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BEBEBE"> ① 국경을 넘어 생의 한계를 넘어</font>
<font color="#BEBEBE"> ② 아이들이 아니었으면</font>
<font color="#BEBEBE">③-(1) 꼴찌 난민, 보트피플을 꿈꾸다</font>
<font color="#BEBEBE">③-(2) 국경 열었지만 일자리 없어</font>
<font color="#BEBEBE">③-(3) 단속 피해 정원 초과한 배 탄 흔적</font>
<font color="#BEBEBE">③-(4) 캄캄한 밤바다에 온 가족이 떠있다</font>
<font size="4">④ 닫힌 국경에서 통곡하다</font>
<font size="2"><font color="#991900">*각 항목을 누르면 해당 기사를 보실 수 있습니다. </font></font>
그리스 레스보스섬은 기울어진 이등변삼각형 모양이다. 서울 면적의 2.7배다. 그리스의 수천 개 섬 가운데 세 번째로 크다. 그리스 육지로 들어가는 관문인 수도 아테네까지는 남서쪽으로 400km다. 반면 터키 서부 해안까지는 10여km에 불과해 터키 영토로 오해받기도 한다.
실제로 이 섬은 400여 년 동안 옛 오스만제국에 속했다. 1912년 1차 발칸전쟁 이후 그리스 땅이 됐다. 섬의 이름 ‘레스보스’는 여성 동성애자를 뜻하는 ‘레즈비언’의 어원으로 전해진다. 기원전 6세기 고대 그리스 여성 시인 사포(Sappho)가 이 섬에서 여성을 향한 애정을 표현한 서정시를 남겼다고 알려져 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죽음의 여정’ 뚫고 닿은 절망의 땅 </font></font>이제 레스보스섬은 난민의 섬이다. 중동과 아프리카를 떠난 대부분의 난민들은 유럽으로 가기 위해 터키를 거쳐 그리스 섬에 닿는다. 2015년 한 해 동안 그리스에 도착한 난민 85만여 명 가운데 50만여 명이 레스보스섬을 밟았다(유엔난민기구, 2015년 12월31일 기준).
난민들은 터키에서 레스보스섬까지 10여km 바닷길을 ‘죽음의 여정’이라 부른다. 정원을 초과한 고무보트에 목숨을 맡기고 바다를 건너야 한다. 반면 레스보스섬에서 아테네로 향하는 400km 바닷길은 ‘희망의 여정’이다. 그곳은 유럽 육로 이동의 시작점이다. 고무보트가 아니라 대형 여객선 위에서 유럽 정착의 꿈을 꾼다.
그러나 그 꿈이 모두에게 통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난민에게 아테네는 거대한 벽이고 좌절의 땅이다. 대표적인 전쟁 지역 출신이 아니거나 그 지역 출신이라는 서류가 없으면 그리스 북쪽으로 올라갈 길이 더 이상 열리지 않는다.
그 운명을 시험받는 관문은 그리스 북부 국경지대 이도메니다. 레스보스섬에서 출발한 배를 타고 그리스 남단 아테네 항구에 도착한 난민들은 다시 45유로(약 5만9천원)를 내고 버스에 오른다. 7시간 동안 550km를 달려 이도메니에 내린다.
12월9일 찾아간 이도메니에서 경찰은 큰 도로를 막고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기자는 물론 일부 구호단체 활동가들의 출입도 제한했다. 그곳 그리스 경찰에게 물었다.
<font color="#991900"><i>“왜 출입을 통제하는 거죠?”“시리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이외의 난민들을 아테네로 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테네로 보내진 사람들은 어디로 가나요?”
“모릅니다.”
“통제는 언제 풀리나요?”
“모릅니다.”
“누가 알죠?”
“정부요.”</i></font>
이도메니를 지나 그리스 북부 국경지대를 통과하면 마케도니아가 있다. 이어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오스트리아를 지나면 대부분의 난민들이 정착하길 꿈꾸는 독일이 나온다. 이 루트는 지난해 9월 중순 헝가리가 난민 유입을 막으려고 국경을 전면 통제한 뒤 난민 이동의 주요 경로가 됐다.
그런데 11월 중순 슬로베니아도 칼을 빼들었다. 시리아·이라크·아프가니스탄 출신 난민이 아니면 국경 통과를 제한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세 나라는 최근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대표적 국가다. 뒤이어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마케도니아도 같은 방침을 발표했다.
