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size="2" color="663300">2003년 가을 청소년 가출의 다양한 풍경… 아직도 철부지 아이들의 불장난이라 생각하는가 </font>
공동취재 마그마 · 겸 | 청소년 기획위원
“그런 거 있잖아요. 내 자신이 싫어지고 집에 있기 답답하고. 솔직히 말하자면 그때 자살을 하려고 그랬거든요. 강변역 CGV에서 경비원한테 붙잡혔어요. 거기 스카이라운지가 있어서 뛰어내리려고 그랬어요. 근데 너무 추워서 안에 들어갔는데 잡힌 거예요. 그땐 떨어지지 못한 게 너무 후회가 되고 그러는 거예요. 세뱃돈 30만원 정도 있었거든요. 그걸 3일에 다 썼어요. 집에서 못해본 걸 다 하는 거예요. 신촌 돌아다니다가 칵테일도 마시고 맥주도 마시고. 호프집 같은 데 삐끼들이 데려가면 민증(주민등록증) 검사를 안 했어요. 예 언니들이요 아뇨. (가출한) 언니들하고 부닥치지 않으려고 피해다니고 무리지어 다니고 그랬어요.”
서울 신촌의 이화여대 앞 카페에 앉아 연신 담배를 피우던 중3 여학생은 별 ‘구린’ 것을 다 묻는다는 투로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가출과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에 대해서. 최소한 이 공간에서 시간을 죽이는 청소년들에게는 모두가 경험했으면서도 말하기에 ‘쪽팔린’ 것, 그것이 가출이었다. 오랫동안 가출은 일탈이나 범죄와 동일시돼 왔다. 이 인식 속에서는 문제의 해결도 간단하다. 감시와 처벌의 그물을 쳐놓고 “집으로!”를 외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가출이 일부 철없는 아이들의 ‘범죄’가 아니라면, 가출의 스펙트럼이 생각보다 훨씬 넓다면, 사회는 좀더 진지하게 가출 청소년들을 대할 필요가 있다. 2003년 가을, 가출의 풍경은 어떤 것일까.
<font size="2" color="6633cc"># 일시 도피… 날 내버려 둬! </font>
18살 여학생 은지(가명)는 중학교 2학년 때 첫 번째 가출을 감행했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 어머니는 항상 “수업 끝나고 학교 앞에서 기다려”라고 명령했다. 어머니의 ‘호위’ 아래 바로 도서관에 가서 2~3시간 공부하고 교육방송을 1시간 듣고 교재를 풀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새벽 1~2시까지 공부했다. 견디다 못해 ‘즉흥적’으로 친구와 함께 강원도 횡계에 있는 친구네 할머니집에 갔다가 붙잡혀 돌아왔다. 그의 가출은 단순히 공부에 대한 중압감 때문만은 아니다. 어머니가 너무 싫었고 의붓아버지는 그의 말을 빌리면 “변태적”이었다. 그 뒤 7~8번 정도 가출을 했다. 바다를 좋아해서 경포대에 가기도 했다. “그런데 가면 헌팅 막 걸려요. (오빠들이) 같이 밤새고 술먹고 재워주고 그랬어요.” 돈이 떨어지면 어린애들 ‘삥’ 뜯어서 음식을 사먹었다.
19살 남학생 정훈(가명)이는 중3 때 아버지에게 매일 논다고 야단 들어서 충동적으로, 친구와 함께 자취하는 여학생들 집으로 들어갔다. 오래 가출할 생각은 아니었으나 “야, 이 개××. 안 들어올 거야, ×××야”라고 고함치는 아버지의 음성메시지를 듣고 집에 안 들어가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같은 학교 1, 2학년들에게 “좀 도와달라. 다음에 내가 쏜다”며 ‘자금’을 거뒀다. 매일 라면 먹고 없으면 술로 때우며 살았다. 정 배고프면 시장에 가서 몰래 과일 한 상자를 들고 “으악!” 소리치며 신나게 뛰었다. 여학생 집에서 혼숙을 했어도 스킨십 외에 ‘큰 사고’는 없었다. 어머니의 연락을 받고 집에 들어오니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아버지와는 2~3주 동안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가출하고 난 뒤 자신은 변화가 없었지만 부모님은 좀 변한 것 같단다.
