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에게 ‘귀양살이’만큼 괴로운 것이 없다. 대중의 관심을 에너지로 삼는 그들에게 변방의 삶이란 곧 정치적 사망선고와 통한다. 2008년 4월 총선에서 손학규 민주당 대표는 자신의 지역구인 서울 종로에서 박진 한나라당 의원에게 졌다. 그가 이끈 민주당도 졌다. 어려운 여건에서 그만하면 선전했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과반 의석을 차지한 한나라당 앞에서 이런 성적표를 자랑스레 내밀 수는 없었다.
예상치 못한 1위, 최고 지지율 11.8%그해 7월6일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정세균 전 대표에게 당권을 물려준 손 대표는 다음날 조용히 강원도 산골로 떠났다. 손 대표 식으로 표현하면, ‘파산 직전의 회사를 이끌어온 법정관리인’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았다. 그의 정치적 재기가 순탄하리라 내다본 사람은 많지 않았다. 민주당에 손학규 몫의 정치적 지분은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지난 8월15일 오랜 춘천 생활을 정리하며 정치 행보 재개를 선언했을 때도 언론은 여전히 그의 민주당 대표 선출 가능성을 높게 보지 않았다. 조직과 사람, 돈 등 선거의 삼박자 가운데 어느 것 하나 충분하지 않았다. 미래가 보장된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는 “이제 우리는 혁명을 시작한다”며 측근을 독려했다.
지난 10월3일 민주당 전당대회 결과는 혁명이라면 혁명이었다. 전대 초반만 하더라도 정치권 안팎에서는 2년간 당을 이끌며 조직을 다져온 정세균 전 대표나 2007년 대선후보로 나섰던 정동영 상임고문이 우세할 것으로 내다봤다. 결과는 1만1904표(21.37%)를 얻은 손 대표의 승리였다. 정동영 상임고문과 정세균 전 대표는 각각 2위(19.35%)와 3위(18.41%)에 그쳤다.
손학규 대표의 승리는 언론의 관심을 모으기에 충분했다. 손 대표의 행보 하나하나가 모두 기사화됐다. 2007년 대선 이후 야권 인사 가운데 손 대표만큼 뉴스를 몰고 다닌 인물은 없었다.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는 지지율 상승으로 이어졌다. 여론조사기관 동서리서치의 10월5일 대선후보 적합도 조사에서 손 대표는 11.8%를 기록했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31.5%)에 이은 전체 2위였다. 손 대표의 참모그룹에서는 환호했다. 그럴 만했다. 이전까지 그는 단 한 번도 ‘11.8%’라는 지지도에 닿지 못했다. 2007년 12월 대선을 넉 달 앞둔 8월29일 리서치앤리서치 여론조사에서 10.8%를 기록한 것이 최고였다. 그때를 제외하면 손 대표의 대선후보 지지도는 대개 6~7% 선에서 오르내렸다.
손 대표의 최측근 인사는 10월7일 “그동안 당의 간판이 없다는 허탈감에 빠져 있던 민주당 지지층의 기대가 손 대표에게 쏠리고 있다”며 “손 대표가 (상대적으로 불리한) 야당 후보인 만큼 지지도가 15~20% 선까지만 오르면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도 충분히 맞붙어볼 수 있을 것”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10·3 민주당 전당대회 승리는 손 대표에게 또 하나의 선물을 안겨줬다. 어쩌면 일시적일 수 있는 지지도 상승보다 더 큰 선물이었다. 그를 괴롭혀온 ‘한나라당 전력’ 시비의 해소였다. 한나라당 출신이라는 과거는 그에게 아픔인 동시에 최대의 아킬레스건이었다.
2007년 대선을 앞둔 그해 6월 ‘대통합의 불쏘시개’를 자처하며 대통합민주신당 창당에 뛰어들었을 때도, ‘새로운 정치질서 창조’를 내세우며 한나라당을 탈당했을 때도, 심지어 한나라당 안에서 이명박·박근혜라는 양강 후보와 힘에 부치는 싸움을 할 때도, 그에게 먼저 손짓을 한 쪽은 신당 세력이었다. 하지만 바깥에 있을 때는 어서 오라며 끊임없이 손 대표를 유혹하던 신당 세력이 그해 8월 그가 대통합민주신당 대선후보 경선에 참여하자 안면을 바꿨다. ‘정체성 시비’가 도마 위에 올랐다. 손학규 대세론이 여기서 조금씩 꺾이기 시작했다. 신당의 대선후보 자리는 정동영 상임고문이 차지했다.
