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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OTL] ‘원정화’ 탈북자 토끼몰이?


안보강연·대북사업·결혼정보업체 등록 등이 간첩의 증거라는 검찰 앞에 무력감 느끼는 탈북자들
등록 2008-09-11 14:14 수정 2020-05-03 04:25

“제2, 제3의 ‘간첩 원정화’가 줄을 이어 기다리고 있다.”
지난 8월27일 수원지검의 ‘간첩 원정화 사건’ 발표 뒤 탈북자 지원단체 관계자들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이다. 이 말은 대한민국에서 암약하는 ‘탈북자 간첩’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 아니다. 현재 탈북자들의 남한 생활은 옛 잣대로 재단할 수 없이 크게 변했는데, 이를 무시하고 경직되게 국가보안법을 적용하면 상당수 탈북자가 ‘간첩’이 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지원단체 관계자들은 특히 “많은 탈북자들이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으며, 안보강연·대북무역 등을 주 수입원으로 삼는 이들도 꽤 있다”며 “검찰이 이를 ‘간첩 행위’로 오판한다면 탈북자들의 자활 의지를 꺾고 이들을 사회보장제도에만 의지하는 최빈곤층으로 떨어뜨려 큰 사회적 부담이 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검경, 기무사, 국가정보원 등으로 구성된 합동수사부는 9월4일 원정화씨의 의붓아버지를 구속기소했다고 밝혔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압수물품으로 조선노동당 당원증 등이 제시됐다. 한겨레 김진수 기자

검경, 기무사, 국가정보원 등으로 구성된 합동수사부는 9월4일 원정화씨의 의붓아버지를 구속기소했다고 밝혔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압수물품으로 조선노동당 당원증 등이 제시됐다. 한겨레 김진수 기자

수원지검은 지난 8월 “탈북자로 위장 잠입한 간첩 사건”을 발표하면서 함경북도 청진 출신의 원정화(34)씨가 북한 국가보위부의 지령에 따라 2001년 조선족으로 위장 잠입한 뒤, △2006년 11월 말부터 2007년 5월 말까지 총 52차례에 걸쳐 군부대에서 안보강연 활동을 하면서 북한 CD를 트는 등 북한을 찬양하고 △대북무역을 한다는 구실로 중국 단둥 민경련 부대표로 있는 ‘윗선’과 10여 차례에 걸쳐 접선하고 △결혼정보업체에 등록해 결혼 상대자로 군인을 만나 포섭하려 한 것을 주요한 혐의로 들었다. 수원지검은 또 원씨가 남한 투자가와 함께 원씨의 가족이 운영하는 북한 청진 외화상점에 4만달러를 투자하고 지분 50%를 갖기로 한 것 등에 대해서도 불법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탈북자 지원단체 관계자들은 이런 사실들이 ‘간첩’의 증거라기보다는 “탈북자들의 빈곤한 삶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지금까지 남한에 들어온 탈북자는 약 1만4천여 명이며, 2001년 이후 해마다 1천 명 이상이 들어오고 있다. 올해는 지난 1~6월에만 1748명이 들어왔다. 현재 탈북자들은 정부로부터 정착금 600만원과 주거지원금 1300만원을 받는다. 한때 수천만원의 정착지원금과 함께 직장까지 알선받았던 ‘좋은 시절’도 있었지만, 탈북자 수가 급증하면서 정부의 지원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생활은 변했는데 법 적용은 경직돼