<font size="2" color="green">일시적·도피적 가출은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유형이다. 대부분 부모님과의 충돌 때문에 충동적으로 집을 뛰쳐나가게 된다. 이런 가출은 “날 좀 그만 내버려둬”라는 비명과 같다. 준비 없이 감행한 가출인 만큼, 장기화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거리에 나서자마자 덮쳐오는 유흥 문화와 성매매 산업은 이들이 장기적·일탈적 가출로 빠져들 위험성을 열어놓는다. </font>
<font size="2" color="6633cc"># 자아실현… 다른 공부를 위해 </font>
18살 남학생 진웅(가명)이는 중3 때 인생의 첫 고비를 맞았다. 부모님은 대학 갈 준비를 해야 한다고 했지만,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것은 음악이었다. 음악을 하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시간적 여유가 있는 공고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일대 충돌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은 그가 집에서 음악 듣는 것조차 싫어했다. 결국 말다툼 끝에 집을 나와 일주일 동안 밖에 나가지도 않고 친구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가출 뒤 그는 마음을 바꿔 인문계 고등학교에 갔다. “쇠 깎으면서 음악하기도” 힘들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는 현재 학교를 자퇴하고 ‘하자’ 작업장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다.
충남 천안에 사는 17살 남훈(가명)이는 중학교 때부터 학교가 싫었다. 단순한 지식 외에 다른 것을 배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튀는’ 행동 때문에 친구들과 사이가 안 좋아서 자신의 안티 사이트까지 생기기도 했다. 이때부터 ‘가출의 행진’이 시작됐다. 중학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음악 공부를 하겠다고 말했다가 “허황된 꿈을 갖지 말라”는 핀잔을 듣자 가출해 친척 누나집에 며칠간 숨어 있었다. 친구들끼리 몇주 동안 서울로 가출하기도 했다. 학교를 그만두기 위한 투쟁은 몇년 동안 계속됐다. 그는 지금 천안에 있는 외할아버지 집에 살면서 일주일에 몇번씩 서울로 올라가 시나리오를 배우고 있다.
<font size="2" color="green">학교에서 존재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자아실현을 위해 가출하는 청소년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런 자아실현형 가출은 종종 독립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10대 후반에 남들과 다른 길을 간다는 것은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힘든 일이다. 그러나 이들은 결코 예전으로 돌아가지는 않겠다고 말한다. </font>
<font size="2" color="6633cc"># 성 정체성 찾기… 난 미치지 않았다 </font>
18살 동성애자 영식(가명)이는 고1 때 부모님께 커밍아웃을 했다. 따지고 보면 ‘아우팅’인 셈이다. 집에 동성애 관련 프린트물이 있었는데 부모님이 허락도 없이 뒤져보고 나서 일방적으로 몰아붙였다. 어머니는 어릴 적부터 보통 남학생들 같지 않으니 그럴 것 같았다고 수긍했지만 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아니니 나가라고 고함을 질렀다. “넌 미쳤어”라거나 하리수 될 거냐며 화를 내기도 했다. 가출해서는 친구 집이나 PC방, 찜질방을 전전했다. 집에 돌아오니 한동안 아무 말이 없다가 어느 날 아버지가 자신에게 “여자친구를 사귀어봐라”고 얘기했다. “그냥 황당해서 할 말도 없고 무시했어요. 전 부모님들이 동성애자 아이를 뒀을 댄 그 아이의 말을 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안 그러니까 저처럼 가출하고 그러죠.” 그 뒤로도 2번이나 가출을 했다. “어쩔 수 없었어요. 제 잘못이 아니에요. 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고 싶어요.” 그는 가출을 통해 학교에 다니면서 못했던 경험을 할 수 있어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여차하면 ‘아주 잘못된 길’로 빠질 수 있어 조심해야 한다고 귀띔한다.
<font size="2" color="green">동성애자의 가출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성애자의 가출보다 위험하다. 동성애-가출 사이에 비정상-일탈이라는 편견이 끼어들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편견 때문인지, 가출한 청소년 동성애자들은 대부분 인터뷰를 거절했다. 가정이 자신의 성적 취향을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심지어는 강요할 때, 탈출구는 하나밖에 없다. 10대에게 정체성은 밥보다 소중하다. </font>
<font size="2" color="6633cc"># 생계 곤란… 모든 것을 부숴버린 외환위기</font>
16살 남석(가명)이는 부모님이 3살 때 이혼한 뒤 어머니와 외갓집에서 10년 정도 살았다. 외환위기가 닥치자 어렵게 꾸려가던 가계는 거의 파산 위기에 처했다. 이모의 태도가 돌변한 것이 이 무렵부터다. “이모가요 어디 전화하지도 못하게 해요. 그런 것 때문에 누나가 집을 나갔는데요, 너도 피를 속일 수 없으니 누나랑 나가라고 막 그러는 거예요.” 집을 나가서 큰 병원 의자에 앉아 보호자인 것처럼 위장해 하룻밤을 잤다. 다음날에는 화장실에서 자려고 하다가 우연히 청소년 쉼터에 들어가게 됐다. 그는 쉼터에 기거하면서 막노동하는 아버지를 만나기로 약속했다. 사정이 허락하면 아버지의 집에서 살면서 검정고시를 볼 생각이다.
