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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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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때 북한군이 사흘간 서울에 머물지 않았다면



순조롭게 적화통일했겠지만 미국이 핵 동원한 대대적 반격했을지도
등록 2010-07-02 20:47 수정 2020-05-03 04:26
[1910~2010 가상역사 ‘만약에’]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

[1910~2010 가상역사 ‘만약에’]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께, 옹진반도를 목표로 첫 공격이 시작된 뒤 몇시간 동안 38선 전역에서 북한군이 남진했다. 당시 북한군은 총 10개 사단 규모였는데, 7개 보병사단에 국경경비대, 예비사단 등을 합쳐 1개 사단 병력을 더 추가한 약 20만 병력이 ‘조국해방전쟁’에 동원됐다. 그야말로 북한 내에는 최소한의 병력만 남긴 채 모든 힘을 기울여 남침에 나선 것이다. 이들의 뒤에는 약 3천 명의 소련 군사고문단도 있었다.

비록 북한이 38선 전역에서 공격해왔지만, 주 공격로는 의정부∼서울선과 옹진반도∼서울선이었다. 2개 사단은 개성을 순식간에 점령하고 옹진반도를 손에 넣었고, 다른 2개 사단이 의정부를 향해 탱크를 앞세우고 거침없이 밀고 들어왔다. 국군은 4개 사단으로 수도권의 유린을 막았지만, 말이 4개 사단이지 실제 병력은 정원의 절반에 불과할 뿐 아니라 북한군의 탱크와 중화기를 막을 수단이 없었다. 6월25일이 일요일이었기에 기습 효과도 더욱 확실했다. 그래도 6월26일 아침에는 국군 제7사단이 북한군 제4사단을 격파하는 등 반격의 실마리가 보임으로써 이승만과 트루먼에게 한때 희망을 주었으나, 결국 서울은 개전 사흘 만에 북한군의 손에 떨어졌다. 이승만은 라디오 방송에서 “정부는 서울을 사수할 것이며, 지금 국군이 북한 괴뢰 집단을 물리치고 있으니 국민 여러분은 아무 염려 말라”고 호언장담했으나 실제 그는 대전으로 피난 가 있었다. 대통령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많은 서울 시민들은 6월28일 아침 북한군의 탱크가 서울 외곽에 나타나고서야 허둥지둥 피난 보따리를 쌌지만, 한강변에 닿자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그날 새벽에 폭파돼 고철 더미가 된 한강철교였다.

지체할 이유 없었는데 ‘수수께끼 같은 사흘’

이렇게 북한군은 최대한의 전력을 투입해 최소한의 피해만 입고 대한민국 수도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여기서 한국전쟁 최대의 수수께끼가 남게 된다. 수도권 방어전에서 국군이 사실상 궤멸되면서 북한군의 진격을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서울에 머문 채 사흘 동안 진격을 멈췄다. 남진을 재개한 것은 7월1일이었다. 그때는 이미 미국이 남한을 돕기로 최종 결정하고, 첫 병력(미 24사단 21연대 1대대)을 부산에 상륙시킨 직후였다. 어째서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거의 모든 것을 걸고 주사위를 던진 일생일대의 도박판에서, 김일성은 사흘을 머뭇거린 것일까?

진실은 통일이라도 돼서 북한 쪽 자료를 충분히 살펴볼 수 있어야 명확히 밝혀질 것이다. 아무튼 지금까지 그 수수께끼를 풀려는 여러 가지 해답이 나와 있다.

먼저 북한의 공식적 입장으로는 “남조선이 북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전쟁을 어디까지나 남한과 미국의 도발에 맞선 ‘방어전’으로 보려는 태도에서 상황을 끼워맞춘 것인데, 이에 따르면 당시 북한은 남쪽의 도발에 전력으로 반격했다. 그런데 의외로 ‘침략자들’의 전력이 허술해 북한군의 반격에 맥없이 밀리기만 했고, 그래서 ‘얼떨결에’ 서울까지 점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뜻밖의 행운’에 당황하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사흘 동안 움직이지 않고 적의 동태를 관망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모로 보나 북한의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전면 공격이 뚜렷한 이상, 이런 설명은 설득력이 없다.

