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는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나? 미국의 시대는 저물고 중국의 부상 속도가 너무 빨라지고 있음을, 그래서 세계 질서의 지각변동이 이미 시작됐음을 알게 됐다. 그것이 성과 아니겠는가. 그리고 G20은 우리에게 국가의 품격을 성찰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성을 쌓고 감을 철사에 매다는 것보다는 오히려 ‘성공한 민주화 모델’을 그대로 보여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3360억원 흑자 뒤에 드리운 그림자
더욱 중요한 것은 ‘발전 이데올로기’의 위력이다. 국제 행사를 치르면,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올라가고, 경제효과도 엄청나고, 시민의식도 세계화된다는 믿음, 과연 그럴까? 그런 믿음의 근거에는 1988년 서울올림픽의 경험이 있다. 이른바 88올림픽은 특정 도로와 건물의 이름으로 여전히 우리 주위에 남아 있다. 그리고 ‘국운’이 벌떡 일어난 성공의 신화로 기억되고 재생된다. ‘스포츠 메가 이벤트’의 전설로 남아, 한국의 모든 지방자치단체가 올림픽이든, 아시안게임이든, 아니면 종목별 세계대회라도 유치하려 목매달고 열을 올리는 근거이기도 하다. 88올림픽을 다시 생각한다. 만약 1988년에 서울올림픽을 개최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스포츠는 열광의 무대다. 국가 대항전이야 오죽하겠는가. 1936년 베를린올림픽이 히틀러의 선전도구로 활용됐듯, 열광의 출구는 언제나 애국주의로 향한다. 서울올림픽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서울올림픽을 유치하기로 결정한 것은 박정희 정부 때인 1979년 9월19일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그해 10월 김재규의 총탄에 저 세상으로 갔다. 그리고 전두환 군사정권이 등장했다.
올림픽 유치는 쿠데타 정부의 부족한 정당성을 보완할 수 있는 매력적인 카드였다. 전두환 정부는 올림픽 유치 결정을 재확인하고, 마침내 1981년 9월30일 독일 바덴바덴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일본의 나고야를 52 대 27로 누르는 기적을 연출했다.
서울올림픽 유치는 제5공화국의 국정 운영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7년 뒤 올림픽을 개최하려면 국내 정치의 안정과 한반도의 긴장 완화가 필요했다. 또한 올림픽은 분출하는 민주화 열기를 무조건 탄압하기 어려운 환경으로 작용했고, 동시에 북방정책 추진의 직접적 계기가 됐다.
당시 정부 내부와 서울시 모두가 올림픽 유치에 찬성하지는 않았다. 올림픽 유치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남덕우 당시 총리만 하더라도 대표적인 ‘올림픽 망국론자’였다. 경제효과가 불분명하다는 논리를 바탕으로 올림픽이 나라 살림을 거덜낼 수 있다고 경고했다. 올림픽 유치에 성공한 뒤, 전두환 정부가 ‘분수에 맞는 올림픽 준비’를 강조하고, ‘흑자 올림픽’ 방안을 고민한 데에는 이런 우려가 작용했다.
예를 들어 서머타임제를 부활한 이유도 중계권료 때문이었다. 서머타임제는 1961년 5월 폐지됐다가 올림픽 유치를 계기로 대통령령으로 1987년 4월부터 1988년 10월11일까지 실시됐다. 진짜 목적은 88올림픽의 TV 위성중계 시간, 특히 1시간이라도 미국의 편의에 맞추려는 것이었다.
과연 서울올림픽은 흑자 올림픽이었을까?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연구를 바탕으로 올림픽조직위원회가 작성한 공식 자료에 따르면, 최종적으로 3360억원의 흑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물론 이 통계에는 올림픽 대회를 위한 경기장 건설 등 정부 부담액은 포함시키지 않았다.
올림픽의 경제효과를 구체적인 통계로 평가하긴 어렵다. 무형의 경제적 파급효과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올림픽 유치를 계기로 무역·외환거래·자본시장을 초보적이지만 개방했고, 중국·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의 올림픽 참여로 북방 경제협력의 기반도 마련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성공 신화에 가려진 그늘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바로 강제 퇴거의 아픈 상처다. 판자촌과 서울의 빈민은 ‘초대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도시 정비’라는 명분으로 삶의 터전을 잃어야 했다. 물론 서울올림픽만 그런 것은 아니다. 올림픽의 역사는 강제 퇴거의 역사고, 도시 빈민에 대한 가혹한 폭력의 역사다.
