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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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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짱과 팬픽] 대중문화여 한번 놀아보자

등록 2003-12-04 00:00 수정 2020-05-02 04:23

[유현산 기자의 학교!]

얼짱과 팬픽 문화를 통해 돌아본 청소년과 대중문화의 역동적인 관계

공동취재 김민지 · 최정원/ 청소년 기획위원

청소년 하위문화에는 ‘철없는 짓’이란 낙인이 너무 쉽게 들러붙는다. 얼짱과 팬픽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그만큼 조심스럽다. 우리는 인터넷에 접속하거나 거실에 누워 TV를 켤 때마다 들리는 청소년들의 목소리를 애써 무시한다. 같은 작품이 대중문화에 편집증적으로 집착하는 일본 젊은이들(오타쿠)의 상상력에서 나왔다는 사실도. 청소년 하위문화의 역동성을 간파하는 이들은 오직 장사치들뿐이다.

얼짱 운영자와 연예기획자의 충돌

청소년 하위문화가 사회 담론으로 흘러오는 과정은 왜곡돼 있다. 팬덤은 ‘빠순이’(무분별한 스타추종), 외계어는 한글 파괴, 팬픽은 성적 문란, 얼짱은 외모지상주의와 짝지워진다. 이런 ‘진단’은 마치 청소년이 온갖 사회문제의 주범인 듯한 착시효과를 낳는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건 말도 안 되는 책임전가다. 외모지상주의를 청소년이 조장했단 말인가 한글 파괴의 주범이 청소년이라고 이야기되지 않는 것들 뒤에는 이야기할 가치가 있는 것들이 무수히 많다. 이것은 아직 충분히 보여지지 않은, 대중문화와 청소년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이경미(18)양은 어릴 때부터 얼굴에 관심이 많은 소녀였다. ‘비너스의 비밀’ 같은 자료들을 연구하기도 했던 그는 중학교 때부터 연예기획사를 차리는 것이 꿈이었다. 지난해 2월 그는 친구 류혜란(18)양과 함께 장난 삼아 ‘오대얼짱’(cafe.daum.net/5i)이란 인터넷 카페를 만들었다. 아직 얼짱이란 말이 보편화되기도 전이었다. “그냥 인터넷에 사진이 돌아다니는 예쁜 애들 몇몇 모아서 놀자는 생각이었죠. 혜란이와 회원 1천명이 모일지 내기를 했어요.” 1주일 만에 회원 수는 1천명을 넘었다. 현재 이 카페는 얼짱의 ‘등용문’이란 칭호를 받으며 39만명(!)의 회원 수를 자랑한다.

지금 매체를 달구고 있는 얼짱문화의 중심에 이들이 있다. 오대얼짱 카페의 짧은 역사 속에는 거대 연예기획사와의 충돌과 공조, 청소년들이 얼짱이라는 ‘장난감’을 ‘갖고 노는’ 방식 등이 녹아 있다. 오대얼짱이 화려한 성공을 거두자, 이경미양은 스무살이 돼서 더 이상 청소년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지 못하는 얼짱들도 정리할 겸, 2기 오대얼짱을 뽑기로 결심한다. 이때 한 연예기획사에서 얼짱 뽑는 이벤트를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기획사에서 자기들이 뽑은 오대얼짱을 그대로 올리라고 하는 거예요. 일단 그렇게 다섯명을 뽑았더니, 반응이 안 좋아서 안 하겠다고 말씀드렸죠.” 그러자 이 연예기획사가 노발대발했다. 심지어 “우리가 어떻게 했는데 니들이 그런 식으로 나오냐. 폭로하겠다”는 협박성 전화까지 걸려왔다. 청소년들이 만든 자발적인 스타시스템은 그 규모가 커지면서 대중문화 산업의 스타시스템에 흡수되거나 충돌할 위험에 처한다.

현재 연예기획사들은 인터넷에서 이름깨나 있다는 얼짱들을 포식하고 있다. 이경미양의 말에 따르면 오대얼짱 카페를 거액을 들여 통째로 사겠다는 기획사들도 있었다.

