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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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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일본서 납치된 김대중이 암살됐다면



유신체제에 반발 일었겠지만 ‘대안 정치인’ 없어 동력 약했을 것…

김영삼이 야권 통합했다면 또 한 차례 정치폭력이 자행됐을 수도
등록 2010-08-27 15:20 수정 2020-05-03 04:26
1973년 8월13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울 동교동 자택에 돌아와 납치와 관련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왼쪽·연합사진). 청와대에서 감을 깎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 한겨레 자료

1973년 8월13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울 동교동 자택에 돌아와 납치와 관련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왼쪽·연합사진). 청와대에서 감을 깎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 한겨레 자료

1973년 8월8일 오후 1시께.

김대중은 일본 도쿄의 그랜드팔레스 호텔 2212호실을 막 나서고 있었다. 일본에 와 있던 통일당 당수 양일동과 오찬을 겸한 면담을 마치고, 일본 자민당의 기무라 도시오 의원을 만나러 가던 참이었다. 순간 검은 양복 차림의 사나이들이 그를 둘러쌌다. 네 사람은 김대중을 붙잡고 2210호실로 끌고 들어갔고, 두 사람은 그를 배웅하러 나오던 김경인 의원을 밀어붙여 양일동이 있는 2212호실로 다시 들어가게 했다.

목적은 납치였나 살해였나
[1910~2010 가상역사 ‘만약에’]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

[1910~2010 가상역사 ‘만약에’]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

얼마 뒤, 그들은 김대중을 호텔 지하 주차장으로 끌고 가 차에 태웠다. 차는 한동안 달려 오사카에 있는 범인들의 아지트에 닿았다. 거기서 그들은 김대중을 꽁꽁 묶은 뒤 모터보트에 태워 대기 중이던 선박 용금호까지 보냈다.

용금호에서 김대중은 눈이 테이프로 가려져 자세한 상황을 보지 못했으나, 손과 발에 무거운 돌이 달리고 “던질 때 풀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묶어라”고 지시하는 소리를 들었다. 잠시 뒤 비행기 소리가 났으며, 멈춰 있던 배는 다시 속력을 내서 달리기 시작했다. 용금호는 9일에서 10일 사이의 한밤중에 부산항에 닿았다. 거기서 내려진 김대중은 한동안 한 건물에 감금된 뒤 자동차로 서울로 옮겨졌다. 서울 동교동 자택에서 조금 떨어진 교회 앞에 내려진 것은 8월13일 밤 10시께였다. 납치 뒤 약 129시간 만의 생환이었다.

이것이 이제까지 알려진 ‘김대중 납치 사건’의 전모다. 아직 불확실한 부분도 있다. 가령 몸에 돌이 달리고 막 수장되려는 순간 미국의 비행기가 나타나 생명을 건졌다는 것이 김대중 자신의 증언이지만, 미국 쪽은 비행기를 보낸 적이 없다고 부인했으며 용금호 선원 중에는 비행기를 보았다는 사람과 보지 못했다는 사람이 엇갈린다. 비행기가 아니라 헬리콥터였다는 설, 일본 자위대의 순찰함이었다는 설 등이 있다. 또 납치 현장에 있던 양일동과 김경인이 납치가 벌어지고 거의 1시간이 지날 때까지 ‘너무 당황한 나머지’ 경찰에 연락하지 않았음은 물론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고 방에 앉아만 있었다고 하는데, 믿기지 않는 이 이야기에서 ‘양일동 관련설’이 나왔으나 김대중은 끝까지 그 가능성을 부인했다.

목적이 납치였는지 살해였는지도 불확실하고,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이를 지시했는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독자적 행동이었는지도 불분명하다. 애초에 호텔에서 살해하려다 ‘여의치 않아서’ 배에 태워 수장시키려 했지만 그것도 실패한 암살 기도였다는 주장이 있지만, 여섯 사람이 한 사람을 붙잡아 살해하는데 뭐가 그렇게 여의치 않았는지도 의문이다. 호텔이 아니더라도 그를 감금했던 아지트나 심지어 자동차 안에서도 죽이려면 얼마든지 기회가 있었을 텐데, 살해가 목적이었다면 너무 시간을 끌면서 결행을 미루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 하지만 수장 직전까지 갔었다는 김대중 자신의 증언 말고도, 공식적으로는 살해기도설을 완강히 부인한 이후락이 사석에서 “살해가 목적이었다”고 밝혔다는 증언도 있다. 박정희와 이후락 등 당시 정권 관계자들은 박정희는 모르는 일이었고 사건을 듣고 불같이 화를 냈다고 말해왔으나, 2007년 ‘김대중 납치사건 진실규명 보고서’에 따르면 박정희가 이를 암묵적으로 승인했다고 한다.

