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11월27일 오후 6시. 지금은 서울시의회가 들어서 있는 중구 태평로의 국회의사당에는 숨 막힐 듯한 긴장이 가득했다.
“재적의원 203명 중 가(可) 135표.”
‘135’라는 숫자를 듣자 야당 의석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부(否) 60표, 기권 6표, 무효 1표, 결석 1…. 이로써 개헌안은 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여당인 자유당 소속의 최순주 국회부의장은 씁쓸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고, 의사봉을 들어 세 번 두들겼다.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야당 의원들 사이로 자유당 의원들은 굳은 표정으로 퇴장했으나, 항의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4시20분의 표결에 들어가기 직전 최순주 부의장은 가결선이 몇 표가 되는지 국회 의사국장에게 공개적으로 물었다. ‘136표’라는 답변이 있었다. 따라서 최 부의장이든 누구든,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현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폐지함”의 가결
헌정 사상 두 번째의 개헌안, 국민투표제 채택, 국무총리제 폐지, 참의원의 2부제화와 고위 공무원의 인준권 부여, 그리고 무엇보다 “현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폐지함”을 골자로 했던 개헌안은 이로써 무산된 것으로 보였다. 경무대와 자유당은 실로 오랫동안 이 개헌안에 공을 들였다. 1954년 5월20일의 제3대 국회의원 선거는 그야말로 개헌을 위한 총선이나 다름없었다. 정부·여당은 처음으로 후보공천제를 실시해 국회의원 출마자가 공천권을 쥔 당 지도부에게 충성하도록 만들었으며, “곧 있을 개헌에 찬성할 것”을 공천 조건으로 걸었다. 또한 야당 의원의 당선을 갖은 방법으로 방해했는데, 이기붕에 맞서 서울 서대문구에 출마한 조봉암의 경우 추천인 100명을 모아오면 뒤에서 그중 몇 사람을 협박해 추천을 철회하게 하고, 다시 모아오면 또 몇 사람을 철회시키는 수를 써서 끝내 후보자 등록을 못하게 만들었다. 이리하여 선거 결과 자유당 114석, 민주국민당 15석, 대한국민당 3석, 국민회 3석, 무소속 68석이 나왔다. 자유당은 거대 여당의 위치를 지켰지만 개헌선 확보에는 미흡했기에, 야당과 무소속 의원을 상대로 집요한 포섭·매수 공작에 들어갔다. 그래서 6월의 3대 국회 개원 직후에는 137석을 확보해 마침내 개헌선을 넘었다. 자유당에 포섭되지 않은 무소속 의원들은 한편으로 ‘무소속 동지회’를 결성해 31석을 가졌고, 그 밖의 무소속이 20석, 민국당이 15석이었다.
이러고도 불안을 삭이지 못한 이기붕 국회의장 등은 자유당 의원들의 반란표를 막기 위해 투표자가 누구인지 알아내는 수단을 개발했다가 발각됐으며, 무소속 의원을 계속 포섭해 투표 당일에는 12명의 지지표를 추가했다. 그러나 끝내 1표 차이로 부결된 것은 자유당 의원 14명이 반란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끝난 27일 저녁, 이기붕 의장과 최순주 부의장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경무대로 향했다. 하지만 이기붕에게는 아직 속셈이 남아 있었다. 너무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라 가능할까 싶었지만…. 마침내 두 사람은 이 개헌으로 기필코 3선을, 나아가 종신집권을 노린 이승만 대통령 앞에 섰다.
“각하,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어쩌겠소. 그게 하늘의 뜻이고, 국민의 뜻이라면…. 수고들 했소.”
“각하,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 반전의 묘수가 있습니다.”
“이 의장, 그게 무슨 소리요?”
“사사오입이라는 말을 아시지요? 개헌 가결선인 재적의원 3분의 2는 ‘135.333…’으로, 딱 떨어지지 않는 숫자입니다. 그런데 살아 있는 사람을 소수점 이하 숫자로 쪼갤 수는 없잖습니까? 그러므로 소수점 이하 오 이상은 올리고, 사 이하는 버린다는 사사오입의 원칙에 따라, 가결선은 136표가 아니라 135표가 되는 겁니다! 개헌은 가결된 거지요!”
“‘135.333…’이라면 135표를 넘어야 한다는 거지, 135표로 충분하다는 뜻은 아닐 텐데?”