문제는 탈북자들이 정부 지원 없이 ‘자활’할 수 있는 공간이 협소하다는 것이다. 탈북자에 대한 남한 사회의 거부감이 크기 때문이다. 2005년에 입국한 여성 탈북자 김연주(30·가명)씨도 그 거부감을 생생하게 체험한 탈북자 중 한 명이다. 북한에서 미술 교사였던 김씨는 직장을 구하지 못해 생활고에 시달리다, 2006년 어렵사리 복지관 미술강사 자리를 구했다. 복지관에만 탈북자라는 사실을 알렸고 수강생들에게는 밝히지 않았다. 그런데 김씨가 사용하는 말투와 용어로 탈북자임을 알게 된 수강생들은 복지관에 거칠게 항의했고, 수업시간에는 김씨에게 인신공격에 가까운 모욕을 주었다고 한다. “빨갱이에게 배울 수 없다”는 수강생들의 강경한 태도에 그는 결국 강의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탈북자 지원단체 관계자들은 “이런 상황에서 강사료가 20만원 정도인 군 안보강연은 탈북자에게 중요한 소득원이 된다”고 말한다. 한 탈북자 지원단체 관계자는 “많은 탈북자들이 군 안보강사 자리를 얻기 위해 알고 지내는 탈북자 지원단체 간부, 경찰·군 관계자, 국정원 요원들에게 부탁하는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원정화씨도 2006년 9월 탈북자 지원단체 관계자에게 “사업이 망해서 쌀 사먹을 돈도 없다. 먹고살기 힘드니까 도와달라”고 도움을 요청한 뒤 겨우 안보강의를 할 수 있었다. 또 다른 지원단체 관계자는 “원씨가 군 안보강연 도중 북한 CD를 틀었다는 부분도 북한을 ‘찬양’할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안보강사 경쟁률이 높은 상황에서, 강의를 재미있게 해 강사 자리를 계속 유지하는 게 주 목적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원정화씨가 벌였다는 대북사업도 탈북자들의 귀가 솔깃해지는 사업 영역이다. 무엇보다 북한에 가족과 친척이 남아 있고 북한 상황을 잘 알기 때문에 북한 건강식품이나 해산물 등을 들여오는 데 경쟁력이 있다고 본다. 사업을 위해서는 ‘북한 주민’을 접촉할 수밖에 없는데, 통일부에 ‘북한 주민 접촉신청’을 한 뒤 만나면 법률상 아무 문제가 없다. 원정화씨도 통일부에 ‘정선무역’이라는 대북 무역업체를 공식 등록했다. 정부가 규정한 적법한 절차를 충실히 따른 것이다. 2006년에 입국한 탈북자 정민석(41·가명)씨는 “이번 ‘원정화 간첩 사건’은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가능한 대북 무역사업을 탈북자가 했다는 이유로 사시적으로 본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한다. 이번 사건의 여파로 탈북자들이 대북사업에 발을 들여놓기가 더 어려워진다면, 가뜩이나 협소한 탈북자들의 직업선택권이 더욱 크게 축소되는 셈이다.

“생계 걱정에 간첩 의심까지… 힘들다”

군인을 포섭하기 위해 결혼정보업체에 등록했다는 검찰의 주장에 대해서도 탈북자들이 처한 상황을 잘 모르는 데서 나온 오해이거나 왜곡이라는 지적이 많다. 사실 적령기의 탈북자에게 결혼 문제는 큰 고통이다. 한 탈북청소년 대안학교 교사는 “결혼 적령기의 탈북자가 남한 사람들을 만나 결혼에 성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탈북자들에 대한 거부감은 차치하더라도, 탈북자들의 경우 남한 사람들이 배우자를 만날 수 있는 세 가지 주요 경로인 지연, 학연, 직장의 인연에서 모두 배제돼 있기 때문이다. 이 교사는 “여성 탈북자들의 경우 결혼정보업체에 등록하는 것 외에 남한 사람과 결혼할 수 있는 다른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지적한다. 탈북 남성들은 그나마 결혼정보업체 등록도 하지 않는다. 여성 탈북자들과는 달리, 등록해봐야 만나자는 연락조차 거의 없기 때문이다.

원정화씨가 청진 외화상점에 4만달러를 투자한 것도, 최근 탈북자들의 변화를 살펴보면 낯선 일이 아니다. 한 탈북자 지원단체 간사는 “최근 입국한 탈북자들 중 상당수가 돈을 모아 북에 남아 있는 가족에게 송금하는 것으로 안다”고 말한다. 지금 북한 내부가 상당히 시장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 주민들은 시장에 매대(판매대)라도 하나 장만해야 먹고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매대 허가권을 얻는 데 상당한 돈이 든다는 점이다. 이 간사는 “그 돈을 북한 내부에서 마련하기는 매우 어렵다”며 “70년대 남한의 노동자들이 중동에 가서 목돈을 마련해왔듯, 탈북자들이 남한에서 돈을 번 뒤 북한 가족에게 송금해 생계 터전을 마련해주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고 지적한다. 국가보안법 등 현행 법률로 따지면 이것은 당연히 불법이다.

탈북자들은 권위주의 정권 아래서 ‘남한 체제의 우월함’을 드러내는 ‘선전의 도구’로 쓰였다. 이번 ‘원정화 간첩 사건’은 그런 시각이 검찰 내에 여전히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탈북자들의 어려움과 상황 변화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수구적이고 냉전적 잣대’로만 그들을 재단하는 시각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원정화씨와 비슷한 시기에 입국한 이남수(55·가명)씨는 “생계 걱정에 간첩 혐의에 대한 걱정까지 떠안아야 한다면 남한 생활이 더욱 힘들어질 것”이라고 탈북자들이 느끼는 압박감을 호소했다. 한 탈북청소년 대안학교 교사는 “이번 ‘원정화 간첩 사건’이 ‘탈북자들의 인권 문제를 본격 조명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탈북자들도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인권을 누릴 권리가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김보근 기자 한겨레 온라인영문팀 tree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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