1992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몬주익 지역의 로마계 주민들이, 1996년 미국 애틀랜타올림픽에서는 공공주택단지의 빈민들이, 2000년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2004년 그리스 아테네, 그리고 2008년 중국 베이징에서도 도시 빈민은 손님맞이를 위해 그들의 주거지를 양보해야 했다. 그것도 매우 폭력적인 방법으로 말이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철거와 재개발88 서울올림픽은 그런 점에서 한국에서 ‘토건공화국’ 수립의 직접적 무대였다. 건설사를 가진 재벌들이 올림픽 유치에 그토록 매달린 진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울에서 1982년 말까지 재개발 실적은 22개 지구(9만6386㎡)에 불과했다. 1983년부터 이른바 합동 재개발사업의 이름으로 ‘전면 철거 후 주거지 개발’이라는 새로운 재개발사업이 시행됐다. 이때부터 1988년 올림픽 때까지 93개 지구(42만6490㎡) 사업이 추진됐다. 대략 72만 명이 서울을 떴다. 그리고 4만8천 개의 건물이 파괴됐다. 문제는 이 거주자들의 90%가 새로 살 집을 제공받지 못한 상태에서 강제 퇴거를 겪었다는 점이다.
서울 사당동에서, 목동에서, 그리고 상계동에서 무차별적인 철거 폭력이 행사됐다. 김포공항에서 강동 올림픽촌까지 강변도로에서 보이는 불량주택들이 철거됐고, 비행 항로인 신림동이나 봉천동의 빈민촌도 비행기에서 보인다는 이유로 철거됐다. 도시 정비라는 재개발의 명분 뒤에는 싼값에 고급 아파트를 지어 정부가 돈을 벌고, 이것을 올림픽 재원으로 쓰겠다는 정부 주도의 부동산 투기사업이 자리잡고 있었다. 도시 빈민촌을 대상으로 시행된 도시 재개발사업은 결국 민간 건설사와 정부에 막대한 수익을 안겨주었다.
올림픽이 없었다면 무자비한 강제 철거가 대규모로 그렇게 신속하게 이루어졌을까? 아무리 독재정권이라도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올림픽은 강제 철거의 면허증과 같았다. 도시 빈민의 눈물은 손님맞이라는 명분과 애국주의 열풍 속에서 감춰질 수 있었다. 도시의 그늘에는 무대의 조명이 비껴갔다. 그런 고약한 손님맞이 풍습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민주화의 불길이 타오른 1987년 서울은 뜨거웠다. 1987년 6월 항쟁과 한국의 민주화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올림픽이라는 변수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민주화에 대한 정권의 대응 방식은 올림픽 유치가 가져온 의도하지 않은 결과였다. 올림픽이라는 변수가 없었다면, 한국의 민주화는 지연됐거나 더 많은 희생을 치렀을 것이다.
당시 군부독재 정권에 대한 국제사회의 거부감이 컸다. 지금 우리가 버마(미얀마) 군부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버마에서 올림픽을 한다고 하면 과연 참여할 수 있겠는가? 인권을 중시하는 나라라면 어디나 인권 개선을 요구하며 압력을 행사할 것이다. 1980년대 초 한국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국제사회 일각에서는 한국의 인권 상황을 이유로 서울올림픽에 불참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가장 주목할 변수는 미국이었다. 민주당의 대선 후보 반열에 올라 있던 제시 잭슨 목사는 실제로 1987년 6월 워싱턴 주재 한국대사에게 “한국이 인권 상황을 개선하지 않으면 미국 정부에 보이콧을 요구할 것”이라고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국제사회 눈치 본 군부독재의 양보
억눌려 있던 민주화 열망으로 타오르던 6월의 거리, 올림픽을 한 해 앞둔 국제사회는 전두환 정부가 어떻게 대응할지를 주목했다. 만약 정부가 강경 대응해 시민의 희생이 커지고 시위의 불길이 더욱 거세게 타오른다면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기 어려웠다. 국제사회가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전두환 대통령은 직선제 개헌을 받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6·29 선언을 수용했다. 6·29 선언 전날 전두환 대통령은 “정권 유지보다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올림픽 유치는 한국의 민주화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올림픽이라는 변수가 없었다면 과연 군부독재 정권이 기득권을 그 정도로 양보했겠는가?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올림픽은 한국 외교가 질적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한국 외교는 88올림픽 이전과 이후로 구분할 수 있을 정도다. 그 중심에 북방정책이 있다. 올림픽이 개최되지 않았다면 북방정책을 추진했겠는가? 북방정책은 사회주의권과의 관계 개선을 목적으로 했다. 노태우 정부 들어 소련·중국과의 수교에서 비롯한 성과가 나타났지만, 북방정책은 전두환 정부 때 개념이 만들어졌고, 그 직접적 계기는 88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이다.
