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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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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특강-상상력] “분석하지 말고 그냥 즐겨라”

등록 2005-03-24 00:00 수정 2020-05-03 04:24

[인터뷰특강/ 21세기를 바꾸는 상상력 2]

이윤기와 함께한 ‘신화의 상상력’… 오래전 무심코 툭 던져진 이야기에 싫증나지 않는 진실이 있다

▣ 글 김종옥 / 7·8기 독자편집위원
▣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비밀스럽게 호그와트에 모여드는 아이들처럼 어스름의 저녁안개를 뚫고 청중이 모여들었다. <한겨레21>의 인터뷰 특강은 날로 성황이다. 우리는 가볍고 흥겨운 말의 성찬을 늘 고대한다. 넓은 강당을 빼곡히 채운 청중들은 어떤 기대를 안고 모여들었을까. 한비야에게서 치열하고 아름답게 사는 전사의 모습을 보려 했다면, 이윤기에게서는 무엇을 보려고 했을까. 선생이 신이 나서 자맥질하고 있는 신화의 바다, 그 내음을 맡아보려고 모였을까. 그러나 “자, 빠져 봅시다”라고 권유하는 선생에게 온전히 무장해제 못하고, 그 언저리에서 고집스럽게 망설이고 흘깃거리고 따져보려던 우리 허릅숭이들은 한참 뒤에야 주섬주섬 옷을 벗기 시작했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는 것!

시간이 되자 사회자 김갑수씨는 “바람의 딸(한비야)에 이어 바람의 아들의 강연을 듣게 되었다”는 말로 콘서트의 막을 올렸다. 이윤기 선생은 먼저 신화에 빠지게 된 몇개의 순간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대상이 왜 신화였는지 설명했다.

그는 사람에게는 인생에서 한번은 오는 극적인 순간이 있다고 말하면서 자신에게 닥쳤던 그 순간을 되새겼다. 기자 시절 인쇄소 사장과 낚시를 하다가 낚시의 손맛 이야기를 듣고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세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후로 그는 민주주의의 세계에 대해서, 또 헤브라이즘과 고전음악과 의식에 대해 알고 있지만 그 대척점에 있는 다른 세계에 대해, 헬레니즘과 고전미술에 대해 무의식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느냐고 자신에게 묻게 되었다. 그리고 숱한 물음 끝에 만난 것이 신화의 세계였다. 신화를 모르고는 인간을 알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이 대목에서 피터 빅셀의 <책상은 책상이다>에 나오는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았던 사나이’가 떠올랐다.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으려면 어쨌든 무엇인가를 먼저 알았어야 하기 때문에, 너무나 많은 것을 알아야 했던 그 치열했던 사나이 말이다.)

‘왜 신화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어떤 논리나 의도가 개입되지 않은, ‘무심코’ ‘직관적’으로 툭 던져진 진실의 세계가 신화라는 대답을 한다. 그래서 진짜 생짜배기의 진실이고 아름답고 풍족한 이야기의 바다가 된다. 그래서 신화란 결코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는 것’이 된다. 이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서 선생은 ‘몽골의 길’에 비유했다. 몽골의 벌판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서 생겨난 길이 있다. 아주 오랜 옛날에도 길이 있었을 것이다. 그 길은 세월이 지나면서 움푹 파이었을 것이고, 그 옆에 또 새 길이 났을 것이다. 그 길이 파이면 또 그 옆에 길이 생긴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지금 한 길이 놓여 있을 것이다. 아마도 신화란 이런 ‘몽골의 길’ 같은 것이 아닐까 한다고.

우리 것을 찾아내고 즐겨야 한다는 강박

논리나 의식이나 이론이 개입되지 않고 오래전에 우연히, 즉흥적으로, 무심코, 직관적으로 툭 던져진(여기서 그는 ‘무심콜로지’란 용어를 썼다), 그래서 더욱 진실이고, 싫증나지 않고 오늘까지 계속 살이 붙어가면서 굴러 굴러온 이야기가 바로 그가 강조한 신화의 세계였다.

이쯤에서 슬며시 걱정이 되었다. 신화를 읽으면서 그 하나하나의 사건마다 많은 은유와 상징을 끄집어내어 분석해보려던 치졸함이 마음에 걸려서였다. 그리고 이런 느낌이 든 것은 나 혼자만은 아니었던 듯싶다.

몇몇의 무거워진 마음을 눈치챈 사회자 김갑수씨가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우스개를 한마디 날렸다.

“선생님의 글을 거의 다 읽어보았는데, 신화 속의 등장인물 가운데 하나를 빼놓으셨더군요. ‘에릭’이 안 나오더라고요.”

대단히 성의 있는 고전적(?)인 농담이었고 그 덕에 객석이 웃음바다가 되었는데, 이윤기 선생은 생뚱맞다는 듯한 표정을 한참 짓더니 “너무 깊이 들어가지 맙시다”라는 농담으로 받아쳤다.

