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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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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특강-상상력] 미국 간첩은 어디로 신고하죠?

등록 2005-04-07 00:00 수정 2020-05-03 04:24

[인터뷰 특강 | 21세기를 바꾸는 상상력]

한홍구와 함께한 ‘과거를 푸는 상상력’… 군대와 간첩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다

▣ 김혁/ 8·9기 독자편집위원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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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에 배포된 강연 자료에는 꿈을 빼앗겼던 시대의 사회상이 그려져 있었다. 필자도 일부 겪었던 일들이라, 특강 주제와의 관계에 대해 나름대로 상상력을 발휘해보았다. 다른 참석자들 역시 자료에 얼굴을 묻고 과거로 회귀하고 있었다. 사회자가 개회를 하고 나서야 참석자들은 다시 현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에비’가 지배하던 시대를 아시나요

청중에게 인사 말씀 해달라는 사회자의 요청에 한홍구 교수가 “여러분, 강연 지금 다섯 번째 시간이죠? 여러분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셨지만 끝나가니까 좋죠?”라고 하자, 강연장 분위기가 일시에 화기애애해졌다. 이어 강연 내내 ‘이름 긴 단체’로 통칭된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 ‘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 등의 단체와 단체 내에서의 한홍구 교수의 활동이 소개되었다. 활동 내용은 과거의 금기를 깨고 미래를 여는, 다시 말해 강연 내용을 몸소 실천하는 것이었다.

김산의 <아리랑>을 영화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얘기, <한겨레21>에 연재된 몇몇 글들에 대한 소회를 지나, 강연 내용의 얼개에 대한 사회자의 마지막 질문으로 넘어가자 청중은 집중해 귀를 기울였다. 박정희 유신시대와 군부독재가 어떻게 꿈꿀 권리를 빼앗아왔고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극복해 꿈을 찾게 되었는지가 주된 내용이었다. 한홍구 교수의 답변이 끝나자마자 장내 정리를 위해 잠시 쉬는 시간이 있었지만, 대다수 청중들은 자리를 뜨지 않은 채 곧 이어질 본 강연을 위한 마음의 준비를 하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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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비’라는 단어로 본격적인 강연이 시작되었다. 주로 어린아이의 돌출 행동을 제지하는 데 쓰이는 이 말이 꿈을 빼앗기고 억압된 우리 사회를 나타내는 가장 적합한 말이라는 것이었다. ‘에비’가 지배하는 사회상으로 장발·미니스커트 단속, 대한늬우스와 함께 극장에서 틀어주던 애국가, 수많은 금지곡에 얽힌 이야기 등이 구수한 입담으로 소개되었다. ‘대한늬우스’를 모르는 세대를 위해서는 현재의 유행어를 접목한 설명도 덧붙여졌다.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가 금지곡이 된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여기가 행복의 나란데 너 북으로 가는 거야? 그런 거야?”라고 해서 청중을 웃겼고, 송창식의 <고래사냥>에 나오는 가사인 “동해 바다에 이쁜 고래 한 마리”를 인용하면서는 “고래 정말 예뻐? 봤어? 이거 허위 사실 유포지?”라는 뼈있는 비유를 했다. 한홍구 교수를 통해 표현되는 빼앗긴 과거에 대한 회상은 어느새 간첩에 대한 추억으로 옮겨졌다.

한홍구 교수는 “꿈을 빼앗긴 자리에 들어선 것이 간첩”이라고 운을 뗀 뒤, 반공방첩 계도를 위해 사용되었던 표어들을 나열했다. 지금도 흔히 쓰는 “자수하여 광명 찾자”부터 해서 “사랑하는 애인도 알고 보니 간첩!”에 이르자 청중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한 것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회자인 김갑수씨가 다시 연단에 올라 노래를 불러줄 지원자를 한명 뽑았다. 한 여성을 뽑았는데 노래를 못 부른다며 다시 연단을 내려가는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곧바로 사회자가 이른바 약장사로 돌변해 분위기를 이어갔다. 사회자는 ”저도 노래를 잘 못하는데, 진~짜 기가 막혀요, 실제로 옛날에 이런 노래를 부르기는 했는데…”라며 한홍구 교수쪽으로 눈을 돌렸다. “둘이 같이 합시다”라고 제안하자 청중이 큰 박수를 보냈다.