같은 패턴에 두 번 당하지 않는다10·3 전당대회에서 손 대표가 이기기 어렵다고 본 사람들은 여전히 그의 출신을 의식했다. 손 대표와 맞붙은 정세균 전 대표와 정동영 상임고문 역시 ‘한나라당 출신’이라는 그의 약점을 우회적으로 공격했다.
손 대표는 똑같은 패턴의 공격에 두 번 당하지 않았다.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 경선 때 ‘한나라당 출신’ 공세에 후퇴를 거듭한 것과 달리 이번에는 ‘대권주자 경쟁력’ 등으로 맞섰다.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 합류 이후 그가 줄곧 낮은 자세를 유지하며 당을 위해 희생해온 사실도 방패막이가 됐다.
실제로 2008년 4월 총선을 치른 뒤 춘천 칩거에 돌입한 그에게 정계 복귀의 기회는 적지 않았다. 각종 재보선 때마다 민주당 안팎에서는 그의 이름을 호명했다. 그때마다 그는 “반성이 끝나지 않았다”며 몸을 낮췄다. 대신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갔다. 2009년 4월 인천 부평을과 10월 경기 수원 장안 국회의원 재선거에서 민주당 후보가 이길 수 있었던 주요 배경으로 그의 헌신적 지원 유세가 꼽혔다.
손학규 대표에게 10·3 전당대회의 승리는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의 대선후보 경선에서 패한 뒤 백의종군을 거듭해온 ‘과거’의 보상인 동시에 한나라당에 몸담았던 ‘과거’에 대한 면죄부로 풀이할 수 있다. 특히 민주당의 심장인 광주·전남이 호남 출신 경쟁자를 제치고 손 대표를 선택했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이번 전당대회의 지역별 득표 현황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손 대표는 경선 초반부터 광주·전남에서 1위 자리를 놓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손 대표의 최측근 가운데 한 명은 ‘한나라당 전력’ 시비의 종말을 선언했다.
“민주당의 광주·전남 당원이나 대의원이라면 정치 5단쯤 되는 것 아닙니까. 이들 가운데 손학규 대표가 한나라당을 탈당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어요. (당 대표 선출은) 이런 광주·전남 대의원이 손 대표에게 압도적으로 표를 몰아준 결과이기 때문에 한나라당 전력 시비는 이제 끝난 것으로 판단합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손 대표의 탈당 전력에 대한 시비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으로 본다. 만약 그가 2012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나설 경우 본선에서 똑같은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현재로서는 한나라당 유력 후보가 박근혜 전 대표다. 그에게도 2002년 8월 대선을 앞두고 탈당했던 과거가 있다. 2012년 대선이 ‘박근혜-손학규’의 일대일 구도로 전개된다면 피차 탈당 사실을 문제 삼기 어렵다.
10·3 전당대회 이후 손 대표의 급부상은 2012년 대선 레이스의 조기 점화로 이어질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손 대표의 빠른 발걸음이 차곡차곡 지지율 상승으로 이어진다면 여야의 다른 대선 예비주자도 가만히 있기 어렵다. 한나라당은 이미 ‘손학규 주의보’를 울리고 있다.
민주당 전당대회의 정치적 의미가 이래저래 남다를 수밖에 없다. 물론 모든 변화의 시작은 2007년 3월19일 손 대표의 한나라당 탈당에서 비롯됐다. 만약 그때 그가 탈당을 택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무엇보다 한나라당 대권후보 경쟁구도가 관심사다. 지금처럼 박근혜 전 대표의 독주 체제가 가능했을까? 일반적인 대답은 ‘아니요’다. 한나라당 잠룡 가운데 박 전 대표가 홀로 빛나는 이유는 뚜렷하다. 경쟁자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손 대표가 한나라당에 있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정치평론가 고성국 박사(정치학)의 분석이다.
“손학규 대표가 민주당 전당대회 때 내세운 구호가 ‘잃어버린 600만 표를 되찾아오겠다’는 주장이었다. 그 600만 표란 곧 중도 세력을 가리킨다. 2007년 대선이 그랬던 것처럼, 2012년 대선도 누가 중도 세력을 선점하느냐의 싸움이라고 본다면 손 대표는 분명 장점이 있는 카드다. 민주당에 있든 한나라당에 있든 중도 지지층 획득 게임에서는 상당히 유리했을 것으로 본다.”