‘후방에서의 역습’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당시 북한군은 전속력으로 수도권을 점령했으나 강원도 전선에서는 진격이 지지부진했다. 동부 지역 국군의 저항을 놔둔 채로 수도권의 북한군이 남진한다면 자칫 등 뒤에서 역습당할 우려가 있었고, 그래서 동부에서도 승리하기를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북한군은 동부에서 국군에게 밀렸다기보다는 수도권 전선에서처럼 있는 힘을 다하지 않고 있었다. 굳이 강원도를 점령하기보다는 그 지역의 국군과 대치하며 수도권으로 구원 병력을 보내지 못하게 막는 모습이었다. 또한 동부가 염려됐다면 수도권 확보가 확실해진 즉시 동부에 전력을 집중했어야 하는데, 서울 점령 뒤에도 별로 그런 모습이 없었다.

상당히 유력한 설명 중 하나는 북한군의 보급에 차질이 빚어졌다는 설이다. 당시 북한군은 최단시간 내에 서울을 점령하느라 탱크와 야포 지원 병력 외에 보병은 최대한 경무장시켜 기동력을 극대화했다. 그래서 한강 등을 건널 도하(渡河) 장비를 비롯한 보급물자는 뒤이어 도착하기로 돼 있었고, 특히 소련에서 중국으로, 다시 북한으로 상당수 물자가 릴레이되도록 계획돼 있었다. 그러나 중국에서 북한으로 물자가 넘어오는 과정에서 손발이 맞지 않아 예정보다 일정이 지연됐고, 특히 도하 장비가 늦게야 서울에 도착했다. 그러므로 북한군은 사흘 동안 한강을 건너 진격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는 설명이다.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 설명이며, 한강철교 폭파로 북한군이 도하에 어려움을 겪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결국 북한군은 딱히 도하 장비에 의존하지 않고도 7월1일 이후 한강을 넘어서 남진했다. 어떻게 해서든 남진하려고 총력을 기울였다면 사흘씩이나 지체할 이유는 없었던 셈이다.

한국전쟁 개전 직후 파죽지세로 서울 함락에 성공한 북한군은 이후 사흘간 진격을 멈췄다. 북한군의 이유 없는 지체는 한국전쟁이 남긴 최대 수수께끼 가운데 하나다. 한겨레 자료

한국전쟁 개전 직후 파죽지세로 서울 함락에 성공한 북한군은 이후 사흘간 진격을 멈췄다. 북한군의 이유 없는 지체는 한국전쟁이 남긴 최대 수수께끼 가운데 하나다. 한겨레 자료

서울 볼모 삼아 적화통일하는 게 목표였을까

그런데 북한군의 사흘 지체가 그런 계획상 차질 때문만이 아니라, 애초에 정한 북한의 전쟁 목표 때문이라는 설도 유력하다. 당시 북한군이었다가 전쟁포로를 거쳐 남한에 남게 된 병사들은 상관들로부터 “우리는 ‘해방 전쟁’을 수행하되 일주일 동안 서울을 해방시킬 것이다. 남조선의 심장인 서울을 장악하면 곧 남조선 전체를 장악하게 된다. 남조선 국회를 소집해 대통령을 새로 뽑은 다음 통일협약을 비준토록 하면 어느 나라도 우리의 통일을 부정하고 간섭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설명을 들었다고 증언한다. 다시 말해서 북한은 본래 남한 전체를 장악하지 않고 수도권 점령으로 전쟁을 마치려 했다는 것이다. 북한이 동부전선에서는 전투에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사실, 보급 물자 조달에 소홀했다는 사실, 당시 북한군 부대에 지급된 남한 지도가 평택까지만 표시됐다는 사실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과연 병사들의 증언대로 북한이 ‘새로운 남조선 정부를 세운 다음 합법적 통일을 달성’하려는 시나리오대로 움직였을까 하는 점에는 다소 의문이 든다. 포로가 된 남한의 각료나 국회의원이 북한이 바라는 대로 움직였을까 하는 문제도 있지만, 그들이 동의한다고 해서 ‘합법적’인 대한민국의 해체와 통일이 뚝딱 이루어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결국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선거로 새 정부를 구성하고 다시 투표로 통일 여부를 결정하는 과정이 필요했을 텐데, 이는 서울만 장악한 상태로는 어려운 일이다. 억지로 ‘합법적 통일’을 주장해봤자 남쪽으로 피신해 있던 이승만이나 미국이 인정할 리 없었다.