한홍구- 김갑수의 이중창?

한홍구-김갑수 듀엣이 “아침에 산에서 양복 입고 내려오는 자~ (중략) 간~첩 신~고는 지체 없이 113~ 오~오 간첩 신~고는 국번 없이 113”이라고 어눌하지만 무난하게 노래를 소화해냈다. 순간 장내가 웃음으로 떠나갔다. 강연의 압권이었다. 한홍구 교수는 “간첩 하면 왜 자연스레 북한간첩만 떠올릴까요”라고 물었다. 미국간첩, 일본간첩은 왜 생각조차 않느냐는 거였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덧붙인 말이 다시 장내를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미국간첩은 몇번으로 신고해야 하죠?”

모두가 같이 웃었지만 그 웃음의 의미는 세대별로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신시대를 겪은 세대에게는 역경을 감내하고 난 뒤의 가슴 아픈 웃음이었을 것이다. 필자가 속한, 유신의 끝자락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동네 산기슭에서 ‘삐라’를 줍던 마지막 반공방첩 세대에게는 세상이 바뀐 것을 조금이나마 실감한다는 웃음이었을 것이다. 생활 속에서 간첩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에게는 객관적인 과거를 희화한 데서 오는 웃음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해보았다. 큰 사건이 터졌다 하면 등장하던 간첩이라는 존재가 꿈을 빼앗긴 우리를 통제하는 수단이었다고 한홍구 교수가 말하자 장내는 다시 진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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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이라는 허상에 더해 우리를 획일화한 것으로 군대를 꼽았다. 군대 갔다 와야 사람 된다는 화두로 시작했으나 시간의 제약 때문이었는지 많은 얘기가 오가지는 못했다. 군대의 획일화를 근간으로 한 모범생 만들기 교육, 입시 위주 교육 등 간첩 문제와는 달리 지금도 진행 중인 꿈꿀 수 없는 환경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한홍구 교수는 힘있는 말로 강연을 끝냈다. “우리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나가는 데 있어 그 힘은 바로 꿈이었습니다. 세상은 꿈꾸는 만큼 변하고 꿈을 꾸지 않으면 변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이전과 같은 몹쓸 제약이 없어졌습니다. 여러분들이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됩니다.” 청중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며 질문을 준비했다.

한홍구 교수의 꿈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나왔다. 한홍구 교수는 “꿈은 삶의 여유로움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평화가 찾아오면 삶이 여유로울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지금 하고 있는 평화박물관 건립 사업에 힘을 쏟고 싶습니다”라는 소박하면서도 강한 확신을 내비쳤다.

한 역사학도의 질문은 과거를 탈피해 한국 사회가 미래지향적으로 되기 위해 필요한 역사 교육과 역사 의식에 관한 것이었다. 한홍구 교수는 동북공정과 독도 같은 이슈가 제기되면서 역사 교육이 강화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한편으로 현재의 역사 교육은 너무 많이 되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내용 중심으로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양적으로만 단순 습득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상식적 고민을 하는 것이 진정한 역사 의식이고 이것을 가르치는 것이 역사 교육이라고 정리했다.

꿈꾸는 방향으로 진보한다

강연에서 노동 문제를 다루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오자 한홍구 교수는 “노동뿐만 아니라 여성 문제도 다루지 못한 것이 사실”이라며 “기본적으로 모든 사회는 꿈꾸는 방향으로 진보해간다. 노동의 가치 인정 문제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진다면 노동에 대해서도 우리가 꿈꾸는 사회에 좀더 다가갈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꿈을 가져야 하며 그 꿈을 향해 노력해야 한다고 한홍구 교수는 마지막으로 재차 강조했다. 참여를 바탕으로 다수의 작은 힘을 모아 같은 꿈을 꾸는 사회를 만들자는 일종의 제안이었다. 청중 중에 과거의 금기를 깨고 미래를 여는 비법을 들으러 온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우리 자신의 변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진실을 체득한 사람들이 더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동시에 그런 사람이 많아지는 사회를 꿈꾸는 것을 필자의 꿈에 추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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