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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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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 목사가 방북하지 않았다면



노태우 정권의 공안몰이 낳았다는 비판이 있었지만

문 목사의 방북 성과는 6·15 공동선언 등으로 이어져
등록 2010-09-03 19:22 수정 2020-05-03 04:26
1989년 3월25일 문익환 목사의 북한 방문은 민간 통일운동 역사상 최대 사건이었다. 방북 당시 김일성 주석(오른쪽)과 만난 문 목사. 한겨레 자료

1989년 3월25일 문익환 목사의 북한 방문은 민간 통일운동 역사상 최대 사건이었다. 방북 당시 김일성 주석(오른쪽)과 만난 문 목사. 한겨레 자료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
기어코 가고 말 거야, 이건
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이 아니라고
이건 진담이라고
(중략)
난 걸어서라도 갈 테니까
임진강을 헤엄쳐서라도 갈 테니까
그러다가 총에라도 맞아 죽는 날이면
그야 하는 수 없지
구름처럼 바람처럼 넋으로 가는 거지”

서울 강북구 수유동 한신대 캠퍼스에 들어서면 늦봄 문익환 목사를 기리는 시비가 나타난다. 그가 남긴 대표적인 통일시 ‘잠꼬대 아닌 잠꼬대’를 놋쇠로 새긴 문익환 시비는 불꽃의 형상을 닮았다. 평생을 민주화와 통일에 헌신한 문 목사의 삶도 한 시대의 뜨거운 상징이었다.

가장 소박한 언어로 가장 불온한 상상을 노래했던 문 목사가 ‘잠꼬대 아닌 잠꼬대’를 마무리했을 때 1989년의 첫 아침이 막 밝았다. 시적 감흥에 사로잡힌 그가 지인을 찾아 여기저기 전화를 걸었다. 새해 꼭두새벽부터 수화기 너머로 칠순 소년의 시 낭송을 전해들은 이들은 ‘잠꼬대’에 실린 복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가장 먼저 전화를 받은 시인 고은은 “절실한 바가 느껴진다”고 말했다. 다른 이들에게도 ‘잠꼬대 아닌 잠꼬대’는 통일을 향한 문 목사의 강렬한 시적 열망, 그 이상은 아니었다. 두 달여 뒤 문 목사가 거짓말처럼 평양에 모습을 드러냈다. 1989년 3월25일이었다.

김일성 주석을 뜨겁게 껴안은 충격
1989년 3월25일 문익환 목사 방북

1989년 3월25일 문익환 목사 방북

늦봄 문익환 목사의 방북은 파격의 연속이었다. 남한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고 평양을 방문한 사실이 충격이었고, 김일성 주석과 뜨겁게 껴안은 장면도 논란의 대상이었다. 그가 김 주석에게 먼저 다가가 부둥켜안는 장면은 세계적인 화제였다. 훗날 북의 안내원은 그때의 충격을 이렇게 말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저렇게까지 담대할 수 있을까? 남에서 재야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크다는 말인가? 정말 위대한 재야 인사가 왔구나!”(, 실천문학사, 2004)

문 목사의 방북 사실이 알려지자 남한 사회는 아수라장이 됐다. 정권과 언론 매체 대부분이 그를 공격했다. 문 목사가 허담 당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과 4·2 남북 공동성명을 함께 발표했지만 정부는 인정하지 않았다. 노태우 정권은 그가 북한 방문 일정을 마치기도 전에 이미 ‘문익환을 통해서는 북으로부터 어떤 제안도 받지 않겠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4월3일 귀국길에 나선 그가 경유지인 중국 베이징에 도착한 뒤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가 물었다. “당신의 방북이 남한 사회에 대혼란을 야기한 점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혼란을 두려워하지 말자!” 민주주의란 혼란 속에서 토론을 거쳐 합의에 도달하는 창조적 과정이라는 논리였다.

노태우 정권과 보수 언론, 반공단체는 물론 문 목사가 속한 교단 안팎과 진보 진영 내부에서도 비판적 목소리가 나왔다. 사회가 혼란하고 이념과 노선이 확연히 갈리는 현상을 보이는 시기에 돌출적으로 평양에 가서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느냐는 회의론이었다. 오히려 문 목사의 방북이 정권의 공안몰이를 부추겨 민주화운동을 위축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됐다. 문 목사의 방북은 그만큼 논쟁적 사건이었다.