북한군이 수도권 장악만을 본래 목표로 삼았다는 가설을 깨트리지 않으면서 새로운 가설을 덧붙인다면, 남한 고위 정치인과 서울 시민을 볼모로 삼은 상태에서 미국과 협상해 북한에 최대한 유리한 조건을 얻어내려 했으리라는 것이다. 유리한 조건이란 무엇일까? 우선 북한 정부의 승인이다.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유엔에 의해 ‘한반도 남부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받았던 반면, 북한은 그렇지 못했다. 따라서 정통성에서 남한보다 뒤지는 처지를 만회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임진강 서쪽 지역, 즉 옹진반도와 개성 일원 등 당시 38선 경계상 남한에 속하던 지역을 사실상 할양받는 것이다. 이 지역은 북한의 남침에 유리한 한편 남쪽에서 북쪽으로 치고 올라가기에도 유리하므로, 김일성으로서는 어떻게든 손에 넣고 싶었던 지역이다. 수도권에 집중된 북한군의 공세가 둘로 나뉘어 전개되며, 서울보다 먼저 이 지역을 장악하는 쪽으로 움직인 것을 봐도 짐작할 수 있다.

미국의 승인으로 부족한 정통성을 보충하고, 전략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다. 그리고 패전으로 권위가 추락한 이승만 정부를 지속적으로 흔든다면 조만간 남한에서 혁명이 일어나 자연스럽게 한반도 적화를 달성할 수 있다. 김일성의 머릿속에는 이런 계산이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일이 이런 식으로 풀리지는 않았다. 이승만과 미국, 그리고 남한 국민의 항전 의지가 예상보다 훨씬 강력했기 때문이다. 북한군이 서울에서 사흘을 머무는 사이에 미국은 소련의 불참 속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한국전 개입 결의를 이끌어내고, 유엔군 결성보다 한 걸음 앞서서 미군을 한반도에 들여보냈다. 김일성은 일생일대의 승부에서 통일을 달성하기는커녕 하마터면 파멸할 뻔했고, 이후 동족을 살육한 원흉이라는 멍에를 길이 지고 가게 되었다.

1951년 1월5일 서울을 등진 채 남쪽으로 향하고 있는 1·4후퇴 피난민 행렬. 연합뉴스

1951년 1월5일 서울을 등진 채 남쪽으로 향하고 있는 1·4후퇴 피난민 행렬. 연합뉴스

국내외 정치적 입지 계산해 전쟁 뛰어든 미국

만약 김일성이 다르게 판단했다면, 북한군이 쉬지 않고 남쪽으로 진격하도록 명령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3∼4일 내로 부산까지 북한의 손에 들어가고, 발 디딜 곳을 잃은 미군이 개입을 망설이는 사이에 적어도 7월 중순 이전까지는 한반도 전역이 평양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리라는 데 거의 모든 학자의 의견이 일치한다.

문제는 그 이후다. 만약 북한이 남한의 무력 점령을 기정사실화하고 순조롭게 ‘공산 통일한국’을 건설해나가는 동안 미국은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보고 있었을까?

