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조문 논쟁은 교훈을 얻어야 할 역사다. 또한 북한 3대 세습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현재’와 겹친다. 그리고 언젠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사망하는 시점에 다시 벌어질 ‘미래’다. 1994년 조문 논쟁은 남북관계 악화를 가져왔다. 실패한 정책이었다. 김영삼 정부는 도덕의 늪에 빠져 외교를 고려하지 않았다. 또한 조문 논쟁으로 ‘우리 안의 냉전’이 부활했다. 좌파 내부의 논쟁도 있었고, 냉전 반공주의의 광기를 폭발시켰으며, 공론의 후진성을 확인시켜주기도 했다. 한 번 더 경험해야 할 과거로 돌아가보자.
왕창 퍼주려 한 YS의 구상
1994년 7월8일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다. 남북 정상회담에 합의하고 실무협상을 진행하고 있던 때다. 김영삼 정부의 첫 번째 반응은 아쉬움이었다.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만약 그때 남북 정상회담이 이루어졌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당시 정상회담을 추진한 관계자들에 따르면, 김영삼 대통령은 특유의 승부사 기질을 발휘할 생각이었다. “돈 좀 쥐어주고, 북한군을 후방 배치시키면 안 되겠나?” 그런 생각이었다. 당시 북한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그래서 외교관계를 정상화시키려 했다. 김영삼 대통령의 단순한 접근이 통할 수도 있었다. 당시 한국 경제는 실제로 여유가 있었다. 그랬다면, 그때 남북 경제협력이 본격적으로 추진됐을 것이다. 마침 클린턴 미 행정부도 북핵 협상을 서두르고 있었기에, 그야말로 남-북-미 삼각관계가 선순환할 수도 있었다. 왕창 퍼주겠다는 김영삼 대통령의 구상이 현실화됐다면, 한국에서 ‘퍼주기 이데올로기’도 영원히 사라졌을 것이다.
그런데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죽음이 우연이라면, 죽음이 불러온 풍경은 필연이었다. 같은 해 7월11일 임시국회 외무통일위원회에서 이부영 민주당 의원의 발언은 조심스러웠다. 그날 통일부 장관은 북한의 김용순 대남담당 비서가 정상회담 연기를 통보해왔다고 보고했다. 이 의원은 이를 ‘김정일 체제가 되더라도 정상회담을 계속하겠다는 화해의 신호’로 해석했다. 그리고 정부에 조문할 의사가 있는지 타진했다. 여기에는 4개의 전제조건이 달렸다. 첫째 북한 체제와 대화를 해야 한다면, 둘째 김정일 후계체제의 안정이 대화와 협상을 위해 필요하다는 인식을 정부가 갖고 있다면, 셋째 정상회담이 계속 추진돼야 한다면, 그리고 넷째 우리 국민의 양해가 성립된다면 등이었다. 이 의원은 이런 상황이라면 정부가 조문을 할지 물은 것이다.
지금 평가해보면 상당히 사려 깊은 주장이었고, 살얼음을 걷듯 조심스러운 발언이었다. 그러나 그 정도의 말도 냉전의 광기를 폭발시키는 데 충분했다. 냉전 세력은 당시의 정세 변화에 당황했고 불안해했다. 불만도 많았다.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용기 있는 방북으로 전쟁 직전까지 갔던 한반도 정세가 정상회담으로 전환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일성의 사망으로 정세는 다시 불투명해졌다. 화해 국면에서 울분을 삼키던 냉전 세력들이 일어섰다. 7월12일 박범진 민자당 대변인은 “수백만 명을 죽인 전범은 조문해야 하고, 광주 사태에 대해 끝까지 책임지라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라고 비판하면서, “김일성은 실정법상 여전히 반국가 단체의 수괴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부영 의원은 정부의 정책을 물었는데, 민자당은 도덕으로 답했다. 이때부터 보수 언론은 냉전의 불씨에 기름을 부었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일부 정치인들의 의식상의 문제”( 7월13일치 사설)로 색깔론을 제기하고, “김일성의 반민족적 범죄는 결코 용납할 수 없으며, 정서상 논리상 김일성 조문은 절대 불가하다”( 7월16일치 사설)고 쐐기를 박았다.
학생운동권이 중심인 당시의 진보 진영 내에서도 논란이 있었다. 민족해방파(NL)가 장악한 일부 학교에서는 분향소를 설치하기도 했다. 그러나 민중민주(PD) 계열은 “조문단 파견을 주장하는 주사파의 입장에 강력히 반대한다”는 대자보로 응수했다. 당시 민족해방파는 여론의 흐름을 읽지 못했다. 북한에 대한 평가도 객관적이지 못했다. 당연히 공감대를 얻을 수 없었으며, 이어진 ‘주사파 사냥’의 계기를 제공했을 뿐이다.