15살 충남(가명)이는 올해 초 집을 팔아도 빚을 갚을 수 없어서 아버지가 파산신고를 하고 일거리를 찾아 떠났다. 아버지가 집을 나가자 어머니의 신경도 극도로 예민해졌다. 어느 날 친구들과 놀다 밤늦게 들어가자 밤일하고 새벽에 들어온 어머니가 자신의 옷을 다 벗겨 집 밖으로 내쫓았다. 아랫집에서 옷을 빌려 입고 다시 문을 두드렸지만 열어주지 않았다. 친구들과 놀다 밤이면 아파트 계단에서 잠을 자고, 경비원 아저씨에게 쫓겨나는 생활이 이어졌다. 어머니가 없는 낮 시간엔 집에 가끔 들러 몸을 씻고 옷도 갈아입었다. 지금은 청소년 쉼터에 있지만, 아직도 부모님과 연락이 되지 않는다.
<font size="2" color="green">생계곤란형 가출은 ‘나갔다’보다는 ‘내쫓겼다’는 말이 더 옳다. 청소년 쉼터에는 주로 이런 사연을 가진 아이들이 들어온다. 외환위기 이후 늘어나는 거리의 아이들은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상처다. 이들은 거리에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쉼터로 갈지, 장기 일탈의 길을 걸을지 결정된다. </font>
<font size="2" color="6633cc"># 장기 일탈… 어른의 욕망은 돈이다</font>
거리의 아이들이 ‘오래 놀기’ 위해서는 주기적으로 ‘실탄’을 지급해주는 물적 토대가 필요하다. 그 토대란 어른들의 거대한 욕망이다.
16살 지현(가명)이는 집이 답답해서 혼자 나왔다. 학교에서 친했던 ‘언니’들이 많았기 때문에 나와서도 심심하지는 않았다. ‘언니’들을 통해 ‘오빠’들과도 친해졌다. “오빠들요 항상 싫어요. 아빠 때문에요. 그런 게… 있어요(성추행 암시).” 그러나 술도 사주고 자신을 보호해주기 때문에 멀리할 수는 없었다. 채팅을 통해 ‘아저씨’들도 많이 만났다. “한번은 채팅하다 어떤 아저씨 둘을 만났는데요. 나이가 되게 많은데 여자를 찾아 전국 각지를 떠돈데요. 그 아저씨들이 너네들 할 의향 있냐고 물어봐요. 그래서 우리가 없다 그러니까 우리 등쳐먹지 말고 빨리 사라지라고 그러는 거예요.” 지현이는 고아원 출신 친구(그는 고아원에서 친구들에게 끔찍한 구타를 당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때려서 나온 친구들과 함께 가출소녀의 메카 부평으로 흘러들었다. 그곳 나이트클럽 ‘삐끼’들을 헌팅해서 그들의 자취방에서 술먹고 노는 생활이 이어졌다. 일상적인 성폭행, 혹은 섹스가 있었다. 그러나 지현이는 돈 없으면 남자들과 성관계를 맺고 싶어서 ‘미치는’ 친구들을 보면서 회의가 들었다. 지금은 청소년 쉼터에서 살고 있다.
가출 청소년은 점점 증가하고 있다. 경찰청 182신고센터에 신고된 사례를 보면 1991년에 1만1414명에서 99년 1만7894명으로 증가했다. 98년 YMCA 조사 결과에서 전체 청소년의 76.4%가 가출 충동을 느낀다고 대답했다. 가출은 노는 아이들의 전유물도 아니다. 취재 중 만난 한 여학생은 평범하고 말 없는 아이들도 자주 가출한다고 대답했다. 위의 다섯 가지 유형은 기자의 임의적인 구분이다. 실제 가출 청소년들에게는 여러 이유가 중첩돼 있다. 가출 청소년들을 찾아다니며 미래 대중문화는 가출 청소년들이 이끌어가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 시대 가장 똑똑하고 예민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아이들도 더러 만났다.
그러나 이들은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이들이 가는 길 곳곳에 성매매와 폭력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가출 청소년들은 “우리가 ‘뽀리’(절도)지 않도록” 아르바이트할 여건을 만들어 달라고 말한다. 자유롭게 음악·문학·철학·미술을 배울 수 있는 기관들을 세우고 좀더 많은 곳에 쉼터를 만들라고 요구한다. 언제까지 이들에게 “집으로!”만 외치고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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