2기 오대얼짱의 우여곡절에는 팬들의 극성스러운 반응도 한몫했다. 2기 얼짱 중 한명의 성격이 안 좋다는 글이 카페가 마비될 정도로 많이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자기 집이 열두채라고 거짓말했다” 등 학교생활에서의 실수가 그대로 인터넷에 폭로됐다. 결국 이경미양은 투표를 통해 2기 얼짱 중 두명만 남기고 나머지 세명을 직접 찾아나섰다. ‘예쁜 얼굴’이 일단 얼짱으로 사랑받게 되면, 팬들은 일정 기준을 들이댄다. 얼짱은 다정다감해야 하고, 성실해야 한다. 얼짱은 얼굴로 뽑히지만, 얼굴만이 전부가 아니다. 그렇다면 얼짱의 생각은 어떨까?

얼짱 타이틀을 버리고픈 얼짱들

홍현아(17)양은 이경미양이 2기로 밀고 있는 ‘예비얼짱’이다. “엄마한테 내가 얼짱이라고 얘기했더니 그냥 막 웃어요.” 사소한 질문에도 얼굴을 붉힐 정도로 순진한, 아직 극성스러운 예비팬들에게 보여줄 어떤 콘텐츠도 준비되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는 프리챌 커뮤니티에 사진을 올렸다가 이경미양에게 발탁돼, 다른 ‘언니’ 한명과 함께 오대얼짱 운영자들과 일종의 ‘면접’을 봤다. 함께 있던 얼짱 후보생은 끝내 뽑히지 못했다. 연기자의 꿈을 꾸고 있는 홍양은 “열심히 노력하겠다”는 다짐을 반복했다. 그러나 일단 얼짱으로 유명해지면 홍양 같은 ‘순진함’만으로는 부족하다.

김준일(19)군은 얼짱문화 발생 초기부터 꾸준히 유명세를 탄 대표적 얼짱이다. 그는 얼짱이 되고 자기 팬 카페가 생기면 실물이 꽝이라느니 하는 안 좋은 소리도 따라다니게 마련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차차 자기관리를 하고 이미지를 좋게 만들면 그 사람 착하다는 평가를 받죠.” 지승호(20)씨도 “메일로 일일이 답변은 못해줘도 내 일기나 정보들을 계속 써줘야 한다”고 말한다. 즉, 얼짱도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스타처럼 팬관리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들은 연예계로 상승하려는 꿈을 갖게 되면서, 얼짱이란 타이틀을 부담스러워한다. 기획사에 들어가 연기자 훈련을 받고 있는 송미라(20)씨는 “인터넷 인기투표도 사무실 매니저들이 계속 클릭해서 표수를 올리는 경우가 많다”며 얼굴만으로 평가되는 얼짱문화는 곧 가라앉을 것 같다고 예측했다. 그 스스로 얼짱이면서도 송양은 얼짱보다는 신인 연기자로 알려지고 싶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연예기획사에서 ‘프로젝트’를 준비 중인 김준일군과 지승호씨도 “올해 8·9월을 정점으로 얼짱문화는 점점 사그라드는 추세이고, 이제 얼짱이란 타이틀은 가지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기존의 스타시스템에 올라서려는 얼짱들은 딜레마를 안고 있다. 연예인의 정체성을 갖기 위해 얼짱이란 이름을 버려야 하지만, 인기를 끌 때까지는 사진지기(포토숍으로 사진 올리는 운영자), 정보지기(언론 기사들을 종합하는 운영자) 등 체계를 갖추고 있는 인터넷 팬 사이트의 막강한 후원을 끌어안아야 한다. 여기에 얼짱과 얼짱 팬들의 긴장관계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청소년들은 왜 얼짱을 창조해냈을까. 그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얼짱들은 기존의 스타들처럼 멀리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직접 뽑은 또래 청소년이고 쪽지를 보내면 이내 답장이 오는 친근한 존재다. 이들은 스타시스템의 일방적인 소통을 거부하고 있다. 미국 유학생 민경(가명·17)양은 얼짱 인터넷 카페의 주인으로 활동 중이다. 그는 “미국 친구들은 한국 남자 얼짱들 사진을 보면 여자인 줄 안다”며 “얼짱문화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한국 10대들의 문화”라고 자랑스러워한다.