그러니까 독일로 향하는 다른 길은 대부분 막혔고, 오직 이 루트만 남아 있는데, 이 길을 지나려면 ‘현재 가장 격렬하게 전쟁을 벌이고 있는’ 시리아·이라크·아프가니스탄 출신이라는 점을 입증해야 하는 것이다.
그 밖의 나라에서 떠나온 난민들은 이곳 그리스 북부 국경지대에 발이 묶인다. 11월 그곳에선 소요가 벌어졌다. 국경을 통과하지 못한 난민들이 시위를 벌였다. 이란인 6명은 실로 입술을 꿰맸고, 철로 위에서 농성하던 모로코인은 감전사했다. 결국 그리스 정부가 나섰다. 그들을 모두 버스에 태워 북쪽이 아닌 남쪽으로 돌려보냈다. 아테네에 있는 난민캠프로 보내 수용하기로 한 것이다. 그 결과, 12월 그리스 국경을 통과한 난민 규모는 두 달 전보다 절반 아래로 줄었다(그림 참조).
우리가 이도메니를 찾아간 이날도 대형 버스 16대가 줄지어 큰 도로로 나왔다. 남쪽 아테네로 가는 버스였다. 창문 안에서 난민들이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그동안 도움을 준 구호단체 사람들에 대한 인사였다”고 나중에 아테네 난민캠프에서 만난 난민들이 전했다. 그러나 창밖을 향해 손가락을 치켜드는 난민도 있었다. 욕설이었다. 누구를 향한 적대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난민들이 탄 버스는 고속도로를 달린다. 그리스의 고속도로에는 출구를 알리는 표지판이 서있다. ‘ΕΞΟΔΟΣ’. 영어로는 ‘엑소더스’(EXODUS). 출구를 뜻하는 영어 EXIT의 어원이 된 그리스어다. 그 단어에는 탈출이나 대이동이라는 뜻도 있다. 난민의 버스 차창으로 엑소더스 표지판이 여러 차례 지나쳐 멀어져갔다.
2015년 12월7일 공동묘지 입구에 들어서자 하얀 대리석으로 전체를 감싼 직육면체 모양의 무덤들이 정중앙을 따라 이어졌다. 그리스인들의 무덤이었다. 꽃다발, 십자가, 묵주 목걸이, 촛불과 그리스인의 초상화 등이 놓여 있다. 낮고 넓은 계단을 50여m 올라가면 묘지 끝에 공터가 있다. 그곳이 난민들의 무덤이다. 해변에서 숨진 채 발견된 난민의 가족이 누구인지 확인되지 않으면 이곳에 묻히게 된다.
공터 오른편엔 몇 년 전 묻힌 아프가니스탄 국적의 난민들이 있다. 무덤이지만 봉분은 없다. 평평한 흙바닥 1평 안팎의 면적에 직사각형 모양으로 발라놓은 시멘트가 그들의 자리를 표시하고 있다. 두 개의 무덤 위에 분홍색과 노란색 인형이 놓여 있었다. “3살, 5살 아이의 무덤”이라고 이들을 직접 묻은 묘지 관리인 크리스토스가 말했다.
왼편엔 최근 묻힌 시리아 난민들이 있다. 최근 무덤들엔 봉분이 있지만 그 높이는 무릎보다 낮다. 잡초가 듬성듬성 나 있는 무덤의 흙은 창백했다. 거무튀튀한 연보라색에 가깝다. 마지막 난민은 2015년 11월9일 묻혔다. 이제 이곳에도 더 이상 난민을 묻을 자리가 없다.
한 무덤 위에 검정 페인트로 글씨를 쓴 하얀 대리석이 놓여 있었다. ‘사피 시얍(Safi Siyap) 2-10-2015’. 세 살배기 시리아 난민 사피 시얍이 2015년 10월2일 이곳에 묻혔다는 뜻이라고 크리스토스가 말했다. 그 무덤 위 흙탕물에 더렵혀진 흰색 강아지 인형(사진)이 놓여 있었다.
5년째 이곳에서 난민들을 직접 묻은 그리스인 크리스토스에게 물었다.
“이들의 무덤엔 누가 찾아오나요?”
“거의 전세계 기자들입니다.”
“그럼 아이들 무덤에 인형은 누가 가져다놓은 거죠?”