“서울대학교 수학과 최윤식 교수의 자문도 받은 상태입니다.”
“그만두시오. 수학으로는 말이 될지 모르지만, 정치나 법률은 수학이 아니지 않소. 이미 최 부의장이 부결을 선포했는데 이제 와서 사사오입이라며 가결로 뒤집으면 야당이 가만히 있겠소? 국민은 뭐라고 하겠소? …패배를 받아들입시다. 이미 개헌안 부결을 수용한다는 담화문을 만들어놨어요.”
“하지만 각하! 국가와 민족을 생각해주십시오! 지금 이 나라는 각하의 영도력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아니요. 나는 너무 늙었소. 이제 물러날 때가 되었지. 임자들도 이제 나의 후광에서 벗어나 홀로서기를 할 때요. 내가 명예롭게 임기를 마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바라오.”
17명의 과반수는 10명이라던 이승만경무대에서 이런 식의 대화가 오갔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하지만 실제는 정반대였다. 이기붕은 ‘사사오입’이라는 복안을 갖고 경무대에 들어서자 이승만이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내더라고 술회했다. “135표면 통과된 건데 왜 바보같이 부결이라고 했느냐”며 분통을 터트리더라는 것이다.
사실 이승만은 임시정부 시절에도 과반수를 들먹이며 무리한 주장을 한 적이 있다. 대표위원을 뽑는 투표에서 경쟁 후보가 17명 중 9표로 과반수 지지를 얻어 당선이 확정되자, “17명 중 과반수는 8.5명인데, 반올림으로 올린 9표는 부족하고 10표는 얻어야 한다”고 상당히 납득이 안 되는 고집을 부렸다는 것이다. 그때는 명백한 과반수보다 1표나 더 필요하다고 하고 이번에는 1표를 덜 받아도 된다고 했을 뿐, 어느 쪽이든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원칙과 상식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것이 이 프린스턴대 정치학 박사의 특기였다.
결국 긴급국무회의에서 사사오입 개헌안 통과가 추인됐고, 주말을 지나 29일 월요일에 열린 국회에서 최 부의장은 앞서의 선포를 번복하고 “개헌안 통과”를 선포했다. 당연히 난리가 났다. 야당 의원들은 고함을 지르며 의장석으로 돌진했고, 이철승 의원은 최 부의장의 멱살을 잡고 의장석에서 끌어내렸다. 아수라장 속에서 야당 계열 국회부의장이던 곽상훈은 “나도 부의장이다. 개헌안 부결을 선포한다!”며 의사봉을 탕탕탕 두들겼다.
이어서 야당 의원과 일부 여당 의원이 퇴장한 가운데 125명의 ‘거수기’ 의원들만 남아 개헌안 통과 확정을 의결했는데, 이 역시 재적의원 3분의 2에서 모자라는 숫자로 개헌을 최종 확정한 셈이라 위헌이라는 시비를 면치 못할 결정이었다.
이 사태를 계기로 민주국민당과 무소속 동지회는 합심해 ‘호헌동지회’를 결성해 정권을 규탄하는 한편, 야권 단일화 운동을 벌여 결국 1955년 9월 민주당이 발족하게 된다. 김영삼·민관식·손권배 등 반대표를 던졌던 자유당 국회의원 14명이 탈당하고, 이들 중 일부가 민주당에 합류해 야당의 기세를 높였다. 1956년에는 조봉암·박기출 등의 진보당, 서상일·김철 등의 민혁당이 수립돼 한국전쟁 이후 자취를 감췄던 혁신 계열 정당의 재등장을 보게 되었다. 지나친 권력욕이 빚어낸 이승만 정권의 무리수가 견제 세력의 존재 이유를 국민에게 환기시킨 셈이다. 그 사실은 사사오입 개헌을 앞두고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개헌 찬성 여론이 17%에 그쳤던 점, 개헌을 밀어붙인 결과 1956년의 제3대 대선에서 이승만은 대망의 3선을 이뤘으나 이기붕은 민주당의 장면에게 밀려 부통령이 되지 못한 점에서 입증된다. 역대 최악이라는 관권선거·부정선거가 행해지지 않았다면, 그리고 유력한 야당 대통령 후보이던 신익희가 돌연 사망하지 않았다면 이승만의 3선조차 불가능할 수도 있었다. 민심의 이반에 경악한 정권은 조봉암 ‘사법 살인’, 폐간 등 더욱 과격한 무리수를 거듭하며 폭주하다 끝내 4·19를 맞았다.