질의응답 시간이 이어졌는데, 사회자가 먼저 몇 가지를 물었다.

역사와 신화의 관계는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이야기가 오래 쌓이면 신화가 됩니다. 그런 점에서 역사는 신화에 별로 기여한 바가 없습니다. 또 신화란 역사 이전의 것만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연속되고 있는 세계입니다.

한국 신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리스 신화뿐 아니라 이곳저곳의 신화를 두루 연구합니다. 물론 한국 신화도 포함되지요.

연구하실 때 각 신화가 갖는 공통된 원형에 주목하시는지, 각각의 개별화된 특성에 주목하시는지요?

물론 공통성을 보지요.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경험이 있고, 우리 심성에 공통된 그 원형이 신화 속에 들어 있습니다. 누구나 비슷하게 사니까요. 그래서 연구하다 보면 특별한 민족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애초에 제가 공부를 시작할 때, 한반도 안에서만 유효한 것이 아닌, 전세계적으로 유효한 것을 찾아 넓혀가다 보니 신화의 세계에 빠져든 것이기도 하고요.

선생님께서는 이 사회에 그리스로마 신화 붐을 일으키신 장본인입니다. 왜 지금 그리스로마 신화를 읽게 되었는지, 무슨 시대적 요구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묻게 됩니다.

그런 질문을 항상 받습니다. 같은 질문에 같은 대답을 내놓는 것이 싫어서 그때그때 ‘무심코’ 대답합니다. 오늘은, 지금 이 세계는 단일화되고 있는데 그리스로마 신화는 이렇게 확대된 세계와 소통하는 일입니다. 단일화를 가능케 하는 상징 체계로서 신화를 읽게 되었다고 하겠지요.

그리고 청중들과의 질의응답이 시작됐는데, 처음엔 역시 ‘우리 것’에 관련된 질문이 계속 이어졌다. 혹시 우리는 고집이 세거나, 우리 것을 찾아내고 즐겨야 한다는 강박에 싸여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마저 들었다.

요즘 우리 것은 제쳐두고 그리스로마 신화를 열심히 익히는 것을 보니 걱정이 됩니다. 이 우려가 쓸데없는 것인지요.

신화란 이미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보편적인 일들이죠. 우리 것을 버리는 일이 아닌가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스로마 신화와 우리 옛이야기를 같이 놓고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옛이야기는 그저 옛이야기로서 끝난 짧은 이야기입니다. 신화란 인간의 보편성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장소와 시대를 넘어 계속해서 확대 재생산돼오는 재미있는 세계입니다. 우리 옛이야기를 포함해서 다른 신화들은 그런 과정이 없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그만큼 재미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 과정을 겪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상대적으로 그리스로마 신화에 비해 우리 옛이야기는 시대가 일천합니다. 그럴수록 얘기가 변형될 소지도 많을뿐더러 풍부한 변주 같은 게 풀어져나올 여지가 줄어듭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경험 있습니까?

우리 것을 놔두고 남의 것에 열중하면 왜 배신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걸까? 선생은 어느 자리에 가서도 ‘왜 우리 것은?’이란 질문을 지겹도록 들었을 것이다. 도대체 왜 우리는 이토록 ‘애국적’일까?

답답한 분위기를 순식간에 반전시킨 질문자는 한 고등학생과, 재수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청년이었다. 고등학생은 게임을 좋아하다 보니 신화를 보게 되었다고 말해 모두를 가볍게 웃게 만들더니만, 이어 여러 분야의 신화를 파고들면서 쌓은 내공이 드러나는 질문을 날렸고, 중간에 사회자의 장난기 어린 질문에 청중 가운데서 유일하게 답을 내었다. 그가 지닌 발랄함이 모두를 유쾌하게 만들었다.

박수와 격려 속에 마이크를 잡은 ‘재수생’은 신화 속 여러 이야기가 그다지 교훈적인 것 같지 않다면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선생의 개인적 생각을 묻는 도발을 감행했다. 선생은 이 질문에 대단히 즐거워했다. 선생은 신화를 보면 과거에 우리 인간들은 별 흉측한 짓을 다 했을 거라고 생각하게 된다면서, 우리가 인간의 원형을 볼 때는 다듬어지지 않은 그것도 봐야 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오이디푸스에 관해서는, “내가 한살 때 아버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나는 도대체 오이디푸스와 관련될 상황이 아니었어요”라고 대답해서 폭소가 터져나왔다.

강연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신화를 읽는다고 할 때 과연 어떻게 읽어내야 하는지와, 신화에서 역사적 맥락을 추출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묻는 질문이 이어졌다. 선생은 인간의 관념이 신화의 이름으로 하나하나 풀어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제우스의 바람기에서 뮤즈가 탄생하고, 뮤즈가 상징하는 것이 바로 관념의 분화 과정이며 그것을 읽어내는 일이 재미있다는 것이다. 역사적 맥락을 추출하는 것에 대해서는 역시나 무의미하다는 대답이 나왔다. 신화가 갖고 있는 우리 원형의 심상을 없애고 조작하는 행위고, 그렇게 조작되고 조직된 신화는 절대로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질문은 신화읽기가 어떤 효용성을 갖고 있는지였다. 인간이 본래 어땠는지, 그걸 아는 가장 좋은 것이 고대 신화와 고대 종교 경전과 같이 고대에 쓰여진 많은 책들이며, 그것들을 통해 우리 모두의 원형을 읽어내는 동시에 우리의 상상력을 확장시키게 된다고 했다.

