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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OTL] 환갑잔치, 시끌벅적하게 벌여봅시다

등록 2008-07-15 00:00 수정 2020-05-03 04:25

세계인권선언 60년 역사동안 전쟁·독재·가난과 싸워온 한국이여, 약속을 되새기라

▣ 이성훈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정책본부장 salee7080@gmail.com

세계인권선언(이하 선언)이 올해 환갑을 맞이했다. 2008년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6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알다시피 대한민국 초대 헌법은 1948년 7월17일 제정됐고, 대한민국 정부는 8월15일 출범했다. 따라서 1948년 12월10일 파리 유엔총회에서 선언이 채택됐을 때 한국은 생후 4개월의 갓난아기에 불과했다.

동양철학의 계산법에 따르면 환갑(還甲)은 갑(甲)으로 시작하는 10개의 천간과 자(子)로 출발하는 12개의 지지가 순서대로 짝을 지어 한 바퀴 돌아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이러한 회귀는 완성을 의미한다. 이렇듯 선언 60주년은 동양철학의 심오한 해석까지 품고 있지만, 동양의 대표적 국가인 한·중·일 세 나라는 너무나도 조용하다. 잘 몰라서일 수도 있지만, 알면서도 여전히 인권을 부담스럽게 여기는 현상은 아닌지 우려된다.

방한한 반기문 총장 “한국이 부끄럽다”

10년 전인 1998년 유엔은 미국과 유럽으로 대표되는 서방세계와 더불어 선언 50주년의 의미를 되새기는 다양한 행사를 개최한 바 있다. 특히 그해 12월9일 유엔총회는 선언을 현장에서 실현하고자 애쓰는 인권활동가를 보호하고 격려하기 위해 ‘인권옹호자 선언’을 채택함으로써 50주년의 역사적 의미를 부각시켰다. 동아시아 출신인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60주년의 동양적 의미를 의식해서인지 1997년 12월10일 타이 방콕에서 열린 선언 59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해 60주년 캠페인 출범 메시지를 발표했다. 그러나 한 해의 반이 지나가는데도 한·중·일을 비롯한 아시아의 대다수 국가들은 선언 60주년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방한한 반 총장은 지난 7월6일 안경환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을 만났다. 세계에서 가장 바쁜 사람으로 알려진 반 총장이 취임 뒤 첫 고국 방문의 바쁜 일정을 쪼개 안 위원장을 만난 주된 이유는 선언 60주년 때문이었다. 이 자리에서 반 총장은 인류 보편의 가치인 인권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한국 국민 모두가 선언 60주년을 맞아 세계시민의 기본 규범인 선언을 배우고 실천할 것을 당부했다.

유엔 사무총장이 선언 60주년을 강조한 이유는 인권이 평화·안보·발전 등과 함께 유엔의 주요 목적이기 때문이다. 선언은 전문에서 분명한 어조로 “인권이 자유와 정의와 평화의 기초”이며 전쟁과 같은 “야만적 행위가 인권에 대한 무시와 경멸에서 비롯”됐음을 강조하면서 선언이 “인류 공통의 기준”임을 선포했다. 즉, 선언은 참혹했던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뼈저린 반성과 참회를 담은 고백의 글이자 재발 방지를 다짐하는 반성의 성격을 지닌다. 그래서 선언은 보통 인류의 ‘마그나카르타’, 즉 대헌장이라 불리곤 한다.

선언은 1945년 6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유엔헌장이 채택되고 같은 해 10월24일 뉴욕에서 유엔이 정식으로 출범한 지 3년 만인 1948년 12월10일 파리 유엔총회에서 채택됐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56개 유엔 회원국 가운데 48개국 찬성, 8개국 기권으로 반대 없이 문서가 채택됐다. 당시 유엔을 둘러싼 지정학적 상황을 반영하듯 선언에는 미국과 프랑스의 정치철학과 인권사상이 강하게 배어 있다. 특히 유명한 선언 제1조의 문구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서 평등하다. 인간은 이성과 양심을 부여받았으므로 서로에게 형제자매의 정신으로 행해야 한다”에는 18세기 말 프랑스혁명의 3대 정신인 자유·평등·박애의 정신이 녹아 있다.