“어느 독일인이었습니다. 아이들의 손이 있는 위치에 인형을 놓았습니다.”
여러 무덤 위 대리석 조각엔 같은 글씨가 쓰여 있었다. ‘ΑΓΝΩΕΤΟΕ’. 우리말로 ‘이름 모를’(unknown)이라는 뜻이다. 끝내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그들은 무덤에 이름이 없다. 2007년부터 이 공동묘지에 난민을 묻은 뒤 난민 무덤은 100기에 이른다. 그 가운데 70기가 이름 모를 난민들의 무덤이라고 크리스토스가 말했다.
멀리서 뱃고동 소리가 울려퍼졌다. 오후 4시 그리스 미틸리니 항구에서 아테네로 출항한 대형 여객선이 내는 소리다. 배에는 유럽 정착을 꿈꾸는 난민들이 가득 타고 있다. 터키 해변에서 고무보트를 타고 그리스 레스보스섬에 무사히 도착한 이들이다. 일단 그리스에 도착하면 안전한 여객선을 탈 수 있다. 묘지에서 그 배가 훤히 보인다. 무덤에 누운 난민들은 살아남은 난민들을 매일 내려다본다.
고향을 탈출해 대이동 행렬에 동참했지만 출구가 막힌 난민들을 따라 아테네로 발길을 돌렸다. 550km 남쪽으로 다시 내려갔다. 아테네 중심부에서 남서쪽으로 6km 떨어진 아테네 태권도 경기장. 2004년 아테네올림픽을 치르려고 지은 건물이다. 타원형 모양의 금속 지붕과 유리벽이 햇빛에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관중 4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이 경기장이 지금은 난민캠프로 쓰인다. 건물 앞엔 축구 운동장만 한 공터가 있다. 그 공터 전체를 둘러가며 2.5m 높이의 철조망으로 울타리를 쳤다.
12월10일 오후 1시. 울타리 입구에 들어서자 한 모로코 출신 난민이 다짜고짜 말을 걸었다. “이곳은 최악이다. 돼지우리 같아서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다.” 그가 카메라를 양어깨에 멘 사진기자 앞에서 불만을 한참 토로하는데 경찰이 다가왔다. 그는 그리스 이민부 직원 한 명을 대동했다. 우리에게 출입허가증을 요구했다. 이틀 전 전자우편으로 출입허가 신청서를 보냈으나 아무 답장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font color="#991900"><i>“신청서를 보냈는데 답장이 오지 않았습니다.”“허가증이 없으면 이곳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보통 답장 보내는 데 얼마나 걸리나요?”
“모릅니다.”
“구호단체는 들어가는데 왜 언론은 못 들어가게 하죠?”
“둘은 다르죠.”
“뭐가 다르죠?”
“우리는 난민들의 사생활을 보호해야 합니다.”
“동시에 그들 상황을 세상에 알릴 필요도 있습니다. 캠프 상황이 열악하니 출입을 통제하는 것 아닌가요?”
“저를 비난하지 마십시오. 모든 결정은 정부가 합니다.”</i></font>
이날 아테네 태권도 경기장은 모든 미디어의 출입이 통제됐다. 하는 수 없이 철조망 밖으로 나왔다. 직사각형 모양의 철조망 울타리를 밖에서 맴돌았다. 햇볕에 말리려고 널어놓은 난민의 옷들이 철조망에 걸려 나부꼈다.
길가에 맞닿은 철조망 안쪽 풀밭에 화장이 진한 한 여성이 가방을 깔고 앉아 있었다. 굵고 길게 그린 눈썹엔 은색 가루를 뿌렸고 빨간 립스틱을 바른 채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마이싸(30·가명)였다. 털모자 달린 검정 코트를 입고 있었지만, 샌들 밖으로 드러난 빨간 매니큐어가 번진 맨발이 추워 보였다.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묻자 시리아 사람이라고 말한 그가 옆에 있는 회색 담요 더미를 툭툭 쳤다. 그 안에서 사람 하나가 머리를 밖으로 내밀었다. 담요로 온몸을 감싸고 풀밭에서 낮잠을 청하던 그의 남편 무함마드(33·가명)였다. 파란색 후드티 모자를 쓴 채 갈색 점퍼를 입고 있던 그는 쌍꺼풀과 눈썹이 짙다. 전날 면도한 듯 흰 턱수염이 짧게 자라 있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그의 말은 느릿느릿했다. 8살 막내아들 와키드는 아빠가 얘기하는 동안 등 뒤에서 목을 끌어안고 있었다. 첫째(13)와 둘째(10) 아들은 어른들 대화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font color="#991900"><i>“왜 밖에 계신가요?”“캠프 안 상황이 좋지 않아서요.”