정치권에서 중도에 대한 애착은 유별난 구석이 있다. ‘과연 중도란 무엇인가’라며 촘촘히 따지기 시작하면 정치적 실체가 모호하다는 비판이 있지만, 보수든 진보든 중도를 잡아야 한다는 명제를 부인하는 쪽은 거의 없다. 보수의 대표주자였던 박근혜 전 대표가 2007년 대선 경선 실패 이후 ‘복지국가’ 구호를 내세우는 등 중도 행보를 조금씩 강화하는 이유도 비슷하다.
문제는 박 전 대표의 중도 행보가 워낙 더디게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짙은 보수색도 한계로 지적된다. 한나라당 지지 성향의 중도보수 혹은 온건보수를 사로잡기에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이철희 한국사회여론연구소 부소장은 바로 이 공간이 손학규 대표에게 열려 있었다고 지적한다.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구도를 여러 후보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을 뽑는 우열구도로 보면 안 된다. 단순하게 말하면 ‘박근혜로 갈 것이냐, 말 것이냐’의 싸움인데, ‘반박’ 후보가 마땅치 않으니 김문수 경기지사와 오세훈 서울시장의 지지율이 일정하게 나왔던 것이다. 만약 손 대표가 계속 한나라당에 있었으면 당연히 박근혜 대항마로 떠오를 수 있었다. 박근혜 전 대표의 독주가 쉽지 않았으리라 본다.”
그런데 물음표가 여기서 그쳐서는 안 된다. 손 대표가 꿈꾼 것은 대권이었다. ‘박근혜 대항마’로 자리매김하는 것은 대권을 향한 과정에 불과하다. 기왕 ‘만약 손 대표가 탈당하지 않았다면’이라는 질문을 완성하려면 ‘손학규와 같은 인물이 한나라당 대선후보가 될 수 있었을까’라는 문장이 이어져야 한다.
시사평론가 김종배씨는 “그럴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고 말한다. 지역적으로는 수도권에 기반한 중도개혁 성향의 대선후보, 즉 손학규 대표는 한나라당에서 ‘양념용 정치인’일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만약 한나라당에 남았다면 큰 틀에서 오세훈·남경필·원희룡 등 과거 미래연대 출신 인사들과 연대하는 그림도 가능했다고 본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그래봤자 그들은 소수파다. 비슷한 유형이라 할 수 있는 김문수 경기지사가 보수색을 강화하는 이유를 잘 봐야 한다.”
한나라당 소속이면서도 이른바 ‘급진 좌파’ 딱지가 붙어 있던 김 지사의 지지율은 올해 초까지 1~2% 수준이었다. 미미하던 지지율이 7~8%로 올라선 것은 6·2 지방선거에서 재선한 직후였다. 그가 보수색을 드러낸 시기와 겹친다. 지난 8월 한 일간지 기고를 통해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의 동상을 광화문에 세우자”고 제안한 것이 대표적이다. 국회의원 시절에도 그는 특히 외교안보 분야에서 한나라당의 어느 인사보다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그건 운동권 출신 한나라당 정치인의 ‘생존 공식’이었다.
민주당 대표, 새 길의 시작일까 끝일까손학규 대표에게 주어진 선택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나라당 안에서는 중도이기 때문에 주류의 좋은 경쟁자가 될 수 있었지만, 중도이기 때문에 결코 주류를 뛰어넘기는 어려웠다. 2007년에 그랬고 2012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손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깊은 산중에서 밤을 지새워보니 어둠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어디서 새 우는 소리가 들렸고, 동쪽 하늘이 환하게 열렸다. 버리지 않으면 새 길을 만들 수 없음을 깨달았다.”
2007년 3월19일 탈당 선언을 하기 직전 강원도 양양의 낙산사와 설악산 봉정암 등을 전전하며 얻은 깨달음이라고 했다. 민주당 대표라는 자리는 ‘정치인 손학규’에게 새 길의 시작일까 아니면 끝일까. 정치컨설팅업체 이윈컴의 김능구 대표는 “손 대표의 당면 과제는 이제 말이 아닌 행동으로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어떻게 다른지, 자칭 중도라는 박근혜와 중도의 대명사인 손학규가 어떻게 다른지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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