냉전적 사고를 버리지 않았던 노태우 정권과 언론의 왜곡된 프리즘으로 인해 문 목사는 자신의 진심과 방북 성과를 충분히 설명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하지만 이른바 ‘문익환 목사 방북 사건’이 21년 지난 오늘의 역사적 평가는 당시와 다르다.

“문익환과 북측 사이에 진행된 대화의 내용과 합의한 내용들을 살펴보면 당시의 문익환의 행동이 한반도 정세의 변화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올바른 남북협력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이남주 성공회대 중국학과 교수, ‘늦봄 방북 20년, 통일운동의 성찰과 전망’, 2009)

“문익환의 방북은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듯이 북 당국의 주장에 동조하여 (통일운동의) ‘북 당국 주도’에 기여한 것이 아니라, 그 실제 내용에서는 김일성을 설득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문익환의 여러 주장에 대해 당시 김일성은 많은 부분 설득당했고 또 선후의 차는 있지만 대부분 그 내용을 수용했다.”(이승환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집행위원장, ‘민주는 통일이고 통일은 민주다’, 2009)

“20년 전 문익환 목사의 방북은 김일성 주석과의 면담, 문익환-허담 선언 등을 통해 통일운동 선상에서 ‘민’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고, 이는 6·15 공동선언으로 그 역사적 성과가 계승됐다.”(한충목 진보연대 공동대표, ‘통일운동의 대중화, 구호가 아닌 실천으로’, 2009)

이들의 말처럼 문익환 목사의 방북 성과는 사실 대단한 것이었다. 남한에서 봤을 때 문 목사는 불법적으로 북한을 방문한 재야 운동가에 불과했다. 남쪽의 태도에 비춰보면 북한도 그를 민간인 신분에 맞게 대우하는 것이 상식이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김일성 주석은 일개 민간인에 불과한 문 목사와 두 차례나 회담을 하며 통일 방안을 논의했다. 문 목사에게 남쪽 협상 대표자 자격을 부여한 상식의 파괴, 파격이었다.

그렇게 나온 4·2 남북 공동성명은 문 목사가 아니었다면 만들어내기 어려운 결과였다. 남과 북이 자주와 평화, 민족 대단결의 3대 원칙에 기초해 통일 문제를 해결한다고 명시한 남북 공동성명 1항의 정신은 국민의 정부 시절인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 그리고 더 가깝게는 2007년 10·4 남북 공동선언으로 이어졌다. 남북이 ‘누가 누구를 먹거나 누가 누구에게 먹히지 않고 일방이 타방을 압도하거나 타방에게 압도당하지 않는 공존의 원칙’(4항 일부)도 마찬가지였다.

임수경 방북으로 이어진 분단 넘기

눈에 보이지 않는 성과도 있었다. 문 목사의 방북으로 그 전까지 완전히 봉쇄돼 있던 민간 통일운동의 물꼬가 터졌다는 부분이다. 이를테면 그와 북쪽은 남북 공동성명 8항에서 ‘문익환 목사는 제13차 세계청년학생 평양축전에 참가하려는 남한 청년 학생들을 지지하며 쌍방은 그 실현을 위하여 계속 인내성 있게 노력한다’고 약속했다. 약속은 두 달여 뒤 당시 22살의 한국외국어대 4학년 임수경씨의 방북으로 실현됐다. 문 목사의 방북이 민간 통일운동사에 획을 그은 상징적 사건이었다면, ‘임수경 방북 사건’은 통일 논의를 대중적으로 확산시킨 계기였다.

물론 문 목사의 방북을 ‘소영웅주의에 젖은 감상적 통일주의자’의 돌출 행동으로 평가하는 사람이 있다. 문 목사의 방북이 없었더라도 남북관계의 진전은 시대적 흐름이었다는 논리다. 실제로 문 목사가 평양을 방문하기 전 이미 1988년 7월7일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 이른바 ‘7·7 선언’을 내놓았다. 한반도 긴장 완화와 남북 교류에 초점을 맞춘 선언이었다. 7·7선언은 1991년 12월 남북 기본합의서 체결까지 이어졌다.

진보 진영 내부에는 문 목사와 임수경씨의 방북이 혹독한 공안 정국을 불러왔다는 불만도 존재했다. 정용일 편집국장은 “1989년 울산에서 골리앗 농성 중이던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에 대한 강경 대응 등 학생·노동운동에 대한 정권의 탄압이 심해진 탓에 운동권 일부에서 문 목사 등의 방북에 대한 비판론을 제기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우려는 현실이 됐다. 노태우 정권은 문 목사의 방북 이후 ‘좌경용공 발본색원’을 위해 공안합동수사본부를 설치했다. 재야와 학생운동의 거점을 겨냥한 집중적 탄압이 시작됐다.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과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지도부가 대거 구속됐다. 당시 평민당 김대중 총재와 문익환 목사의 동생 문동환 부총재까지 수사를 받았다.