“어떤데요?”
“사람들이 음식을 먹고 머리맡에 버려서 더러워요.”
“추운 것보단 낫지 않나요?”
“안에서 담배를 피워서 공기도 안 좋고 사람들이 싸워서 아이들 데리고 들어가 있을 수가 없어요.”</i></font>
무함마드 가족은 어젯밤 풀밭에서 잤다. 이틀 전 도착한 캠프 안은 난장판이었다. 음식이 버려진 바닥이나 더러운 텐트에 사람들이 덕지덕지 붙어 누워 있었다. 캠프 안엔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게다가 북부 국경지대에서 강제로 끌려오다시피 한 난민들은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고무보트 ‘훅훅’ 불어 50명이 타다 </font></font>자주 말다툼이 벌어지는 그곳에서 어제는 급기야 몸싸움이 벌어졌다. 두 모로코인의 싸움이 벌어지자 다른 난민들이 “싸워라”를 외치며 몰려들었다. 그는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와 지내기로 했다.
아내 마이싸는 감기에 걸렸다. 화장지를 손에 쥐고 틈만 나면 코를 풀었다. 그녀는 지병이 많다. 매일 혈압약과 알레르기약을 먹는다. 시력이 심하게 나빠져 눈 수술도 두 번이나 했다.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는 알레르기 증상은 시리아 전쟁 때 폭격을 보고 놀란 뒤 생겼다고 한다.
그들도 여느 난민들처럼 터키에서 지중해를 건너 이곳까지 왔다. 가족 5명이 터키에서 배를 탈 때 브로커에게 6500달러(약 782만원)를 냈다. 아이들 안전을 위해 많은 돈을 지불했지만, 그들이 탄 배는 ‘훅훅 불어야 하는’ 검정 고무보트였다. 바가지를 쓴 것이다. 40명 정원인 배에는 50명이 탈 예정이었다.
심약한 아내는 바다가 무서워 배에 오르지 못했다. 무함마드는 둘째와 셋째 아들을 배에 먼저 태웠다. 그리고 첫째아들과 함께 아내를 부축해 태우려 했다. 그때 갑자기 경찰이 오고 있다고 브로커가 소리쳤다. 브로커는 막무가내로 고무보트를 밀어냈다. 보트는 해변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다급해진 무함마드는 들고 있던 가방을 해변에 던지고 재빨리 아내를 부축해 배에 올라탔다. 가방에는 시리아 임시신분증 등 국적을 증명할 갖가지 서류가 담겨 있었다. 그때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곳에서 죽을 운명이 아니길 그의 신, 알라께 기도했다. 새벽 캄캄한 바다 위에서 아내는 무서움에 떨며 2시간30분 내내 울었다.
무함마드 가족은 시리아인이다. 그럼에도 그리스 북부 국경을 넘을 수 없었다. 그리스 섬에 도착했을 때, 담당 관리는 무함마드의 국적을 레바논으로 등록했다. 그는 그 사실을 아테네에 와서야 알았다. 서류는 그리스어로 쓰여 있었다.
일이 그 지경이 된 이유를 돌이켜봤다. 그리스 섬에 도착했을 때, 무함마드는 자신의 조상이 팔레스타인 사람이며 국적은 시리아인데, 레바논에서 잠시 살다 이곳으로 왔다고 말했었다. 아울러 국적 증명 서류가 담긴 가방을 터키 해변에 버렸다고 했다. 그 때문에 그리스 관리들이 자신의 국적을 레바논으로 써버린 것 같다고 무함마드는 말했다.
