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는 노무현 정부가 애써 찾아온 군사주권을 포기했다. 2012년으로 예정된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일정을 연기한 것이다. 부끄러운 일이다. 군 원로, 보수 언론 그리고 이명박 정부는 그것이 좌파 정권의 산물이라고 잘못 이해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 자주국방은 오랜 역사를 지녔다.
1994년 12월1일, 김영삼 대통령은 합참의장과 육·해·공군 3군 작전지휘관들로부터 평시작전통제권 환수 신고를 받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6·25 전쟁의 비극 속에서 유엔군에 넘겨준 (평시)작전권을 44년 만에 환수하는 것은 자주국방의 기틀을 확고히 하는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말했다. 언론도 환영했다. 는 그해 10월7일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에서 평시작전통제권 환수를 결정하자 이를 환영하면서 “가급적 이른 시일 내에 전시작전통제권까지 환수하는 것이 다음의 과제”라고 주장했다. 모두가 환영하는 그때 온전한 작전권을 환수했다면,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코미디 같은 자기 비하’를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박정희의 환수 의지, 미국이 꺾어한국전쟁 발발로 이승만 정부는 군사주권을 포기했다.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지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50년 7월14일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에게 공한을 보내 “현 적대 상태가 계속되는 동안 일체의 지휘권을 이양한다”고 밝혔다. 7월16일 맥아더는 무초 대사를 통해 ‘일체의 지휘권’을 ‘작전지휘권’으로 수정하고, 그런 결정에 대해 ‘영광’이라고 회신했다.
전쟁이 끝났다. 그러나 넘어간 군사주권은 돌아오지 않았다. 한-미 상호방위조약이 발효되기 하루 전인 1954년 11월17일 한-미 합의 의사록이 체결됐고 거기서 작전지휘권이 작전통제권으로 축소됐지만, 그것은 계속 유엔군 사령부가 행사했다. 작전지휘권은 작전·인사·행정·지원 등 작전 전반에 대한 직접적 지휘를 말하며, 작전통제권은 군사작전만을 협조·조정하는 것이다. 이때부터 1978년 한-미 연합사령부가 설치될 때까지 유엔군 사령부가 작전통제권을 행사했다. 물론 주한미군 사령관이 유엔사 사령관을 겸직했기 때문에, 미국의 입김과 이해가 작용할 수밖에 없다.
1960년대 박정희 정부 때는 자주국방에 대한 요구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미국은 작전통제권을 강력하게 장악하려 했다. 1960년대 초, 한국군은 베트남 파병을 앞두었고 미국은 주한미군의 일부를 감축해 베트남 전선으로 이동시키려 했다. 이때 미국은 주한미군 감축이 한국군의 작전통제권 반환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우려했다. 나아가 1966~68년 남북 간에 군사적 충돌이 이어지고, 잇따라 북한의 무장간첩이 내려오고,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이 발생하자, 박정희 정부는 강력한 대북 군사보복을 원했다. 그러나 베트남에 발목이 잡힌 미국은 한반도에서 또 다른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대북 보복에 소극적인 미국의 태도를 비판하면서 작전통제권 환수를 요구했지만, 미국은 한반도 정세를 관리하기 위해 작전통제권을 한국에 넘기려 하지 않았다.
1978년 한-미 연합사령부가 만들어지면서, 작전통제권은 유엔군 사령부에서 한-미 연합사령부로 위임됐다. 왜 그랬을까? 1975년 11월 유엔총회에서 유엔군 사령부 해체결의안이 통과되자, 한-미 양국은 유동적인 정세에 대응할 필요가 있었다. 이때부터 한-미 연합사령부가 작전통제권을 행사하고, 유엔군 사령부는 한반도의 평화 및 정전협정 유지에 관한 업무만을 수행하게 되었다.
1980년대 후반, 작전통제권 환수를 위한 환경이 조성됐다. 가장 중요한 것은 노태우 정부의 자주국방 의지였다.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는 선거 공약의 하나로 ‘작전권 환수’를 내세웠다. 그리고 집권하자마자 민족자존을 국정 목표로 제시했다. 당시 세 가지 한-미 현안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첫째는 이미 선거 과정에서 공약으로 발표한 작전통제권 조기 환수였다. 둘째는 용산기지 이전이었으며, 셋째는 군사정전위원회 유엔군 쪽 수석대표의 한국군 장성 임명이었다.