애초에 미국이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는 근거는 많다. 김일성과 스탈린의 전쟁 결심을 굳혀주었다는 유명한 사건, 즉 1950년 1월12일의 ‘애치슨 라인’ 발표에서 한반도가 미국의 주된 방위 지역에서 제외됐고, 1950년 초 남침이 있을지 모른다는 보고가 여기저기서 들어왔는데도 미국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여러 기록과 증언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에도 백악관의 우선 관심사는 이 틈을 노려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지는 않을까 하는 데 쏠려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당시 미국은 남한의 몰락을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당시 소련은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등에서 잇달아 공산정권을 세우며 ‘영토 확장’에 성공하고 있었다. 아시아에서는 중국 공산화에 이어 대만이 침공 위기에 직면했을 뿐 아니라 필리핀에서도 공산 반란이 일어났다. 미국이 과연 ‘세계 공산혁명’을 막아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되던 때였다. 그런 상황에서 유엔이 합법 정부로 인정했고 미국이 후원해온 나라가 무력으로 정복되는 일을 용인한다면, 공산주의는 ‘도미노’처럼 차례차례 자유 진영 국가를 무너뜨리며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될지 몰랐다.

미국의 국내 정치 문제도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연방정부는 최대한 부풀렸던 군과 국방 예산 규모를 3분의 2가량 축소했다. 이를 불만스레 여긴 국방부와 군수업체, 대외 강경파 정치인들은 다시 군비 증강을 할 명분이 생기게끔 “어디서든 전쟁이 하나 터져주기만” 학수고대하던 참이었다. 또한 조지프 매카시와 더글러스 맥아더를 비롯한 반공주의자들은 한국전쟁을 사전에 막지 못한 이유가 “정부 내 빨갱이들과 우유부단한 트루먼 때문”이라고 비난과 선동을 일삼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뭔가 하지 않으면, 미국 민주당과 온건파의 정치적 입지도 위험해질 것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위험이 없는 한 한반도 적화통일을 두고 보지 않았을 것이다.

북한과 합작으로 한국전쟁이라는 작품을 만들기는 했지만, 스탈린은 김일성을 위해 미국과 정면 대결할 마음은 없었다. ‘한반도 남부의 유일 합법 정부’라는 대한민국의 정통성도 걸림돌이었다. 유엔이 정통성을 인정한 정부가 침략전쟁으로 소멸한다면 유엔의 존재 가치가 의문시될 수밖에 없다. 미국이 유엔의 승인 절차를 포기하고 한반도에 직접 개입한다면, 유엔은 국제연맹처럼 유명무실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소련이 애써 확보한 안보리 상임이사국 지위는 물론 신생 유엔 회원국 다수가 친소 성향이라는 유리함도 포기해야 했다. 안보리에서 한반도 관련 결정이 이루어질 때 소련이 중국 가입 문제를 들어 내내 불참한 배경에는 이런 고충이 있었을 수 있다. 북한을 대놓고 후원할 수도 없고, 제재에 동참할 수도 없었기에. 북한군이 서울에서 머물며 한반도 남부를 석권할 기회를 흘려보낸 까닭도 이런 정치적 고려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더 큰 죽음과 파괴 불렀을 수도

그러므로 만약 김일성이 이런 곤란함을 무릅쓰고 한반도 전체 점령을 강행했다면, 조만간 미군의 대대적인 공격에 직면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 역사와 달리 거점이 없는 상태의 공격이므로, 먼저 평양과 서울 등을 항공력으로 초토화한 뒤 상륙작전을 감행하는 식이었으리라. 항공력은 제2차 세계대전 때와 같은 무차별 융단폭격, 또는 핵이었으리라.

결국 어떤 이유에서든 북한군이 서울에서 사흘을 지체함으로써, 한반도는 더 큰 죽음과 파괴의 악몽에서 놓여날 수 있었다.

함규진 성균관대 국가경영전략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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