박홍 서강대 총장의 ‘주사파 시리즈’는 공포로 시작해 코미디로 변질했다. 7월18일 청와대 오찬에서 박홍 총장은 주사파가 대학가에 있다고 했다. 며칠 뒤 ‘대학교수’로, 나중에는 ‘야당, 종교계, 언론계’로 점점 범위가 넓어졌다. 1950년대 매카시즘이 한국에서 부활한 것이다. 물론 오래가지 못했다. 뻥도 적당히 해야 하는데, 너무 과하면 웃음거리가 된다. 박홍 총장을 용기 있는 지식인으로 치켜세웠던 보수 언론들이 세간에 퍼져가는 조롱을 보고 적당히 마무리했다.
김영삼 정부는 신공안정국을 조성하며 조문 논쟁에 개입했다. 이영덕 총리는 7월18일 국무회의에서 김일성을 ‘동족상잔의 전쟁을 비롯한 불행한 사건들의 책임자’로 규정하며 사회 일각의 조문 움직임에 ‘유감’을 표명했다. 정부의 기본 입장을 정리한 것이다. 그것은 곧바로 북한의 비난과 남북관계 악화의 근거로 작용했다.
김영삼 정부는 국내 정치를 조문외교보다 중시했다. 조문외교는 ‘필요하면 적에게도 미소를 보낼 수 있는 외교적 행위’다. 남북한은 전쟁을 경험했기에 다른 나라와 다를 수 있다는 주장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장제스가 1975년 대만에서 사망했을 때, 중국은 조의를 표명했다. 마찬가지로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했을 때도 대만은 조의를 표명했다. 국공내전을 치른 당사자들이 아닌가. 죽기 살기로 싸우던 당사자들이 역사의 무대에서 내려올 때, 누군가는 시대의 1막이 끝났음을 알려야 하는 게 아닌가. 그래야 다음 무대의 막이 올라가지 않겠는가.
당시 이부영 의원은 조문외교의 필요성을 설명하면서, 1989년 일본 왕인 히로히토가 죽었을 때 강영훈 국무총리가 조문사절로 간 것을 예로 들었다. 아무도 당시 조문이 일제 36년의 압제와 수탈을 망각한 채 이루어졌다고 비판하지 않았다.
김영삼 정부의 대응은 미국과 비교해도 비판받을 만하다. 클린턴 행정부는 김일성 사망 직후 “미국 국민을 대신해 북한 주민들에게 심심한 애도를 전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조의 전문 대신 성명으로 한 단계 격을 낮추었고 내용도 중립적이며 되도록 짧게 구성하려 고심했다고 한다. 동시에 당시 제네바에서 북한과 핵 협상을 벌이던 갈루치 차관보가 제네바 현지 북한 대사관으로 가서 조문했다. 절제된 내용과 형식이지만, 협상 상대에게 예의를 표시했다.
물론 미국 내부에서 논란이 적지 않았다. 미국도 북한과 전쟁을 치렀기 때문이다. 특히 공화당은 클린턴 대통령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과 그 가족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공화당은 보수적 여론을 대변했지만, 조문의 외교적 측면을 보지 못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대표적으로 는 7월12일 공화당 원내총무를 비판하는 사설을 실었다. 제목은 ‘상원의원, 그것이 외교요’였다.
미국은 조문외교의 경험이 풍부하다. 1976년 9월9일 마오쩌둥이 사망했을 때, 현직 대통령이던 제럴드 포드는 물론 미-중 관계 개선의 물꼬를 튼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도 조문사절로 베이징을 찾았다. 공화당 소속의 전·현직 대통령들이다. 공화당도 집권당으로 국정을 운영할 때는 당연히 외교를 우선시했다.
‘보수의 현대화’ 이룰 수 있었던 기회
미국이 조의를 표명하자, 김영삼 정부는 당황했다. 민자당은 아예 “클린턴에게도 문제가 있다”(이세기 정책위의장)며 불만을 표시했다. 그들이 종교처럼 숭배하는 한-미 동맹도 냉전 반공주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한국의 보수가 미국에 할 말을 할 때가 바로 이럴 때다. 미국이 탈냉전을 지향할 때 말이다.