이런 목표를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노태우 정부는 청와대 비서실 내에 안보보좌관을 신설하고 김종휘를 임명했다. 그리고 안보정책비서관으로 김희상, 외교안보 비서관으로 민병석을 임명했다. 이들이 6공화국 안보정책인 8·18 계획을 만든 주역이다. 8·18 계획이란 무엇인가? 1988년 8월18일은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합동참모본부가 ‘장기 국방태세 발전방향 연구계획’을 보고한 날이다. 이 자리에서 노태우 대통령은 자주국방을 준비하기 위한 위원회 구성을 지시했고,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이른바 ‘8·18 위원회’다.
“군 수뇌부가 노태우 대통령 비하”
당시 미국의 상황 변화도 중요하다. 미국에서는 1988년부터 세계적인 냉전 종식에 따른 해외 주둔 미군의 감축 필요성이 제기됐다. 1989년 미국 의회가 해외 주둔 미군을 점진적으로 감축하는 내용의 ‘넌-워너 수정안’을 통과시켰다. 당시 한반도 방위와 관련해서는 ‘한국 방위의 한국화’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미국의 사정으로 주한미군을 감축해야 하니, 이제 한국의 방위는 스스로 알아서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넌-워너 수정안’의 계획에 따르면, 1단계로 주한미군 7천 명을 감축하고, 2단계인 1995년까지 새로운 전략목표를 설정해 미군부대를 재편성하며, 마지막 3단계인 2000년까지 억지 목적의 소규모 미군만 한반도에 잔류시킨다는 계획이었다. 실제로 이 법안에 따라 1990년 4월에 작성된 ‘동아시아 전략 구상’에서 1990년대 후반에 연합사 해체를 검토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작전권 반환의 정치적 이유도 있었다. 12·12 쿠데타와 광주 민주화운동을 거치면서, 작전권을 가진 미군이 전방 병력 이동을 암묵적으로 동의했다는 비판이 국내외적으로 제기됐다. 미국은 이런 역사적 과정을 거치며 반미 감정으로 번진 한국 내의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했다.
노태우 대통령의 자존 선언과 미국의 달라진 전략 개념이 작전통제권 환수의 환경을 조성했다. 그런데 이때 왜 평시와 전시로 작전권의 개념이 분리됐을까? 노태우 후보가 대선 국면에서 주장하고 6공화국이 초기에 주장한 것은 작전권 반환이었다. 그때까지 평시와 전시는 구분되지 않았다. 사실 논리적으로도 그것을 구분하기 어렵다. 평시의 지휘체계가 전시가 되면 달라진다는 말인데, 그처럼 비효율적인 것이 어디 있는가. 교육과 훈련을 평시 지휘체계에 따라 열심히 하다, 전쟁이 일어나면 새로운 지휘체계가 현장 부대를 지휘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지구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은 우스운 지휘체계가 아닐 수 없다. 비효율적이고, 혼란이 뻔하며, 누가 봐도 웃기는 왜곡된 작전통제권이 1994년 이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부끄러운 현실이다.
그럼 왜 당시 평시와 전시가 구분됐을까? 그 이유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분명히 노태우 정부는 온전한 형태의 작전통제권 환수를 추진했다. 그러나 한-미 협의 과정에서 평시작전통제권을 우선 환수하고, 단계적으로 전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하는 단계적 접근으로 변경됐다. 평시작전통제권은 온전한 작전권 환수를 위한 잠정적 단계에 불과했다. 미국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1990년 2월15일 넌-워너 수정안을 협의하기 위해 방한한 체니 미 국방장관은 1991년 1월1일부로 한국 쪽이 평시작전통제권만이라도 행사할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1990년 11월 한-미 군사위원회에서 “평시작전통제권은 1993년까지, 전시작전통제권은 1995년까지 환수한다”는 한국 쪽 제안으로 구체화했다.
