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륭전자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에게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이 보내는 편지
▣ 이정희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인권 OTL 30개의 시선 17]
우리 처음 만난 날 기억하세요? 당신들의 컨테이너 앞에는 ‘997’이라는 숫자가 붙어 있었고, 당신들은 오직 998, 999, 1000 세 장의 숫자만 인쇄해놓고 있었습니다. 1천 일을 넘기는 것은 생각하기도 싫은가 보다 여겼습니다.
그날, 우리는 기륭전자 높다란 철문 앞에 자리를 펴고 자장면이며 짬뽕을 시켜다 먹었습니다. 내 것 네 것 없이 젓가락 섞어가며 아줌마 본연의 모습으로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그릇을 비웠습니다. 남편 이야기, 아이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르다, 세상 온갖 일들 다 걱정하는 오지랖 넓은 아줌마들, 저는 ‘하루 조합원’으로 갔다가, 당신들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파견법 하나 제대로 못 만들어서…
서울 구로역 폐쇄회로텔레비전(CCTV) 철탑 위에 올라갔던 윤종희님, 당신이 저를 울렸습니다. 힘든 것이 분명한데도 괜찮다고만 웃는 당신. 힘들어도 힘들다고 말하지 못하는 어머니 마음만 같아 눈물이 솟았습니다. 당신이 싸우는 동안 교통사고로 다친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막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라면서요. 제 막내도 2학년이에요. 그래요, 우리 어머니들은 그렇게 살아왔잖아요. 당신들은 그렇게 1천 일을 넘게 버텨왔잖아요.
참 죄송합니다. 당신들이 단식을 시작했을 때, 아니 그전에 진작 당신들이 겪어온 고통을 나누었어야 하는데, 어쩌나 생각하다 또 잊고 시간을 보냈습니다. 김소연 분회장님, 유흥희님, 두 분의 단식 55일이 되어서야 당신들과 동행했습니다. 뒤늦게도. 더 이상 그대로 있다가는 너무 괴로워 어쩔 수 없게 될 지경까지, 나서지 못했습니다. 그런 주제에, 제가 당신들을 참 괴롭게 했습니다. 교섭 과정에서 회사를 더 설득하지도 못하고, 당신들의 정신을 지켜주지 못하고서는, 회사 쪽이 내놓은 안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도 받자고 당신들을 설득하려 했습니다. 여기서 얼마나 더 하겠느냐고 주저앉히려 했습니다. 1천 일이 되는 동안 당신들이 흘린 눈물을 짐작조차 못하면서, 단식을 그만둘 만한 진전된 교섭 하나 만들지 못하고서, 이러다 사람 죽이겠다고 또 눈물바람을 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당신들은 아름다운 노동의 꿈을 지켜 저를 가르쳤습니다. 돈이 돈을 버는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일하는 사람이 존중받아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비정규직이 아무리 싸워도 정규직이 될 수 없다는 현실의 논리에, 그럼 언제까지나 비정규직으로 일회용품으로 살겠느냐고 맞섰습니다.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해도, 그 꿈을 버릴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당장 그 무엇도 손에 쥐지 못하더라도, 그것은 당신들의 책임이 아닙니다. 당신들이 모자랐기 때문이 아닙니다. 국회가 파견법 하나 제대로 못 만들어, 사업주가 피할 구석은 다 만들어놓고 노동의 권리는 오갈 데 없게 해버렸기 때문입니다. 빈 구멍투성이 파견법 아래, 법원은 당신들의 요청을 냉정히 거절했습니다. 노동청도 나 몰라라 했습니다. 엄격히 금지된 불법파견이었지만 고작 벌금 500만원으로 손을 턴 회사는 고작 한 달 전에야 당신들을 교섭 상대로 인정할 정도였습니다. 말할 자리조차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답답한 현실이 당신들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당신들이 아무리 손을 벌렸어도 국회의원들은 관심 갖겠다고 말만 할 뿐 누구도 제때 나서지 않았습니다.
돈보다 사람을 귀하게 여긴 사람들
당신들은 이미 이겼습니다. 잘못 만든 법으로 숨쉴 자리조차 없었음에도, 비정규직 여성노동의 현실을 날것 그대로 세상에 드러내 보였습니다. 간절함으로 세상을 설득했습니다. 살려달라고.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세상이 움직여 당신들을 지켜보았습니다. 당신들은 돈보다 사람이 귀하게 대접받는 새로운 세상을 여는 첫 사람이 될 것입니다. 기륭전자 비정규직 여성노동자, 당신들을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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