일본 정부의 대응은 어땠을까? 일본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는 정부 수반이 아니라, 사회당 위원장 자격으로 조전을 보냈다. 당시 일본은 사회당, 자민당, 신당 사키가게로 구성된 3당 연립정부였다. 3당 모두 당 대표 명의로 조전을 보냈다. 또한 일본은 3당 공동으로 조문단을 평양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북한의 거부로 성사되지 않았다. 그러나 오부치 게이조 자민당 부총재를 비롯해 3당의 고위급 간부들이 도쿄 조총련 중앙본부에 설치된 분향소로 가 조문을 했다. 3당 연립정부는 북-일 관계 개선을 중요한 전후외교 과제로 설정했고, 북한과의 외교적 관계를 고려했다.
김영삼 정부는 국내의 조문 논쟁을 관리하지 못했다. 오히려 냉전 반공주의에 정치적으로 편승했다. 정상회담을 할 뻔한 남북관계는 이후 회복하기 힘들 정도의 상처를 입었다. 임기가 끝날 때까지 변변한 회담 한 번 못하고, 그렇게 김영삼 정부는 막을 내렸다.
김영삼 정부는 도덕적 판단과 정책적 대응을 구분하지 못했다. 조문 논쟁은 두 가지 다른 요소가 섞여 있다. 하나는 인식이고, 다른 하나는 정책이다. 김일성을 역사적으로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이 질문은 인식의 영역에 해당한다. 모든 지도자를 평가할 때, 물론 공도 있고 과도 있다. 그러나 적대적 남북관계에서 북한의 지도자가 좋은 평가를 받을 수는 없다. 우선 환경이 그렇고, 실체가 그러하며, 경험도 있기 때문이다. 1994년과 지금, 그리고 미래도 마찬가지다. 북한에 대해 상식과 논리를 벗어난 평가는 공감을 얻기 어렵다. 정책적 대응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조문외교는 죽은 자에 대한 인간의 예의와는 다른 수준이다. 클린턴 행정부가 조의를 표명한 것은 외교적 필요가 있어서고, 일본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왜 그들이라고 해서 도덕적 판단이 없겠는가. 외교는 냉혹한 국제현실이다. 미국·일본이 외교를 선택할 때, 김영삼 정부는 정치를 택했다. 아마추어처럼 말이다.
더욱 아쉬운 점은 한국의 보수다. 당시는 보수가 집권당이었다. 닉슨 행정부처럼, 혹은 포드 행정부처럼, 보수라도 미래지향적인 국익을 우선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물론 분단체제에서 냉전 반공주의는 보수적 정체성의 근원이고, 부패와 기회주의를 포장할 수 있는 편리한 도구다. 그러나 ‘반공주의자’ 닉슨이 세계적인 데탕트를 주도하고, 서독의 ‘실용주의적 보수주의’가 통일을 이룩하지 않았던가. 냉전 반공주의를 벗어나 얼마든지 보수적 정체성을 재규정할 수도 있지 않은가.
민주화의 주역이던 김영삼 대통령이 보수적 블록 내에서 리더십을 발휘해, 한국에서도 ‘보수의 현대화’를 이룰 수는 진정 없었을까? 조문 논쟁은 좋은 기회였다. 미국이나 일본처럼 대응했다면 한국의 이념 지형은 달라졌을 것이며, 남북관계도 한반도 정세도 달라졌을 것이다.
진보도 마찬가지다. 북한을 비판하고 싶어도 정책적으로 침묵을 선택하는 쪽이 있다. 침묵이 지지가 아니고, 미소가 호감이 아니다. 그런데 다른 한쪽에서 ‘북한이 뭘 잘못했는가’ 라는 식으로 상식과 다른 주장을 내놓으면 어쩌란 말인가. 1994년 조문 논쟁은 진보 진영 내에서도 북한에 대해 복합적으로 성찰하는 기회였지만, 살리지 못했다.
미래의 조문 정국은 성숙해질까
1994년 조문 논쟁은 그런 측면에서 한국의 보수와 진보 모두에게 발전의 기회였다. 한국전쟁의 전후체제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관계로 진전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색깔론이 사라진 시대는 국내 정치를 한 단계 성숙시키고, 민주주의를 한 차원 더 공고히 했을 것이다.
지금의 3대 세습 논쟁도 마찬가지다. 북한 체제에 대한 인식의 공감대를 바탕으로 성숙한 정책적 대응이 필요하다. 상식에서 벗어난 인식도 문제지만, 공당의 입장 발표를 강요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진보 정당이라고 해서 외교적 태도를 취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정당은 비정부기구(NGO)나 학습 서클과 다르다. 물론 논쟁이 수습 국면으로 가는 것은 다행이다. 그러나 김정일 사후 우리 사회는 다시 조문 논쟁을 치러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1994년의 경험, 그리고 최근의 세습 논쟁에서 교훈을 찾아, 그때에는 성숙한 대응을 하기 바란다.
김연철 인제대 교수·통일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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