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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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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구제금융 대신 모라토리엄 선언했다면



1997~98년 IMF의 요구를 따르지 않은 말레이시아·러시아의 선전…

차라리 ‘IMF 폐해’보다 덜 해악적이었을 것이란 분석도
등록 2010-11-04 11:37 수정 2020-05-03 04:26

30대 이상의 배구팬에게 1998년의 기억은 각별하다. 그해 2월18일 서울 잠실학생체육관에서 역사적인 경기가 열렸다. 모기업의 부도로 팀 해체가 결정된 고려증권의 마지막 공식 경기였다. 대한배구협회의 지원으로 출전한 슈퍼리그 3차 대회 4강 진출전에서 고려증권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지만, 경기 결과는 세트스코어 0-3의 패배.
라이벌 현대자동차와 함께 1980~90년대 남자배구의 양대 산맥으로 군림해온 고려증권의 강점은 끈끈한 조직력이었다. 선수 개개인의 이름값을 따지면 고려증권은 현대자동차의 상대가 아니었다. 하종화·임도헌·마낙길 등 국가대표 공격수가 즐비한 현대자동차와 달리 고려증권에는 박삼용·이수동·문병택·박선출·이성희 등 무명급 선수가 대부분이었다. 이름값 대신 특유의 끈적끈적한 팀워크를 바탕으로 경기를 풀어가는 고려증권과 막강한 화력과 높이를 내세워 상대를 압도하는 현대자동차의 라이벌 구도는 1990년대까지 배구를 최고의 인기 스포츠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한 원동력이었다.

» 1997년 외환위기는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로 이어졌다. 정부는 같은 해 12월3일 IMF로부터 긴급 구제금융 580억3500만달러를 빌리는 대신 IMF의 개혁 프로그램을 받아들이기로 약속했다.한겨레 자료

» 1997년 외환위기는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로 이어졌다. 정부는 같은 해 12월3일 IMF로부터 긴급 구제금융 580억3500만달러를 빌리는 대신 IMF의 개혁 프로그램을 받아들이기로 약속했다.한겨레 자료

 

김영삼 정부의 무능한 대응

1998년 이후 고려증권 배구를 다시 볼 수 없게 한 건 이른바 ‘국제통화기금(IMF) 사태’였다. 정확히 말하면 1997년 경제위기 탓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경제위기를 가리키는 대명사로 통하는 IMF 사태는 시작과 동시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금융계의 구조조정과 퇴출은 IMF 사태가 남긴 그늘의 단면이었다. 고려증권·동서증권 등 이제는 이름마저 거의 잊혀진 증권사와 많은 종금사가 당시 문을 닫았다.

IMF의 해, 1997년은 시작부터 암울했다. 1월23일 22개 계열사를 거느린 한보철강이 마침내 부도와 함께 거꾸러졌다. 한보가 금융권에 갚아야 할 빚만 모두 4조9천억원이었다. 한보에 돈을 빌려준 금융기관이 50곳을 넘었다. 한보에 이어 3월19일 삼미그룹이 부도를 냈고, 4월21일에는 진로그룹이 뒤를 따랐다.

대기업의 연쇄 부도와 이에 따른 대외 신인도 하락, 환율 상승과 주가 하락은 ‘아시아의 용’이라던 한국의 위상을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세계화’를 지고지선의 가치로 선전한 김영삼 정부는 성급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과 월드컵 유치,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유치 등 대규모 이벤트에만 능했을 뿐 위기에는 취약했다.

정부는 결국 1997년 11월21일 한국은행의 외환보유고로는 더 이상 대외지급이 불가능하다는 최종 판단을 내리고 IMF에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12월3일 정부는 IMF로부터 긴급 구제금융 580억3500만달러를 차입하는 약정서에 서명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지만, IMF 구제금융의 대가는 가혹했다. IMF는 국내 기업의 도산이나 실업률 증가, 그리고 이에 따른 한국 국민의 고통에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대신 그들은 한국 경제의 불안이 세계경제에 미치는 부작용을 차단하는 데 관심을 뒀다.

