍었다. 카메라의 LCD 화면에 비친 폭격 장면을 딸 이만이 신기한 듯 쳐다봤다.
<i>“고향에서 폭격이 발생하면 어떻게 대처하나요?”“폭격 소리가 들리면 바로 땅에 엎드립니다.”
“왜 땅에 엎드리나요?”
“미사일이 땅에 떨어지면 위로 튀는 파편을 맞지 않기 위해 바닥에 붙는 거죠.”
“아이들도 같이 엎드리나요?”
“모두 엎드려요. 우리 딸도 이미 그 습관 때문에 이즈미르에 비행기가 지나가도 엎드리거나 숨으려고 해요.”</i>
시리아를 떠나기로 결심한 것은 한달 전이었다. 자밀이 먼저 아내에게 말을 꺼냈다. 이제 그만 고향을 떠나자고 했다. 내일이면 나아질 거라는 기대가 헛된 생각이었다는 확신이 들 무렵이었다. 아내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에겐 아이 말고도 가족이 있다. 부모, 형제들이다. 그들을 모두 고향에 남겨두고 떠나는 게 못내 죄스러웠지만, 아이들을 전쟁에서 구출하는 게 우선이라고 부부는 서로 토닥였다.
<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50%" align="right"><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ffffff"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ffffff"><tr><td class="news_text02" style="padding:10px"><font size="4"><i><font color="#991900">부모, 형제들을 모두 고향에 남겨두고 떠나는 게 못내 죄스러웠지만, 아이들을 전쟁에서 구출하는 게 우선이라고 부부는 서로 토닥였다.</font></i></font>
</td></tr></table></td></tr><tr><td height="23px"></td></tr></table>
아이들을 구출하려고 가족 전체가 탈출하던 첫날 첫 관문은 IS 검문소였다. 새벽 2시께 IS 검문소를 몰래 돌아나왔다. IS는 자신들의 점령지에서 주민들이 빠져나가는 걸 용납하지 않는다. 운 좋게도 자밀 가족은 IS 대원의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반군 점령지로 들어서자 총소리가 울려퍼졌다. IS 점령지에서 자밀 가족이 다가오자, 반군이 적으로 간주하고 사격을 개시한 것이다.
자밀 부부는 아이들과 2시간 동안 땅에 바짝 엎드려 있었다. 반군 대원이 손전등을 들고 다가왔다. 아이와 여성이 함께 있는 걸 보곤 그냥 지나가라고 했다. 그곳에서 터키 국경을 넘기까지 꼬박 3일이 걸렸다. 밤에는 들판을 건너고, 낮엔 산을 넘었다. 자밀은 “정말, 정말, 정말 힘들었다. 우리 가족 모두 그때 죽음을 보았다”고 말했다.
터키 남부에 면한 국경을 넘어온 자밀 가족을 대도시 이즈미르로 데려온 건 브로커였다. 터키에 밀입국하자마자 만난 브로커는 자밀 가족을 독일로 보내주겠다고 큰소리쳤다. 비용은 총 2천달러(약 240만원)를 불렀다. 자밀은 망설이지 않고 돈을 냈다. 어차피 그 정도 비용은 들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엎드리고 숨는 데 익숙한 3살 딸아이</font></font>그 브로커는 아랍어와 터키어에 모두 능숙했다. 자밀 가족이 머물고 있는 공원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에 호텔을 잡아줬다. 호텔방에서 브로커와 2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며 친해졌다. 믿음이 갔다.
그러나 점심거리를 사겠다며 호텔방을 나간 브로커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2천달러도 끝내 돌려받지 못했다. 10년 동안 자동차 정비소와 폐차장에서 기름때 묻히며 번 돈이었다. 자밀이 아는 건 브로커의 휴대전화 번호뿐이었다. 참담한 심정을 추스르고 호텔을 나왔다. 이 공원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부터 공원 노숙이 시작됐다.
<i>“앞으로 계획은 뭔가요?”“여기에 있어야 합니다.”
“네?”
“(1명당) 최소한 900달러는 내야 합니다. 브로커들이 아이 2명의 비용은 받지 않는다지만 그래도 돈이 없어요.”
“일찍 독일로 떠난 난민들은 어떤 사람들인가요?”