“기어코 죽이면 정권 끝장날 수도 있다”

아무튼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이 사건을 ‘KT계획’이라는 이름으로 중앙정보부에서 추진했고, 중앙정보부 차장보 이철희와 주일공사 김기완이 직접 실행을 지휘했으며, 심지어 일본 자위대 소속 장교까지 일부 개입해 있었다는 점이다. 한 국가의 정보기관과 외교기관이 야당 정치인을 납치 또는 살해하려는 추악한 범죄에 동원된 것이다.

왜 그래야 했을까? 당시 박정희는 김대중에게 적개심을 가질 이유가 충분했다. 그는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지역감정을 동원하고 선거 부정까지 저지르면서도 겨우 94만 표 차로 김대중에게 신승했다. 그리고 그 선거 유세 때 “맹세코 이번 한 번만 더 하고 물러나겠다”고 눈물까지 흘리며 호소해놓고도 1972년에 ‘유신 쿠데타’를 단행해 영구 집권의 길로 가자, 당시 일본에 체류 중이던 김대중은 즉각 비난 성명을 냈다. 일본과 미국 일간지 인터뷰에서 박정희와 유신을 사정없이 비난하기도 했다. 또 재일동포나 유학생 등을 규합해 ‘반독재투쟁 모임’ 결성을 추진했다. 그 규모는 ‘망명정부’를 연상시킬 정도였다. 그러니 박정희로서는 김대중이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김대중 암살 지시를 내릴 개연성은 충분했다. 그의 눈치를 살핀 중앙정보부가 알아서 움직일 만도 했다. 사실 표적은 김대중만이 아니었다. 이미 1973년 1월10일 김상현·조연하·조윤형 등 국내에 있던 김대중계 정치인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구금·고문하는 ‘김대중 없애기’ 작업의 1단계가 이뤄졌던 것이다. 2단계는 김대중을 직접 겨냥했다.

그래도 결국 살해까지 가지 않았던 것은 미국의 태도가 중요하게 작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미국은 중앙정보부의 활동을 주시하고 있었으며, 납치가 이뤄지고 1시간 만에 미국 정보부 한국지부장이던 도널드 그레그가 이후락에게 전화를 걸어 “절대로 김대중을 죽이지 말라”고 경고했다. 필립 하비브 주한 미국대사 역시 압력을 가했다. 최근 이들의 행동은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과 무관한 개별적 행동이었다는 증언이 나왔으나, 그레그는 “기어코 김대중을 죽이면, 정권이 끝장날 수도 있다”는 초강경 발언을 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설령 대한해협에 미국이 보낸 비행기나 헬리콥터가 나타나지 않았다 해도, 김대중의 목숨에 손댈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김대중을 납치 즉시 죽이지 않은 것도 일단 미국의 태도를 보고 나서 결행하려는 속셈일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납치 사건 이후 박정희 유신체제의 입장이 난처해졌다. 1973년 10월2일 서울대생들이 ‘김대중 사건 해명, 중앙정보부 해체’를 내걸고 시위를 벌였다. 12월3일 김대중 사건 관련 보도 통제에 반발한 기자들이 ‘언론자유 수호 선언문’을 내놓고, 12월24일 재야에서 ‘유신헌법 철폐를 위한 백만인 서명운동’을 벌이는 등 김대중 납치 사건은 폭압적인 유신체제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국민운동의 도화선 구실을 했다. 이후 정권은 비상조치를 남발하며 노골적 탄압 위주로 정국을 운영했다. 이는 장기적으로 정권의 몰락을 재촉하게 된다.

‘지도자’의 추진력 사라졌다면

또한 북한은 이 사건을 이유로 “이후락과 같은 불한당을 그대로 둔 상태에서는” 남북대화에 임할 수 없다고 선언했고, 7·4 남북공동성명 이후 활발해지는 듯하던 남북관계는 다시금 얼어붙고 말았다. 세부적 진실이 어쨌든 미국이 박정희 정권의 움직임을 무조건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입증된 셈이라 한-미 관계도 껄끄러워졌다. 일본에서도 “우리나라에서 그런 일을 버젓이 벌이다니, 주권 침해다”라는 여론이 일었다. 경제협력이 중단된 것은 물론 한-일 정기 각료회의도 취소됐다. 결국 김종필 국무총리가 일본을 방문해 사죄해야 했다. 이 일을 무마하느라 자민당 간부들에게 거액의 정치자금을 제공했다는 추측까지 무성했다.