1980년대 초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오고, ‘신냉전’이라고 부를 만큼 미소 양국의 긴장이 높아졌다. 올림픽도 냉전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갔다.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은 서방 국가들이 참여하지 않았고, 1984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 역시 사회주의권 국가들이 참여하지 않았다. 두 번이나 반쪽으로 열린 것이다.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반드시 사회주의권을 참여시켜야 한다. 그래서 북방정책을 추진한 것이다.
또한 사회주의권을 설득하자면 남북관계 개선이 반드시 필요했다. 당시의 냉전 상황에서 북한과 관계를 개선하지 않고 사회주의권에 접근하기는 어려웠다. 전두환 정부가 1983년 아웅산 테러를 당하고도, 1984년 북한이 보내는 수해물자를 받고, 1985년 남북 경제회담을 하고,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이산가족 고향방문단을 교환하며 정상회담까지 추진하려던 이유의 핵심에 88올림픽이 있었다.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려면 한반도 정세의 안정도 중요했다. 당시 상황에서 국제사회에 비친 한국은 분단국가이고, 군사적 대립이 있으며, 북한의 테러 위협이 있는 나라다.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나라에 누가 오겠는가. 참가국을 안심시키려면 한반도 정세를 안정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전두환 정부의 노력에도 남북관계는 질적으로 전환되지 못했다. 1987년에는 대한항공 폭파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올림픽 때문에라도 한반도 정세를 안정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강한 목적의식이 결국 전두환 정부에서 시작해 노태우 정부 때 꽃피운 남북대화의 추진 동력이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모든 역사적 평가가 그러하듯 88올림픽에도 공과 과가 있다. 서울은 달라졌다. 한국의 위상도 그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 올림픽이 준 선물, 민주화와 북방정책의 의미도 소중하다. 그러나 환호의 뒤편에는 눈물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쫓겨난 사람들의 탄식과 절망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국가는 도약했지만, 얻은 자와 잃은 자의 희비를 가려야 할 것이다. 가장 많이 얻은 사람들은 이른바 ‘한국의 토건족’이다. 토건공화국의 일그러진 성공 신화는 이후에도 오랫동안, 아니 지금까지도 작동하고 있다.
눈물을 흘린 것은 가난한 사람뿐만이 아니다. 불도저식 밀어붙이기에서 환경도 눈물을 흘렸다. ‘한강의 기적’이라고 했는가? 88올림픽 때문에 한강은 거대한 시멘트에 점령당했다. 산책로가 나고 체육공원을 만들어 당장 좋아 보일 수는 있다. 그러나 백사장과 자연습지가 사라졌으며, 스스로 정화할 수 있는 생태계는 파괴됐다. 먼 훗날 한강을 시멘트의 독에서 다시 해방시켜주어야 할 것이다.
일사불란함 대신 다양성의 조화를 보여주자
국제적인 메가 이벤트는 단기적인 도시 개발의 수단이다. 그러나 현재는 더 이상 산업화의 시기가 아니다. 탈산업화 시기에 오히려 느리게 사는 법이 새로운 발전 모델로 공감을 얻고 있다. 시대가 달라졌는데 아직도 ‘쌍팔년도식’ 철학을 밀어붙이는 것은 곤란하다. 스포츠 메가 이벤트를 준비하는 한국의 지방자치단체들도 무엇을 보여줄지 고민해야 한다. 일사불란함이 아니라 다양성의 조화를 보여줘야 한다. 그리고 도시의 품격은 건물의 크기가 아니라 문화의 깊이에서 우러나옴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G20에서 목격한 ‘교양 없는 손님맞이 풍경’을 이 땅에서 반복하지 않기를 바란다.
김연철 인제대 교수·통일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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