또 다른 카페 운영자 도진(가명)은 미스코리아 대회 같은 외모지상주의와 얼짱문화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얼짱처럼 되기 위해 성형수술까지 하는 청소년이 몇이나 되겠어요 우리는 연예인을 좋아하듯 얼짱을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에 너무 편견 갖고 보지 말아주세요.” 그는 은연중에 얼짱문화가 또 다른 팬덤임을 강조하고 있다.

얼짱의 팬들은 ‘키우는 재미’와 ‘소유하는 재미’를 동시에 느낀다. 즉, 자신이 좋아하는 얼짱이 점점 유명해지는 것을 즐기지만 대중문화 산업에 뺏기는 것은 원치 않는다. 이경미양처럼 연예기획사를 꿈꾸는 청소년은 소수다.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우리만의 얼짱”을 갖기를 원한다. 그래서 대중문화 산업과 얼짱문화는 공존과 충돌을 오가고 있다.

얼짱문화가 단기간에 뜬 것이라면 팬픽은 오랜 역사가 있고 향유층도 굉장히 다양한 문화다. 팬픽작가와 팬은 순수문학처럼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는데, 10대와 20대가 주력이다. 원래 팬픽은 아마추어 팬이 영화나 드라마의 줄거리나 캐릭터를 패러디해 쓰는 일종의 ‘속편’이었다. 그러나 한국 청소년들이 즐기는 팬픽은 주로 유명 가수에 집중돼 있다. 95년 H.O.T 팬픽이 시초라고 알려져 있다. 현재 H.O.T, god, 신화 팬픽이 가장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고, 그 중에서도 신화 팬픽이 큰 인기를 누린다. 팬픽은 동성팬픽과 이성팬픽으로 구분된다. 이성팬픽은 남자 스타와 여자 스타, 혹은 스타와 일반인의 사랑을 다루고, 동성팬픽은 주로 남성 그룹 멤버들간의 사랑을 다룬다.

팬픽은 과연 성적 문란인가

현재 동성팬픽 작품이 압도적으로 많다. 동성팬픽에는 이른바 ‘공식커플’이라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신화에는 민셩(이민우-신혜성), 릭진(전진-에릭), 완디(김동완-엔디) 등이 공식커플인데, 특정인이 정한 게 아니라 인터넷상에서 관습처럼 알려진 것이다. 커플마다 ‘공’(남성)과 ‘수’(여성)라는 역할이 정해진다. 민셩커플의 공은 이민우고 수는 신혜성이다. 때로는 공식커플의 해체해 다른 커플을 만들고 공과 수의 역할을 바꾸면서 새로운 텍스트가 생산된다. 이런 커플들의 사랑은 TV 쇼프로나 콘서트에서 팬들이 ‘만행’이라 부르는 행위를 통해 더욱 자극을 받는다. 예를 들어 특정 멤버가 손을 잡거나 다정한 포즈를 취하면 이런 행위는 곧 팬 사이트에 오르고, 이 ‘커플’에 대한 소설 쓰기가 활발해진다.

“꺄아아악-!!!이민우!!내려와!! 저..미친놈..내려오라고!!! 나는 지금 4층 높이의 아파트 난간을 걷고 있다. 저 끝에 보이는 내 친구들은 내려오라고 난리지만. 내려갈 생각 따윈 없다. 목표는 뒤돌아가는 게 아니라 건너가는 거니까.”