“돈이 많아서 간 사람들입니다. 공부도 정보도 수학도 아니고 돈입니다, 돈.”</i>
돈이 떨어졌으므로 자밀 가족은 돈을 벌어야 한다. 취재진과 처음 만난 직후인 12월3일, 아내 디마는 일자리를 구했다. 공원에 앉아 옷을 파는 일이다. 한 터키인이 옷을 가져다주면 디마가 팔고 수입의 절반을 나눠갖는다. 곧 최저기온이 영하로 떨어질 것이므로 옷부터 사야 한다. 아이들 먹을거리도 사야 한다.
딸 이만은 양고기를 좋아한다. 오후 3시 공원 앞 이슬람사원에서 양고기 수프를 무료로 배급했다. 엄마 디마는 바게트 빵을 찢어 수프에 찍어 먹었다. 어린 딸은 수프에 빠진 양고기를 쉴 새 없이 집어 먹었다.
옷장사를 마치고 디마는 딸에게 줄 선물을 샀다. 바로 옆 공원 좌판에서 5터키리라(약 2천원)를 주고 인형을 샀다. “딸이 그동안 인형을 갖고 싶어 했다”고 디마는 말했다. 춥고 배고플 때 밥 대신 술과 담배를 사는 어른이나 인형을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나 똑같다. 밥과 옷만으론 살 수 없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8개월째 연락 끊긴 독일 간 남편과 아들 </font></font>디마에게 인형을 판 좌판 상인도 시리아 난민이다. 12살 소녀다. 마시마(12·가명)는 인형을 팔아 5터키리라를 받고 표정이 굳어졌다. 소녀가 아끼던 인형이었다. 소녀 역시 살기 위해 아끼던 것을 돈과 바꿀 수밖에 없었다.
마시마는 시리아 제2도시 알레포에서 전쟁을 피해 가족·친척 11명과 2년 전 터키로 왔다. 마시마 가족의 생활은 자밀 가족의 미래인 것처럼 보인다. 처음 마시마를 만났을 때 소녀는 우리에게 “나는 터키 사람”이라고 우겼다. 시리아 난민 행색을 벗고 터키에 정착하려는 어린 소녀 나름의 방책이었다.
<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50%" align="right"><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ffffff"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ffffff"><tr><td class="news_text02" style="padding:10px"><font size="4"><i><font color="#991900">목숨을 거는 난민과 목숨을 부지하는 난민 사이에도 바다만큼의 간극이 있다. 터키에 남은 난민이 난민 행렬 맨 뒤에 주저앉아 있다.</font></i></font>
</td></tr></table></td></tr><tr><td height="23px"></td></tr></table>
마시마는 장사를 하기 위해 터키어를 배웠다. 좌판을 벌이고 주로 옷을 판다. 소녀의 가족이 시리아에서 가져온 옷들과 터키에서 산 옷들이 뒤섞여 있다. 옷 하나를 보통 1~2터키리라(약 400~800원)에 판다. 그렇게 팔면 하루에 20~25터키리라(약 8천~1만원)를 번다. 마시마의 가족 12명이 사는 곳은 방 3개에 화장실 1개가 딸린 월셋집이다. 월세는 400터키리라(약 16만원)다.
공원에서 노숙하는 자밀 가족보다 형편이 나은 셈이지만 마시마의 가족 역시 미래가 없고 희망이 없다. 공원에 나와 앉아 있던 마시마의 엄마 사파(46·가명)는 “온몸이 쑤신다”고 말했다. 힘이 없어 보였다. 그는 장미 무늬 히잡을 두르고 담배를 피웠다. 한 여성이 사파에게 말없이 손을 내밀며 구걸했다. 사파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도 너처럼 돈이 없어.”
원래 마시마 가족은 주변 친척들을 모두 데리고 터키에서 독일로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터키에서 2년째 머물고 있다. 돈이 없기 때문이다. 브로커 비용은커녕 하루 생계를 유지하기도 벅차다. 시리아 난민들에게 터키 물가는 너무 비싸다. 난민들을 위한 일자리는 구하기 어렵다. 무표정한 사파의 말마다 알라가 등장했다.
<i>“남편은 어디에 있나요?”“남편은 아들과 독일에 있어요.”
“연락하고 지내나요?”
“…연락이 안 돼요.”
“언제 연락이 끊겼나요?”
“8개월째예요.”
“당신도 아들과 남편을 따라 독일로 갈 건가요?”