터키 해변에서의 일을 무함마드는 거듭 생각한다. 몇 초만 늦었어도 멀어지는 고무보트를 두고 그의 가족은 생이별했을 것이다. 가방을 버렸으므로 가까스로 아내를 데리고 배에 올라탈 수 있었다. 그때는 가방을 버리고 타길 잘했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제 무함마드는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자책하고 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무함마드가 레바논을 떠난 이유 </font></font>무함마드의 부모도 난민이었다. 부모의 고향은 팔레스타인이었다. 1930년대 전후로 나치와 유럽 기독교의 박해를 피해 유대인들이 그곳에 몰려들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이 있는 그곳을 고국이라 여겼고, 자신들만의 독립국가를 만들려고 했다. 1948년 그들은 이스라엘 건국을 선포하고 아랍인들을 추방했다. 그때 쫓겨난 최소 수십만 명의 난민들 가운데 무함마드의 부모가 끼어 있었다. 부모는 주변국 레바논에 정착했다. 금세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던 고향에선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무함마드는 1982년 레바논에서 태어났다. 그는 17살에 친구 집에 놀러 가서 당시 14살이던 아내를 처음 만났다. “첫눈에 반했다”고 말하며 무함마드는 수줍어했다. 그는 20살에 첫아들을 얻었다. 첫애가 4살이 되던 해 그의 집이 있는 레바논 동부 바알베크에 전쟁이 터졌다. 바알베크는 시아파 무장세력 헤즈볼라의 근거지였다. 헤즈볼라의 테러에 대응한다는 명분으로 이스라엘이 2006년 8월 공습했다.
무함마드도 난민이 됐다. 레바논을 떠나 시리아로 갔다. 팔레스타인 사람이 많이 모여 사는 야르무크 지역에 자리잡았다. 시리아는 팔레스타인 사람을 잘 대해줬다. 그곳에서 시리아 국적을 얻었다. 시리아 아사드 정권은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아랍의 상징으로 이 지역을 홍보하면서 오랜 독재의 정당성을 얻고 싶어 했다.
그러나 다시 전쟁이 터졌다. 첫아이가 9살이 된 2011년이었다. 오랜 독재에 대한 불만이 시리아 내전으로 번졌다.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의 외곽 지역인 야르무크도 폭격을 피할 수 없었다. 무함마드는 부모와 가족을 데리고 다시 전쟁이 잦아든 레바논으로 이주했다. 형제들은 시리아에 남았다.
돌아온 레바논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가혹했다. 무함마드는 레바논에서 간호사로 일하며 한 달에 300달러(약 36만원)를 벌었다. 근무시간에 조금 늦으면 그날 임금을 받지 못했다. 레바논인은 같은 일을 하면 두 배를 벌었다. 반면 병원비는 레바논인보다 더 많이 내야 했다.
레바논 사람들은 팔레스타인 사람을 보면 자주 비난했다. “그들은 우리를 조국도 없는 사람이라며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했다. 우리는 불청객이었다. 우리가 돌아갈 수 없는 나라로 돌아가라며 우리를 비난했다.” 살기 위해서,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모든 부당함을 참았다고 무함마드는 말했다. 레바논 생활에 신물이 날 무렵 독일이 전쟁을 피해 온 시리아인들을 받아주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무함마드는 그동안 모은 돈을 모두 들고 가족을 데리고 이곳에 왔다.
그리스 레스보스섬에는 두 개의 난민캠프가 있다. 터키에서 출항해 섬의 북부와 동부 해변에 닿은 난민들은 유엔난민기구의 대형버스를 탄다. 섬 남동쪽에 있는 캠프까지는 30분 안팎이 걸린다.
캠프엔 10명 정도가 함께 지낼 수 있는 하얀색 난민 천막이 있다. 시리아 난민들을 수용하는 카라테페(Kara Tepe) 캠프엔 천막 158개, 시리아 국적이 아닌 난민들을 위한 모리아(Moria) 캠프엔 천막 58개가 있다. 난민들이 가장 많이 몰린 10월엔 하루 평균 4351명이 이곳을 찾았다. 12월엔 그 절반에 못 미치는 1901명으로 줄었다. 터키의 난민 출항 단속과 추운 날씨 때문이다. 10월 무렵엔 난민 등록 서류를 받는 데 열흘 이상 걸렸다. 이제 그 시간은 하루 이틀로 줄었다.
난민이 줄자 난민 등록 장소를 모리아 캠프로 일원화했다. 난민들은 모리아 캠프에 도착하자마자 순번표를 받고 등록 절차를 기다린다. 순번표는 한국의 은행 대기표처럼 생겼다. 수만 평의 모리아 캠프를 둘러싼 높은 철조망을 따라 난민들은 줄을 선다. 언어에 따라 아랍어 줄과 비아랍어 줄로 나뉜다. 그들이 받아 든 등록서류에는 그들의 국적이 그리스어나 영어로 적혀 있다.