이렇게 결정하는 과정에서 반발 세력이 있었다. 국방부 장성들이다. 이종구 육군참모총장을 비롯한 육군본부 지도부는 국방 개혁에 저항했다. 8·18 위원회 역시 육군본부의 압력에 위축돼 대통령의 개혁 의지를 구체화하는 데 주저했다. “육군본부를 주축으로 하는 군 수뇌부는 노골적으로 노태우 대통령을 비하하면서 개혁에 저항했고, 청와대 안보보좌관실과 8·18 위원회에 소속된 장교들은 수시로 협박을 받았다.”(김종대, 참조)
주한미군도 미국 국방부 입장과 달리, 작전통제권 반환에 소극적이었다. 주한미군의 입장에서 한-미 연합 지휘체계 변경은 기득권의 약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1994년에 평시작전통제권만이 아니라 전시를 포함하는 온전한 작전통제권을 환수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미국의 ‘한국 방위의 한국화’ 방침과 한국의 자주국방 의지가 결합됐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첫째, 한-미 동맹이 약화됐을 것이라는 우려는 근거가 없다. 지휘체계 변화가 한-미 군사동맹의 해체로 이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작전통제권을 한국이 행사하더라도 연합 방위력은 다양한 방식으로 실현할 수 있다. 노무현 정부가 아니라 노태우·김영삼 정부에서 전시작전통제권을 환수했다면, 보수 세력이 그렇게 반발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1994년 당시 조차도 환영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되었다면 달라진 한반도 정세에서 보수 세력이 한-미 동맹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내세우지도 못했을 것이다. 서울시청 앞에서 성조기를 흔드는 ‘웃기면서 서글픈 풍경’은 재연되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 미래지향적 국방 전략이 구체화됐을 것이다. 군사주권이 없는 국방이란, 머리가 없는 군대로 비유할 수 있다.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지 못하는데, 팔다리만 튼튼하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물론 이 과정에서 국방비 부담은 늘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남북한의 경제력·군사력 격차를 고려하면 이 또한 과장해서는 안 된다. 작전통제권을 일찍 환수했더라면 그만큼 국방 개혁도 조기에 시작했을 것이다. 육군의 기득권을 유지·확대하는 소모적인 국방 강화가 아니라, 각 군의 통합 능력을 강화하는 질적·미래지향적인 국방 개혁 말이다.
셋째, 한반도 평화체제를 한국 주도로 추진했을 것이다. 작전통제권을 환수하면 미국이 1990년대 초부터 강조해온 ‘한국 방위의 한국화’를 달성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한반도에서 군사적 신뢰를 구축하고, 잠정적인 평화 상태를 실현하며, 최종적으로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한국이 중심적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다. 과거 북한은 왜 미국하고만 평화체제 논의를 하고 싶어했는가? 그것은 한반도 군사 문제에서 여전히 미국이 중심적 역할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작전통제권을 환수하면 북한 역시 남한을 한반도 평화체제 당사자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었으면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한국은 주도적 역할을 발휘했을 것이다. 1994년에 작전통제권을 환수했으면 최소한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한반도 평화체제를 주도적으로 추진하고 북핵 문제도 해결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물론 김영삼·이명박 정부의 ‘이념적 대북정책’을 보면 걱정이 되기도 한다. 작전통제권을 갖고 선제적 대북 공격을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든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 없는 사람들이라도 국내적으로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전쟁 불사’를 행동으로 옮기기는 어려울 것이다. 동시에 한-미 동맹이 유지되는 상황에서 미국이 반대하는 독자적인 대북 선제공격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1950년대 논리에 묶여 있는 MB 정부
작전통제권의 역사를 보면 이명박 정부가 작전통제권 환수를 연기한 이유를 납득하기 어렵다. 미국조차 한국의 방위 능력이 충분하다고 평가하는데, 돌려주겠다는 주권도 사정해서 연기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미 주한미군은 기지를 이전하고 전략적 유연성에 따라 대북 억지보다 세계적 분쟁에 신속하게 개입하는 체제로 바뀌고 있는데, 아직도 1950년대식 한-미 동맹 논리로 안보를 해석한다. ‘낡은 이념의 고집’이 아닐 수 없다.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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