결국 선생은 “신화를 즐기라”는 마무리 말 속에 그의 모든 이야기를 담았다. 신화는 네 것도 아니고 내 것도 아니다. 굴러다니면서 끝없이 변주하면서 살이 붙어나가는 생생하고 거대한 미지의 세계다. 일부러 분석하고 설명하려고 들지 말고 ‘그저 즐기라’고 선생은 권했다.

언제나처럼 강연이 끝나고 긴 사인회가 이어졌고, 이어진 뒤풀이에서 선생과 함께 자리했다. 소문난 주당인 선생은 술을 많이 들지는 않았다. 옆에 있던 기자는 선생이 대단히 소식인 점에 놀라고, 또 그에 비해 엄청난 양의 술을 마신다는 점에 놀란다고 말했다. 선생은 건강이 안 좋아진 것 같다며 술병을 앞에 놓고 애석해하는 것 같았다.

프로메테우스의 가혹한 벌을 묻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아까의 강연에서 답을 주지 않았던 질문에 대해 물었다. 프로메테우스에게 가혹한 벌을 내린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었다. 결국 신화란 인간들이 만든 얘기니 인간 편을 들어야 할 것 같은데 왜 가혹한 벌을 받는 이야기를 꾸몄을까 하는 순진한 질문이었다. 선생은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의 뒷자리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라고 했는데, 나는 대뜸 “불경죈가요?”라고 물었다. 그러나 이 되물음은 어리석은 것이었다. 선생은, “아니죠”라고 고개를 젓고는 형벌을 받은 이후에 긴 얘기와 반전이 이어지는데, 그 과정과 은유와 의미를 굳이 길게 말할 게 아니라고 했다. 그건 인문학자들이 치밀하게 공부하고 연구할 문제이지, 신화를 접하는 사람은 충분히 즐기면 될 뿐이라고 했다.

흘깃 엿보고 훈련받은 대로 ‘불경죄군요’라는 어설픈 분석을 뇌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가. 선생은 우리가 분석, 논리를 통해서 은유와 비유와 의미를 찾는 일을 할 만큼 아직 충분히 즐기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선생은 두 시간여를 그걸 역설했는데 뒤풀이에 와서 독자를 대신해서 나온 사람이 그걸 반복했으니 얼마나 한심했으랴. 단숨에 창피해져서 이후로는 입을 다물었다. 대가 앞에서 들켜버린 하찮고 사소한 가난뱅이여. 그래서 결국 나는 ‘전작주의니 뭐니 하는 심한 추종자들 얘기를 들으면 부담되지 않으세요’라는 질문을 하지 못했다. 왠지 더 실없어질 것 같아서였다.

분석하고 설명하려 들지 말고 그저 즐겨라. 아직 우리는 충분히 즐기지 않았다. 이제 겨우 시작이다. 그 말을 되뇌면서 그 길고 낯선 이름들을 머리에 쥐나도록 외우며 신화를 학습했던 억울함이 치밀어올랐다.

집에 돌아오니 널브러져 자고 있는 아이들 발치에 만화 그리스로마 신화 19권이 드디어 나왔다는 신문광고와 함께 ‘어서 사주세요’라는 쪽지가 흔들리고 있었다.



인터뷰 특강 개별 수강 가능합니다

홍세화·박노자·한홍구·오귀환 인터뷰 특강



이번 인터뷰 특강엔 총 600여명이 수강 신청을 해주셨습니다. 6회를 모두 신청한 전체 수강자와, 듣고 싶은 특강만 따로 신청한 개별 수강자를 합친 수입니다. 현재 전체 수강 신청은 마감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개별 수강 신청은 아직도 가능합니다. <한겨레21>은 더 많은 독자들에게 기회를 드리기 위해 보조의자 설치 등의 대책을 세운 뒤 수강신청을 받을 계획입니다.

제3회 3월21일 홍세화/ <한겨레>기획위원(자아실현의 상상력- 교육과 인간, 그리고 대한민국)

제4회 3월23일 박노자/ 오슬로국립대 교수(새로운 동아시아를 만드는 상상력- 민중의 동아시아를 위하여)

제5회 3월28일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과거를 푸는 상상력- 금기를 깨고 꿈을 꾸어라)

제6회 3월30일 오귀환/ <한겨레21>전 편집장(문명에서 배우는 상상력- 과거에서 훔쳐온 발명특허 톱10)

문의 및 접수: 한겨레신문사 문화센터 02-3279-0900, www.hanter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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