만약 135표가 나왔을 때 이 대통령과 여당이 결과를 받아들이기로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또는 표결 직전 여당의 유혹을 받은 무소속 의원 중 한 명만 마음을 굳게 먹고 반대를 던져 134표의 찬성표가 나왔다면, 그래서 사사오입이라는 궁색한 변명의 여지도 없었다면 어땠을까?
정권은 다시 자유당에 돌아갔을지라도…당연히 이승만은 2년 안에 경무대에서 물러나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박정희의 유신과 같이 친위 쿠데타로 헌정을 중단시키고 정권을 연장하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당시 미국이 이승만 정권을 못마땅히 여겼을 뿐 아니라 한국전쟁 당시 세운 ‘에버레디 작전’, 즉 이승만 제거 계획을 계속 만지작거리며 가능하면 그를 실각시키려 했음을 미뤄보면 가능성이 희박하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이승만 이후’를 노린 잠룡들의 활발한 꿈틀거림이 정국을 뜨겁게 달구었을 것이다. 특히 자유당에는 광풍이 몰아쳤을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3대 국회의원 선거는 이승만을 위해 개헌선을 확보하려던 선거였던 동시에, 이기붕이 제2인자 자리를 굳힌 계기이기도 했다. 공천권을 무기로 3월 전당대회에서 이갑성·배은희 등 반대세력을 몰아낸 이기붕은 자유당을 장악해 바야흐로 그의 자택이 ‘서대문 경무대’로 불릴 정도의 권력을 누리게 되었다. 이에 반발한 당내 세력이 있었고, 그 일부가 개헌안 투표 때의 반란표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개헌이 수포로 돌아갔다면 이기붕의 입지는 급격히 실추되고, 이에 따라 직전에 숙청된 이갑성·배은희, 대한국민당에서 넘어온 이재학 등이 대안세력으로 떠올랐을 것이다.
야당에는 조병옥·장택상·장면·조봉암 등이 있었지만 총선 이전부터 신익희에게 기대가 쏠리는 상태였다. 이승만 정권의 종식이 초읽기에 들어갔다면 그 추세가 더 급해짐에 따라 그를 중심으로 야당이 통합될 가능성이 높았겠지만, 신익희가 1956년 5월5일에 사망해 야당의 제1후보가 갑자기 공석이 된 상황에서 정권은 다시 자유당에 돌아갔을 수도 있다.
정권 말기가 되면 ‘7룡’이니 ‘9룡’이니 하며 차기 대권 후보가 태동하고 정당이 이합집산하는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의 통상적인 모습이 1950년대 말에 이미 실현됐으리라는 것이다. 또한 제3대 대통령이 야당에서 나오든 자유당에서 나오든, 이후 정국은 1990년대 이후의 모습처럼 두 보수정당과 몇몇 혁신정당 중심으로 진행됐을 가능성이 높다. 사사오입에서 4·19까지 꾸준히 무리수를 둔 결과 자멸해버린 자유당이 평화적 정권 교체를 거치며 살아남았을 것이고, 혁신정당 역시 이승만 정권 말기의 탄압이나 군사 쿠데타를 겪지 않으며 뿌리를 내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보는 한국 정치의 모습이 결코 이상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형식적 민주주의의 원칙은 지켜지는 셈인데, 그런 틀이 수십 년 앞당겨 이뤄졌으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쯤은 훨씬 성숙한 민주주의를 볼 수 있게 되지 않았을까.
쿠데타 없는 헌정사, 진보정당의 오늘은 어땠을까무엇보다 사사오입 개헌은 법치주의 원칙을 철저히 무너뜨렸다. 1952년의 발췌개헌도 원칙과 상식을 깨트린 것이었으나, 당시는 전시였고 대통령 선출권을 국회에 부여한 제헌헌법의 민주적 불충분성을 해소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그러나 사사오입 개헌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이후 이 땅에는 법이 아니라 사람이 다스리고, 정의가 아닌 권력이 말을 하는 것이 ‘상식’이 되고 만다. 권력자에게 유리하면 아무리 파렴치한 짓이라도 서슴지 않으며, 떳떳한 토론과 합의가 아니라 ‘돈’과 ‘총칼’이 앞서는 후진국형 정치 풍토는 이로써 악의 씨를 뿌리고야 말았다.
함규진 성균관대 국가경영전략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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