“알라께서 원하신다면. 당신들이 우리 시리아인들을 독일로 데려다주는 건가요?”</i>
난민 가족에게 불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드물게 행운이 찾아온다. 12월3일 밤 9시께 온통 무채색으로 차려입은 노신사가 자밀 가족 앞에 나타났다. 공원 바로 앞 호텔 주인인 터키인 무흘리스(69)였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엿새 만에 다시 길바닥에 </font></font>무흘리스는 공원 앞을 지나다 자밀 부부와 아이들을 봤다. “당신들이 이곳을 떠날 때까지 호텔에서 공짜로 재워주겠다”고 그는 자밀 가족에게 말했다. 회색 양복과 조끼, 은색 넥타이와 은테 안경, 검정 바지와 검정 구두로 치장한 그의 금시계가 유독 빛나 보였다.
키 165cm에 어깨가 굽은 깡마른 노신사를 따라 자밀 가족은 허름한 호텔로 들어섰다. 그들의 방은 1층이었다. 어두운 조명 아래 침대 6개가 놓여 있다. 방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딸 이만은 침대와 침대 사이를 뛰어넘으며 놀았다.
노신사가 1년째 운영 중인 이 호텔은 다국적 난민 집합소다.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이란, 콩고, 카메룬, 수단, 이라크, 예멘, 소말리아, 이라크, 시리아.” 그는 우리에게 1년 동안 만난 난민들의 국적을 읊었다.
<i>“왜 이 가족에게 방을 공짜로 내줬나요?”“그들은 어린아이들과 함께 있었고 나는 호텔을 소유한 사람으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아이들과 같이 온 난민들을 보면 항상 방을 공짜로 내주나요?”
“이곳엔 정말 불쌍한 사람들이 옵니다. 잘 곳이 없고 먹을 것이 없고 추워하는 사람들이죠. 나는 한 명의 사람으로서, 한 명의 무슬림으로서 그들을 돕는 것입니다.”</i>
자밀 가족이 20일 만에 실내에서 잠든 사이 공원의 다른 난민들도 하나둘 자리를 떴다. 공원 벤치에 앉아 있던 남성 대여섯 명이 옷과 이불이 가득 담긴 허리 높이의 비닐 봉지를 어깨에 메고 일어섰다. 낮동안 작은 공원에 나와 장사를 하거나 정보를 주고받다가 잠을 청하려 근처 싸구려 호텔로 향하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시리아 난민들을 찾아오는 드문 행운도 또 다른 불행에 파묻힌다. 호텔 주인의 선행은 오래가지 못했다. 자밀 가족은 엿새 만에 다시 길바닥에 나앉았다. 호텔을 공동으로 운영하는 다른 한 명의 호텔 주인이 애초부터 자밀 가족을 호텔에 들이는 걸 탐탁지 않아했던 것이다. 12월11일과 15일 두 차례에 걸쳐 스마트폰 채팅앱인 ‘와츠앱’을 통해 자밀에게 말을 걸었다.
<i><font size="2">2015년 12월11일</font>“계속 호텔에서 지내고 있나요?”
“이틀 전 호텔에서 쫓겨나 길거리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조금 아픕니다. 열이 납니다.”
<font size="2">2015년 12월15일</font>
“지금도 공원에서 지내나요? 날씨가 많이 춥진 않나요?”
“네, 괜찮습니다. 우리 자신을 따뜻하게 하고 있습니다.”</i>
다른 난민들이 유럽을 향해 바다를 건널 때, 자밀 가족은 다시 뒷걸음질쳤다. 목숨을 거는 난민과 목숨을 부지하는 난민 사이에도 바다만큼의 간극이 있다. 터키에 남은 난민이 난민 행렬 맨 뒤에 주저앉아 있다.
그들의 마케팅 타깃층은 고무보트를 타고 그리스 섬에 갈 예정인 가족, 특히 아이 딸린 가족이다. 구명조끼 가격을 묻자 급히 주인이 뛰어나와 “당신들에겐 팔지 않는다”고 소리쳤다. 가게 주인은 사진기자가 양어깨에 멘 카메라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노발대발한다.
난민들을 상대로 하는 것은 옷가게만이 아니다. 유리창에 아랍어 표지판을 걸어둔 가게들이 있다. ‘시리아 금 판매 및 구매합니다.’ ‘휴대전화 충전기 판매합니다.’ ‘우리는 아랍어를 할 수 있습니다.’ 이즈미르 전통 시장에서 4대째 카펫 장사를 하는 유미트(60)는 “시리아 난민들은 금, 다이아몬드, 달러, 유로를 들고 터키에 와서 생활하다가 유럽으로 간다”고 했다.