문익환 목사의 방북 등 민간 통일운동이 활발해지자 노태우 정부도 1991년 남북 기본합의서를 내놓지 않을 수 없었다. 한겨레 자료

문익환 목사의 방북 등 민간 통일운동이 활발해지자 노태우 정부도 1991년 남북 기본합의서를 내놓지 않을 수 없었다. 한겨레 자료

그의 방북 없이 남북 기본합의서가 나왔을까

만약 문익환 목사 방북 사건이 없었다면 노태우 정권의 공안몰이가 없었을까. 문 목사가 일본 도쿄와 중국 베이징을 거쳐 평양에 가지 않았더라도 2000년 6월15일 남북 정상회담, 아니 1991년 12월 남북 기본합의서라도 나올 수 있었을까.

일생을 민주화와 통일에 헌신한 문 목사에게 1989년 평양 방문은 운명이었고, 필연이었다. 하지만 현실적 한계와 물리적 장벽은 있었다. 1988년 6월10일 대학생들이 남북학생예비회담장인 판문점으로 가려다 곤봉과 최루탄에 막혀 좌절하는 장면을 목격한 뒤 처음 방북을 결심한 그는 한 달 뒤 7·7 선언이 나오자 계획을 포기했다. ‘7·7 선언으로 약속한 남과 북의 교류가 시작된다면 그냥 두어도 통일이 될 테니 방북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노태우 정권의 7·7 선언이 급조됐다는 사실을 파악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전민련 대표들이 북쪽 대표들을 만나러 판문점으로 가다가 경찰에 끌려가는 사건이 벌어졌다. 문 목사는 노태우 정권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1989년 3월12일 김대중 평민당 총재를 만났다. 김 총재는 문 목사에게 ‘촌지’라는 글씨가 적힌 봉투를 건네며 정부의 방북 승인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정부로부터 방북 승인을 받아야 다른 사람도 갈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이야기였다. 봉투에는 10만원짜리 자기앞수표 30장이 들어 있었다. 여비로 쓰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가능할 리 없는 정부의 방북 승인도 문제였지만 계훈제·백기완·이부영 등 전민련을 함께 이끌어왔던 재야 후배들의 반대도 문 목사의 발목을 잡았다. 반대의 이유는 노태우 대통령 중간평가였다. 중간평가 국민투표가 실시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문 목사가 한국을 비워선 안 된다며 그를 말렸다. 이때 만약 문 목사의 부인 박용길 장로의 말 한마디가 없었다면 통일운동의 역사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방북 포기 계획을 밝히는 그에게 박 장로가 말했다. “남자가 간다고 했으면 가는 거지, 이제 와서 중단이 뭐예요. 나 이제 당신 못 믿어.”

7.7선언과 문 목사의 평양행에 얽힌 함수 관계를 이해한다면 노태우 정권이 7·7 선언에 이어 1991년 남북 기본합의서를 내놓았다는 사실을 근거로 ‘남북관계의 진전은 시대적 흐름이었다’라는 식의 낙관론을 펼치기 어렵다. 오히려 거꾸로 문 목사의 방북이 없었다면 1991년 남북 기본합의서가 과연 나올 수 있었을지 의심스럽다. 장대현 한국진보연대 집행위원장은 문 목사의 방북과 이에 따른 통일 운동의 확산이 2년 뒤 남북기본합의서를 견인했다고 주장했다.

“1989년 문익환 목사의 방북과 임수경씨의 방북은 민주화 세력이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민주주의의 공간을 획득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두 사람의 방북은 6월 항쟁에서 확인한 민중의 에너지가 다시 분단 모순의 해소를 향해 터지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두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노태우 정부도 정권의 정당성 확보 차원에서라도 남북 기본합의서를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공안정국의 결정적 계기는 아니었다”

문 목사 방북에 대한 또 다른 비판, ‘공안정국 책임론’에 대한 반론도 충분히 가능하다. 노태우 정권의 성격상 공안정국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었다. 황인성 통일맞이 집행위원장은 “1987년 이후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의 고양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노태우 정권이 취한 형식적 민주화 제스처만으로는 시민사회의 요구를 담아내기 어려운 상태였다”며 “양상이 조금 달라졌을지는 몰라도 잇단 방북 사건이 공안정국 출현의 결정적 계기라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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