난민캠프는 말 그대로 캠핑촌이다. 어른들은 불을 피우고, 아이들은 놀고, 상인들은 돈을 번다. 2015년 12월6일 낮 12시 모리아 캠프를 찾았다. 캠프로 들어서는 50여m 좁은 오르막길엔 상인들이 진을 치고 있다.
통신사 ‘보더폰’은 이 짧은 길에 1인용 가판대 2곳을 차렸다. 유럽 전체에서 1GB(기가바이트) 용량의 데이터를 쓸 수 있는 유심칩을 10유로(약 1만3천원)에 판다고 했다. 가판대 옆에 영어나 아랍어를 병기하여 시리아·파키스탄·수단 등 여러 나라의 이름을 써놓았다. 봉고차 좌판들도 4대나 와 있다. 한곳에선 담요와 이불, 침낭을 팔았다. 담요는 10유로, 좀더 두꺼운 이불은 15유로다. 다른 봉고차에서는 가방, 티셔츠, 신발 등을 팔고 있었다.
길에서 서너 명이 사람들을 붙잡고 ‘터키 투 유로’ ‘유로 투 터키’를 외친다. 환전상들이다. 터키를 거쳐온 난민들이 마저 쓰지 못한 터키 돈(터키리라)을 싸게 매입하려는 모양이다. 그 옆에서 피에로 복장을 한 자원봉사자는 비눗방울을 불며 아이들과 놀아주고 있다.
오르막길 옆에 텐트 100여 개가 무리지어 있다. 이곳 난민 중 많은 이들이 캠프 옆 공터에 텐트를 치고 생활한다. 캠프에선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만 출입구를 드나들 수 있다. 천막 안은 답답하고 정보가 흐르지 않아 텐트촌에서 생활한다고 난민들은 말했다. 텐트촌에선 청년들이 배구놀이를 하고 있고 구호단체의 천막들에서 난민에게 담요와 바지, 티셔츠, 음식을 나눠주고 있었다. 대낮부터 텐트 앞에선 난민 가족들이 모닥불을 피우고 담소를 나누며 아테네로 떠날 날을 기다렸다.
난민들은 등록을 마치면 각자 버스나 택시를 타고 20분 거리의 미틸리니 항구로 간다. 거기서 최소 45유로(약 5만9천원)를 내고 아테네행 여객선을 탄다. 이곳 레스보스섬에서 아테네까지는 배로 12시간이 걸리지만, 터키에서 레스보스섬까지 고무보트를 탔던 2~4시간보다 짧게 느껴진다. 파도에 흔들리지 않는 대형 여객선 안에서 그들은 유럽 정착의 꿈을 꾼다.
오후 3시 아테네 난민캠프에서 점심을 배급했다. 난민들이 줄을 섰다. 1시간 만에 줄은 500m가량 길어졌다. 난민들이 선 줄 옆으로 녹색 제복을 입은 군인 7명이 질서를 지키라는 듯 방패를 들고 듬성듬성 서 있었다. 이날 점심은 은박도시락 그릇에 담긴 빵 두 조각, 치즈 한 조각과 토마토 소스가 조금 뿌려진 스파게티였다. 무함마드 가족은 줄을 서지 않았다.
<font color="#991900"><i>“점심 안 드세요?”“비스킷으로 때우려고요.”
“캠프에서 음식을 지금 나눠주는데요?”
“저기 음식이 별로 좋지 않아요. 줄을 1시간은 서야 하는데 아이들과 아픈 아내를 데리고 기다릴 만한 음식은 아닌 것 같아요.”</i></font>
무함마드가 깜박 잊고 있었다는 듯 커스터드빵 상자를 꺼냈다. 그가 빵 두 조각을 우리에게 건넸다. 한사코 사양하다 한 조각을 나눠 먹겠다며 받아들었다. 난민들이 베푼 빵 반 조각을 받아든 통역사는 펑펑 눈물을 쏟았다. 무함마드와 부인이 애처로운 눈빛으로 통역사를 달랬다.
시리아 국적을 증명할 방법이 없는 무함마드는 아테네에서 또다시 브로커를 알아보고 있다. 브로커 비용을 6500달러 정도로 예상하고 있다고 그가 말했다. 가족을 마케도니아까지 데려다주는 비용이다. 무함마드는 브로커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 이틀 안에 브로커가 정해주는 대로 마케도니아로 떠날 예정이다.