만약 미국이 미처 개입하기 전 김대중 살해가 이뤄졌다면 역사는 어떻게 전개됐을까? 그레그나 하비브 등이 본국과의 입장 조율 때문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가해 집단이 ‘살해해도 별 탈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면, 그리하여 김대중의 생명이 1973년 8월 일본 땅에서 끝나고 말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당장 정권에 대한 반발이 크게 나타났겠지만, ‘김대중 암살’의 영향은 더 큰 역사적 맥락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처럼 정당이 사회에 충분히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인물 중심으로 정치가 이루어지는 정치 풍토에서 정권에 대한 저항은 어떤 대안적 정치 지도자의 존재를 전제해야 추진력을 얻게 된다. 김구와 여운형이, 그리고 조봉암, 신익희, 조병옥이 죽지 않았다면 과연 이승만 정권이 4·19 이전까지 건재할 수 있었을까? 또한 그들이 살아남은 상황에서 4·19 이후 내각제로의 전환이 있었겠으며, 뒤이은 정치 혼란이 쿠데타를 부를 만큼 심각했을까.

정치인으로서는 아직 신인급인 40대에 신민당의 대선후보가 되어 박정희를 아슬아슬한 상황까지 몰아붙인 김대중은 강력한 대안이었다. 그가 납치 사건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음으로써 대안으로서의 가치는 더욱 높아졌다. 그래서 박정희 정권과 그 뒤를 이은 신군부는 지역감정과 색깔론을 동원해 그의 가치를 줄이는 데 부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한편으로 김영삼의 대안적 가치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일부에서는 6월 항쟁 이후의 한국 정치사를 보며 “차라리 그때 김대중이 사라졌다면, 민주화 세력이 지역주의에 따라 둘로 갈라지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김대중이 비리 문제 등으로 스스로 무너졌다면 몰라도, “민주화 과정에서 순교”한 상황에서 김영삼이 야권을 천하통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동교동계가 상도동계에 순순히 흡수되고 진산계·이철승계 등도 모두 김영삼에게 통합되기보다는 김상현 같은 사람이 “김대중 선생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독자 노선을 걷고 다른 계파도 각자의 길을 추구하지 않았을까. ‘죽은 영웅’을 한목소리로 찬양하면서도 현실 정치상의 연대에는 도통 미적거리는 모습은 지금의 야권이 보여주는 모습에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사실 김영삼이 김대중 못지않게 민주화 투쟁의 상징적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김대중이 사선을 넘으며 국민적 지도자로 먼저 떠올랐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김대중이 신군부의 핍박으로 미국에 건너가 있는 동안 김영삼이 국내에서 투쟁을 이끌며, 국민에게 김대중과 같은 ‘40대 기수’이면서 “김대중과 달리 사상 문제나 반호남 정서 문제가 없는 지도자”로 주목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생환은 유신 사멸의 전조

설령 김영삼이 우여곡절 끝에 야권을 통합하고 강력하고 유일한 대안적 지도자로 떠올랐다고 해도, 수세에 몰린 권위주의 정권은 또 한 차례의 정치 폭력을 준비했을지 모른다. 실제로 김영삼은 1969년 6월 3선 개헌을 반대하다가 ‘질산 테러’를 당한 적이 있다. 김대중 납치가 ‘실패’한 이후 박정희 정권이 점차 노골적인 정치 폭력 대신 색깔론, 지역감정 조성 등 간접적 음해와 이간책, 분열책으로 야권의 성공을 방해하는 방법을 주로 사용하게 된 데에는 대안적 야당 지도자가 하나가 아닌 둘이었던 이유가 컸다. 역설적으로 6월 항쟁 이후에도 야권이 분열되리라 보았으므로 당시 집권세력이 무리수를 두지 않고 직선제 개헌에 합의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손을 들면 정권은 반드시 야당에 넘어간다”는 확신이 있는 상황에서는 이판사판으로 무력 동원에 나서려 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결국 1973년 8월에 김대중이 죽지 않음으로써 유신체제는 스스로의 죽음의 실마리를 얻었고, 김대중은 2000년대까지 이어질 거대한 정치적 영향력의 근거를 얻었다.

함규진 성균관대 국가경영전략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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