이후 유엔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는 도덕적·정치적 성격을 지닌 선언을 법적 구속력이 있는 문서와 제도로 발전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그 결과 현재 자유권, 사회권, 인종차별, 여성차별, 고문, 아동, 이주노동자, 장애인, 강제실종 등 다양한 주제와 영역을 포괄하는 국제 인권조약 체제로 변모해왔다.

‘자유·평등·박애’에서 흘러나온 강줄기

또한 유엔인권고등판무관(UNHCHR)과 유엔인권이사회(HRC), 국가별 인권상황검토(UPR) 등 선언에 담긴 정신을 실현하기 위한 제도와 장치들도 발전돼왔다. 선언이 백두산 천지와 같은 저수지라면 각종 인권조약은 그로부터 흘러나온 강줄기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때로 어떤 강줄기는 오래가지 못하고 말라버리거나 산을 만나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을 택하기도 했다. 선언은 샘이 깊은 물처럼 인권의 가치를 실천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감과 용기의 원천으로 자리잡아왔다.

따라서 선언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 인권규범의 발전 과정에 대들보 노릇을 해왔다. 그 이전의 인권 관련 선언이나 조약은 특정한 나라의 경험이나 이념에 기반하고 있지만, 선언에는 자유와 평등의 양대 이념을 반영한 이른바 자유권과 사회권이 공존하고 있다.

선언 채택 직후인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에서 시작된 40년간의 동서 냉전 동안 선언은 전체주의와 독재 그리고 가난과 싸워왔다. 또한 선언은 1990년대 초 탈냉전 시대에 등장한 신자유주의 경제와 세계화의 파고에 맞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이렇게 선언은 지난 60년간 희로애락과 산전수전을 다 겪고 이제 공자가 말한 이순(耳順)의 나이에 도달했다. 그러나 환갑을 맞이한 선언이 한국에서 직면한 현실은 여전히 녹록지 않다.

이제 한국은 60년 전 식민지를 벗어나 헐벗고 굶주렸던 갓난아기에서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성취한 나라, 전세계에 자동차와 첨단 정보기술(IT) 제품을 공급하는 수출 강국,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한 나라로 국제사회의 부러움을 받고 있다. 그러나 지난주 금의환향한 반기문 총장의 대국민 메시지는 놀랍게도 “한국이 부끄럽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는 경제 분야에서의 양적 팽창에 비해 인권 분야에서는 국제기준의 관점에서 여전히 후진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공적개발원조(ODA) 등 전지구적 가난 퇴치를 위한 국제적 활동에서 한국은 국제사회의 기대를 훨씬 밑돌고 있다. 특히 반 총장은 안경환 위원장과 면담할 때 국내 이주노동자의 열악한 인권 현실 개선에 각별한 노력을 부탁했다. 아마 반 총장의 부인인 유순택씨가 방한 중 다른 곳을 제쳐두고 이주여성 긴급지원센터를 방문한 이유도 반 총장의 우려와 당부를 대신 몸으로 전달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선언 60주년 캠페인을 펼치며 선언을 ‘인류의 가장 아름다운 약속’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 약속은 지금까지 336개 언어로 번역됐는데, 이는 기독교의 성서 다음으로 많이 번역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작 우리 사회에서 이 약속을 읽고 이해하고 실천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유감스럽게도 우리 사회에서 선언은 여전히 ‘생소하고 낯선’ 약속처럼 보인다.

중고생·비정규직·탈북동포가 읽을 그날

이 땅의 중고생이 자유롭게 선언을 읽고 토론하면서 문화적·정치적 상상력을 활짝 펼칠 수 있을 때, 노동자들이 실업과 비정규직의 두려움 속에서도 선언을 통해 존엄성과 평등의 가치를 배우고 실천할 용기를 얻을 때, 온갖 차별 속에서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탈북동포가 선언을 읽고 자신의 인권을 지킬 힘을 키워갈 때, 아직 한국말을 깨치지 못한 이주노동자, 결혼이주자 그리고 이들의 자녀가 한국 땅에서 자국의 언어로 선언을 읽고 배우면서 인권의 의미를 깨칠 때, 선언은 비로소 ‘인류의 가장 아름다운 약속’이 될 수 있으며, 선언이 지닌 보편성의 의미가 우리 사회에 든든한 뿌리를 내리게 될 것이다. 선언 60주년에 즈음해 많은 국민이 선언을 읽고 인권 모범국을 지향하는 동시에 세계시민의 일원임을 자축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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