<font color="#991900"><i>“서류도 없는데 무작정 국경지대에 가는 건 무모하지 않나요?”“국적을 증명하지 못하면 그들이 우리를 돌려보내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해볼 겁니다.”
“서류를 구하고 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이곳이 너무 춥습니다. 아이들이 걱정돼서 밤에 잠이 오지 않습니다.”</i>
나중에 무함마드에게 인터넷 채팅앱인 와츠앱으로 그 뒤 상황을 물었다.
<i>2015년 12월17일
“서류를 구했나요?”
“국적을 증명할 서류를 전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형과 여동생 둘은 얼마 전 전쟁으로 시리아 고향을 떠났다고 연락이 왔습니다.”</i>
<i>2016년 1월11일
“마케도니아로 넘어왔나요?”
“(12월23일) 구호단체의 도움으로 그리스 북부 국경으로 갔어요. 마케도니아에 가는 택시가 없어서 3시간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마케도니아 경찰이 우릴 3일 만에 다시 아테네로 돌려보냈어요. 아내의 외투 주머니에 넣어놓은 서류가 사라졌어요.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우린 아무런 서류도 없습니다. 아테네에서 변호사의 도움을 얻을 생각이지만 아직 아무것도 진전된 게 없습니다.” </i></font>
세대에 걸쳐 가망 없는 난민의 길을 걷고 있는 무함마드 가족과 헤어진 뒤, 철조망 울타리를 지나 경기장 건물 입구 쪽으로 갔다. 한 흑인 부부가 우리를 불렀다. 철조망에 널어놓은 가죽 점퍼가 밖으로 떨어져 있었다. 점퍼를 철조망 안으로 던져줬다.
그들은 소말리아 사람이었다. 부부는 아들 하나와 딸 셋을 데리고 8년째 난민으로 살고 있다. 터키에서 바다 건너 그리스 북부 국경지대까지 갔지만, 시리아·이라크·아프가니스탄 사람이 아닌 소말리아 사람이라는 이유로 5일 전 이곳에 보내졌다.
남편은 고향에서 자동차 부품을 팔았다. 2006년 이슬람 무장세력이 나타나기 전까지 고향 생활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무자헤딘 알샤밥 운동’이라고 불리는 그들은 전국적으로 세를 불리며 정부군과 전쟁을 벌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슬람을 바로 세우는 중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들은 여성들을 죽이거나 강제결혼을 시키고 성폭행했다. 부인 아말(38·가명)의 자매들도 피해를 당했다.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자매들은 성폭행을 당했다. 아버지는 그 뒤로 전신마비 증세가 생겼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너무 좋다”… 30분 만에 바뀐 운명 </font></font>부부는 난민에게 우호적인 시리아로 떠났다. 시리아 정착 5년 만에 내전이 터졌다. 그들은 다시 2013년 터키로 떠난 뒤 그리스까지 흘러왔다. 아말은 국적을 이유로 국경에서 거부당한 일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font color="#991900"><i>“세 나라 출신 난민만 그리스 국경을 통과할 수 있는데 어떻게 느끼나요?”“그게 바로 우리가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억울해서 죽을 것 같아요. 소말리아도 전쟁을 하면서 여자들이 죽었습니다. 시리아와 소말리아가 다른가요?”
“가장 억울한 건 뭔가요?”
“고향을 떠나 찾아간 시리아에서도, 또 미래를 위해 떠나온 그리스에서도 우리는 계속 떠나야 했습니다. 다른 국가에서도 똑같이 조국에서처럼 부당한 일이 이어진다는 사실이 항상 억울했습니다.”</i></font>
다음날 그리스 북부 국경지대를 다시 찾았다. 통제가 풀려 있었다. ‘자격 없는’ 난민들을 모두 아테네로 돌려보냈기 때문이다. 그리스와 마케도니아의 접경 지역엔 철조망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리스 쪽 땅에 지은 10여 개의 천막들은 텅텅 비어 있었다. 난민들은 철조망 앞에서 마케도니아로 넘어갈 순서를 기다렸다. 마케도니아 경찰은 1명씩 줄을 서라고 소리쳤다. 자하라(38·가명)도 6살 아들 손을 꼭 잡고 줄을 고쳐 섰다. 자하라는 아테네에 있는 난민들과 표정이 다르다. 그는 이곳까지 온 게 믿기지 않는다. “너무 좋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도 팔레스타인 시리아인이다. 무함마드 가족처럼 야르무크 지역에서 살았다. 남편과 딸은 고향에 두고 왔다. 16살 딸은 혈관 질환을 앓고 있다. 돈이 부족했다. 공무원인 남편은 돈을 마련하는 대로 딸을 데리고 독일로 향할 것이다. 자하라는 독일에서 그들을 만나려 한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2등 국민, 길에선 2등 난민 </font></font>오후 1시, 자하라가 국경을 지나가려던 찰나, 마케도니아 경찰이 그녀를 가로막았다. 당황한 그가 한참을 아랍어로 떠들었지만 마케도니아 경찰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등록 서류에 국적이 팔레스타인으로 되어 있었다.