‘이민우, 신혜성을 덮쳐라’(cafe.daum.net/toddlf405)라는 신화 민셩커플 팬픽의 대표작가인 임수정(16)양이 쓴 팬픽의 첫 부분이다. 배가 다른 형제(이민우와 신혜성)가 서로 좋아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팬픽을 읽기 시작했고 6학년 때 처음 작품을 썼다. 가수를 좋아하게 되면 홈페이지를 드나들며 자연스럽게 팬픽을 접한다고 한다. 그는 신화 콘서트에 진을 쳐본 적도 없고 신화를 직접 본 적도 없다. 신화를 좋아해서 팬픽을 읽고 썼지만 이제는 팬픽 자체가 더 재미있다. 연재를 하다 쓰기 싫어 중단한 것을 빼면 지금까지 장편과 단편 합쳐 대여섯개 정도를 썼다. 지난해에 카페 인기투표 결과 월등히 많은 표를 받아 베스트 작가가 됐다(팬픽 사이트는 베스트 작가의 완결소설을 모아두는 베스트작가방, 회원들의 소설을 실는 연재방이 따로 있다).

“팬픽을 좋아하면서 글솜씨도 늘고 책도 많이 읽게 됐어요.” 좋은 팬픽이란 묘사의 능력에 달려 있다는 임양은 팬픽을 ‘성적 문란’으로 보는 어른들의 시선에 강하게 저항한다. “동성애를 나쁘게 보는 것부터 문제예요. 그리고 팬픽은 진짜 동성애에 빠져드는 게 아니라 우리가 좋아하는 가수를 우리가 상상하는 세계에 대입시켜보는 거예요.” 그는 신화가 해체돼도 끝없이 신화 팬픽을 쓸 것이라 한다. 그의 친구 중엔 작품에 대한 비평만 주로 쓰는 학생도 있다. “비평도 하나의 감성이라 생각하는데, 그 친군 정말 잘 써요.” 신화로부터 출발했으되 실제의 신화와 별개로 움직이는, 작가와 독자와 비평가가 고루 포진한 완벽한 체계. 팬픽의 시스템은 매우 정교하다.

의 저자 박은경씨는 “남성간의 연애를 다룬 일본 야오이물이 여성들에게 관음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고 남녀의 섹스에 대한 사회의 압박에서 벗어나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있는 장치를 제공해준다”고 말한다. 이는 인기를 끌고 있는 동성팬픽에도 대입될 수 있다. 동성팬픽의 주요 팬이 여학생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박씨는 팬덤의 주요 특징을 동성애보다는 생산성과 참여로 본다. “팬픽은 대중매체에서 걸러진 이미지를 수용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팬들 스스로 스타 이미지를 창조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연예산업과 충돌하며 공존하기

팬픽은 이미 출판시장에까지 진출했다. 특정 작가나 카페가 소규모로 주문제작해서 친구나 회원들에게 파는 책도 있지만 출판사와 정식으로 계약해 인세를 받고 대량으로 판매되는 책도 있다. 주문제작하는 책들도 구하기 어려우면 3만~4만원 이상 나가기도 한다. 대량 판매되는 팬픽은 주인공의 이름을 스타에서 일반인으로 바꾼다. 이미 팬들의 울타리를 떠나 제도권의 시스템에 진출한 책이라 볼 수 있는데 이지련씨의 등이 대표적인 예다.

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이 모습을 드러낸 뒤 청소년은 대중문화의 거대한 소비자로 떠올랐다. 때를 맞춰 등장한 거대 연예기획사들은 청소년들에게 다양한 아이돌들을 던져주며 수익을 챙겼다. 그러나 청소년들은 대중문화 시스템에 완전히 함몰되지 않고 능동적으로 반응했다. 일부에서는 ‘빠순이’로, 일부에서는 연예산업의 횡포에 저항하는 팬덤으로 불리는 부류가 나타났다. 그리고 팬픽이, 얼짱이 모습을 드러냈다. 팬픽은 주어진 스타의 이미지를 가공해 다른 텍스트를 만들어내면서, 얼짱은 자기들만의 아마추어적인 스타시스템을 구축하면서 연예산업에 대응한다.

청소년 문화는 대중문화 산업과 경쟁하거나 일부 흡수되며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청소년 하위문화에 부정적인 요소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역동성마저 무시할 수는 없다. 대중문화와의 관계 설정은 청소년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중문화의 십자포화 속에 살아가는 대중 전체의 문제다. 단지 청소년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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