터키에 난민이 몰려드는 건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고 유미트는 생각한다. 오래전부터 그리스인, 이탈리아인, 유대인들이 터키에 모여 살았기 때문이다. 카펫 사업을 물려받을 예정인 그의 아들 무라드(34)는 생각이 다르다. 그는 난민들이 터키를 빨리 떠났으면 한다. “터키는 더 이상 부유한 나라가 아니다”라고 그가 말했다. 부자지간에도 난민에 대한 생각은 갈렸다.
밤이 되면 뒷골목에도 구명조끼 좌판이 들어선다. 주황색 구명조끼엔 ‘야마하’(YAMAHA)라고 쓰여 있다. 야마하는 일본 오디오, 오토바이, 스포츠용품 전문 브랜드다. 정말로 야마하가 조끼를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좌판 상인은 적극적이다. “수영할 줄 모르느냐?”며 지나는 이들에게 호객 행위를 한다. 다른 상인에게 가격을 묻자 “원래 45터키리라(약 1만8천원)인데, 40터키리라에 해주겠다”고 먼저 흥정을 한다.
유럽행 고무보트를 탈 예정인 난민들은 해변에서 생활하지 않는다. 앙카라, 이스탄불, 이즈미르와 같은 대도시에서 생활한다. 대도시에 일자리가 있기 때문이다. 정보를 구하기도 쉽고, 브로커들과 접촉할 수도 있다.
시리아인 무함마드(24)도 반년 전 브로커를 만나러 터키 제3의 도시인 이곳 이즈미르를 찾았다. 그는 3년 전 처음 터키에 들어와 2년6개월을 터키 남부 카라만주에서 지냈다. 난민이 브로커를 찾는 게 아니라 수많은 브로커들이 난민에게 ‘알아서’ 접근한다고 그는 설명했다. 많은 난민들은 짐을 한가득 짊어지고 있다. 브로커 눈에 쉽게 띈다.
드물지만 난민이 브로커에게 먼저 연락하는 경우도 있다. 브로커 연락처는 먼저 난민 생활을 시작한 친지로부터 받는다. 기자도 브로커와 접촉해보려고 한 난민에게서 전화번호를 받았다. 이즈미르에서 활동한다는 브로커의 휴대전화 번호였다. 인터넷 채팅앱인 ‘와츠앱’으로 말을 걸었지만 답이 없었다. 그의 와츠앱 프로필은 독일, 프랑스 등 여러 유럽 나라들의 국기와, 선박 모양 이모티콘들로 꾸며놨다.
시리아인 무함마드는 브로커 비용을 마련하려고 시리아에서 가져온 금을 1500달러(약 180만원) 받고 팔았다. 그 돈을 들고 찾아간 브로커는 돈만 빼앗아 달아났다. 그는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이스탄불로 가서 3주째 일자리를 구하는 중이다. 다시 돈을 벌어 유럽행 배를 탈 생각이다.
터키인 브로커들은 난민 1명당 1천~2천달러를 받는다고 바다 건너 그리스에 도착한 난민들이 말했다. 이들 브로커는 버스나 승합차에 난민을 태우고 경찰의 단속을 피할 수 있는 해변을 물색한다. 거기서 그리스 키오스섬이나 레스보스섬 등으로 난민을 태운 배를 띄운다.
40명 정원인 배에 많게는 60명 넘게 태우기도 한다. 브로커는 타지 않는다. 정원을 초과할수록 그만큼 돈이 남는다. 바가지를 씌우는 경우가 아니라면 브로커 비용은 배의 종류에 따라 갈린다. 검정 고무보트, 흰색 플라스틱 보트, 요트 순으로 가격이 높다.
돈 있는 난민들은 더 높은 값을 내고 튼튼한 배를 타려 한다. 겨울 바다에 바람이 거세지자 1명당 900달러(약 107만원)를 받겠다는 브로커들도 나타났다고 한다. 나쁜 날씨를 감안한 할인 가격이다. 나쁜 날씨에 고무보트를 타면 배가 뒤집혀 죽을 수도 있다. 배값은 목숨값이다.
<font color="#008ABD">글</font> 김선식 기자 kss@hani.co.kr·<font color="#008ABD">사진</font>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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