자하라는 부산하게 스마트폰을 꺼냈다. 고향에서 찍어온 가족증명서 사진을 보여줬다. 한국 주민등록증보다 두 배 두꺼운 시리아 임시신분증도 꺼내 보였다.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자하라는 울기 시작했다. 엄마가 울자 아들도 따라 울었다. 우는 엄마가 맨손으로 아들의 눈물을 닦아줬다.
불과 30분 만에 운명이 바뀐 그가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 하소연을 시작했다. “누가 나를 국경으로 데려다줄 수 있나. 희망이 불에 다 사라져버렸다.” 한쪽에서 그를 지켜보던 유엔난민기구 직원이 다가왔다. 그는 요르단 출신 아랍인이었다. 자하라의 사정을 한참 듣더니, “나는 네 편이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가 마케도니아 경찰에게 가서 자하라의 상황을 설명했다. 경찰은 그제야 길을 열었다.
무함마드와 자하라는 그의 부모 때부터 난민이었다. 아말은 몇 년째 여러 나라를 떠돈 난민이었다. 그런데도 스스로 난민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길이 막막했다. 그들은 2등 난민이었다. 운 좋게 어느 나라에 도착해도 여전히 2등 국민이었다.
그리스 레스보스섬에서 이라크 야지디족과 유독 자주 마주쳤다. 그들은 이라크 북부 신자르 산지에 모여 사는 소수민족이다.
12월7일 오후 4시, 이라크 야지디족 카말(27·가명)은 아테네로 떠나는 여객선 시간보다 4시간 먼저 레스보스섬 미틸리니 항구로 나와 있었다. 그는 고향을 떠나 터키를 거쳐 그리스까지 왔다. 아내와 아이 5명와 함께 난민의 길을 떠났다.
그는 고향을 떠난 날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2014년 8월3일. 이슬람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단체 IS가 고향 신자르를 점령한 직후였다. IS는 야지디족을 이단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잔혹하게 ‘처벌’하려고 했다.
야지디족은 무슬림과 다른 그들만의 독특한 믿음이 있다. 세계를 창조한 유일신을 믿지만 신이 지명한 일곱 천사도 숭배한다. 무슬림들이 창시자 무함마드가 탄생한 사우디아라비아 메카를 향해 기도할 때, 이들은 보통 태양을 향해 기도를 올린다.
IS는 야지디족을 가만두지 않았다. IS는 2015년 5월 그들의 근거지 이라크 모술 근처에서 야지디족 600명을 집단처형한 것으로 전해졌다. 쿠르드 민병대가 2015년 11월 IS로부터 탈환한 이라크 신자르에선 야지디족을 집단살해해 매장한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 16곳이 발견됐다.
다른 곳에서 온 난민들이 남은 유럽 여정의 추위, 아이들의 건강, 정착을 걱정할 때 카말은 죽음을 걱정하고 있었다. “앞으로의 여정에서 IS가 가장 걱정된다. IS 같은 사람들이 우리를 죽일까봐 두렵다.”
레스보스섬에서 만난 야지디족들은 IS가 집을 빼앗거나 부수고 여성들을 납치했다고 말했다. 신자르에서 보건소 직원이었던 칼라프(68·가명)는 “여기(레스보스섬) 오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었다. 집은 무너졌고 여자들은 납치당했고 돈은 빼앗겼다. 내 가족과 친척 중에도 IS에 끌려간 이들이 있다”고 말했다.
<font color="#008ABD">사진</font>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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