IMF가 한국에 요구한 개혁 프로그램의 주요 내용은 △긴축재정 및 성장목표의 하향 조정(성장 3%, 물가 5%) △기업 및 금융기관 부실의 처리(구조조정 등) △13개 금융개혁법안의 입법 △대기업 체질 개선(투명성 제고, 계열사 간 연결고리 차단) △노동시장 유연성 제고 대책의 조속 추진 △외국인 주식투자 한도 확대(26%→50%→55%)를 비롯한 자본시장 개방 등이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IMF 합의 직후 펴낸 <imf>에서 “IMF는 한국의 기초 경제 여건이 멕시코나 인도네시아, 태국 등에 비해 상당히 양호함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에 같은 정도의 긴축과 구조조정을 요구”했다며 “IMF와 합의한 정책 프로그램은 금리의 급등과 고용불안을 가중시켜 경기를 지나치게 냉각(Over-kill)시킬 것으로 우려”한다고 주장했다. 우려는 이듬해 곧바로 실물경제 침체의 결과로 나타났다.
우선 정부가 허리띠를 졸라매자 내수가 위축됐다. 1997년 12월 이후 이듬해 5월 말까지 1만5천 개 이상의 기업이 부도를 냈고, 가까스로 부도 위험을 피한 기업의 조업률도 60% 이하로 떨어졌다. 기업이 위축되자 일자리가 줄었다. IMF 직후 실업자 규모는 150만 명으로 6.9%의 실업률을 기록했고 그 뒤로도 계속 상승했다. 그나마 얻은 직장에서도 정리해고를 걱정해야 하는 것이 1997년 이후의 풍경이었다.
일자리 감소와 함께 비정규직 등 ‘나쁜 일자리’의 증가도 IMF의 유산이었다. 은수미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저서 <imf>에서 “나쁜 일자리는 비정규직 일자리와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는데, 1997년 IMF 경제위기 이후 급격하게 늘어나 2008년 기준 과반수를 넘긴 비정규직은 한국 사회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 새로운 계급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지적했다.
 
모라토리엄은 검토도 하지 않아
IMF에서 구제금융을 받는 것이 최선이었을까? 1997년의 외환위기가 심각했다지만, IMF가 한국 사회에 남긴 깊은 상처를 돌이켜보면 이런 의문이 생긴다. IMF의 굴욕적인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외환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을까?
실제로 한국과 비슷한 시기에 외환위기를 겪은 나라 가운데 우리와 다른 길을 선택한 사례가 없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말레이시아 모델이 있다. 말레이시아는 한국과 비슷한 시기인 1997~98년 외환위기를 겪었지만, 사태 해결을 위한 접근 방법이 달랐다. 말레이시아는 당시 외환위기를 해외 투기자본의 일시적 시장교란 행위로 간주했다. 따라서 한국과 달리 무턱대고 IMF와 손잡기보다 내부시장 보호에 힘을 기울였다. 위기가 본격화한 뒤에는 외환 유출을 엄격하게 통제하는 것은 물론 외국에 나가 있는 자국 통화를 회수하며 고정환율제를 채택했다.
국내 생산을 촉진하기 위해 정부 지출을 늘린 것도 한국과 정반대였다. 말레이시아 정부의 이런 대응에 IMF는 코웃음을 쳤지만, 말레이시아는 한국과 함께 외환위기에서 가장 빨리 벗어난 국가로 꼽힌다. 다만 IMF 이후 한국이 부동산 가격 폭등과 엄청난 공적자금 투입의 후유증을 겪고 있는 것과 달리, 말레이시아는 부동산 가격이 오르지도 않았고 물가도 크게 요동치지 않았다.
러시아의 사례도 되짚어볼 만하다. 한국이 외환위기를 경험한 직후인 1998년 역시 외환위기로 어려움에 빠져 있던 러시아는 일방적인 채무지급유예(모라토리엄)를 선언했다. 당시 유가 하락으로 수출소득 및 세수 감소에 직면한 러시아는 1998년 8월부터 3개월 동안 외채 상환을 일방적으로 중단했다. 당시 국제사회는 러시아의 모라토리엄 선언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지만, 러시아에 어떤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방적인 지급정지를 통해 러시아는 큰 이득을 얻었다. 채권국으로부터 채무의 30%를 탕감받은 것이다.
물론 과거 초강대국이자 핵무기를 보유한 나라라는 ‘힘의 논리’가 러시아의 당당한 대응을 가능케 한 측면이 있지만, 일반 사회의 채무관계에서도 궁지에 몰린 채무자가 종종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하는 경우가 있다. 어쨌든 러시아는 도전적 태도로 오히려 이득을 얻었다. IMF는 러시아의 채무지급정지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러시아에 차관을 제공할 수밖에 없었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한국에서도 모라토리엄을 선언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국내외 학계 일각의 주장이었는데, 한국 정부나 주류 경제학자는 이를 진지하게 검토하지 않았다.
모라토리엄을 선언해야 한다는 쪽에서는 대개 IMF 사태의 근본 원인이 IMF나 국제 투기자본의 횡포에 있다고 봤다. IMF가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외환위기에 그릇된 방식으로 과도하게 개입해 단기 유동성 부족의 위기를 확대재생산했고, 국제적인 투기자본의 횡포로 각국의 외환위기가 구조화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반면 한국 정부는 위기의 원인을 우리 내부에서 찾는 이른바 ‘내부 결함론’에 무게를 뒀다. 내부 결함론을 주장한 대표적 인물은 폴 크루그먼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였다. 그는 한국 등 동아시아 국가가 채택한 경제발전 모델의 내재적 결함으로 이들의 위기는 이미 예정돼 있었다고 주장했다.

» 1990년대까지 남자배구 무대를 지배했던 고려증권 배구팀은 IMF 사태 직후 모기업의 부도로 해체되고 말았다.한겨레 자료

» 1990년대까지 남자배구 무대를 지배했던 고려증권 배구팀은 IMF 사태 직후 모기업의 부도로 해체되고 말았다.한겨레 자료

 
미국 유학파가 득세한 탓?
한국 정부나 주류 학계가 사태의 원인을 다각도로 검토하지 않고 무작정 ‘내 탓이오’를 외쳤던 이유는 ‘IMF 비판론’이나 ‘외부 조건론’이 곧 ‘미국 음모론’과 맞닿을 수 있다는 사실에 공포를 느낀 탓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이찬근 인천대 교수는 한국 사회의 편파적 대응의 원인이 “미국 유학파 중심의 학계 편성, 서울대 출신의 논의 독점 구조 등 우리 학계에 뿌리박힌 사회병리학적 측면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고 지적했다(<imf>, 1998).
한국이 모라토리엄 선언을 검토해야 한다는 주장은 오히려 외국에서 활발히 제기됐다. 대표적인 인물은 제임스 크로티 미국 매사추세츠대 교수였다. 그는 IMF 사태 이듬해인 1998년 ‘한국의 경제적·정치적 위기’라는 제목의 글에서 한국이 오히려 모라토리엄 가능성 등을 고려하지 않은 채 IMF의 요구조건을 거의 그대로 수용한 사실에 의문을 제기했다. “한국이 IMF의 극단적인 요구조건들에 굴복하기를 거부하는 경우 한국만이 아니라 한국 사태에 관계가 있는 당사자들 모두가 손해를 볼 것이라는 극히 유리한 지점을 한국 정부가 활용하지 않은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는 더 나아가 한국 정부가 사태를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었다면 미국이나 IMF에 확실한 위협을 가해야 했다고 지적했다. “IMF가 강요하는 요구조건이 지나치게 파괴적일 경우 한국은 IMF의 구제금융을 받지 않고 말겠다는 위협을 했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 정부가 한국의 은행과 기업들이 해외 은행에서 빌린 채무에 대해 채무불이행을 선언하도록 내버려두겠다는 위협을 가했다고 가정해보자. (이런 위협은 사실 특별히 무슨 조치를 취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손 놓고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런 행동은 해외 채권자들과 한국인 채무자들 사이의 교섭을 둘러싼 ‘교섭 여건’을 극적으로 변경시켰을 것이다.”
김창근 경상대 사회과학연구원 연구교수의 시각도 비슷하다. 그는 지난 10월27일 과의 인터뷰에서 “모라토리엄이 정부가 국가채무의 지급유예를 선언하는 것이라면, 1997년 당시 한국의 부채는 대부분 민간 부문에서 발생한 것이므로 정부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고 말 것도 없었다”며 “정부가 민간기업의 부채는 민간에 맡긴다는 정도의 태도를 한두 달만이라도 유지했다면, 그 뒤 IMF와 훨씬 유리한 협상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다음으로 생각해봐야 할 부분은 ‘모라토리엄 선언 그 이후’다. IMF와의 협상이 비록 말도 안 되는 내용투성이였지만, 당시에는 IMF 구제금융 이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주장이 있다. 조복현 한밭대 교수는 “한국처럼 대외 의존도가 높은 수출 주도형 국가에는 모라토리엄 선언이 큰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며 “러시아 등 천연자원이 풍부한 나라와 직접적인 비교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크로티 교수는 채무불이행 선언이 한국에 심각한 위험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장기적 관점에서 봤을 때 IMF 프로그램이 가져오는 폐해보다는 훨씬 덜 해악적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예컨대 증시에 묶여 있던 해외 자금이 유출되거나 원유 등 핵심 수입품에 대해 무역 신용을 잃게 된다는 부작용이 예상되지만, 이에 대해서는 정부가 다른 대안을 마련할 수 있었다는 지적이다.
좀더 유리한 협상도 가능했을 것
김창근 교수 역시 “모라토리엄 선언이 우리 경제에 더 큰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지적이 있지만, 이미 당시 주가가 300선까지 내려앉은 상황이어서 민간기업 부채를 그들에게 맡겨놓았다 해도 한국이 추가로 입을 피해가 생각만큼 많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국이 1997년 당시 ‘모라토리엄 선언을 검토했어야 한다’는 주장이 곧장 ‘IMF 구제금융을 받지 말았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크로티 교수 등도 이를 주장하려 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한국이 모라토리엄 등 다양한 협상 전략을 구사했다면 IMF와 좀더 유리한 협상을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물론 그랬다면 ‘IMF 신탁통치’라는 말도 나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imf></imf></im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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