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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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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 선생님] 괴짜 선생님, 진짜 선생님!

등록 2003-09-24 15:00 수정 2020-05-02 19:23
청소년들이 추천한 괴짜 선생님을 찾아… 그들이 더 이상 ‘괴짜’로 불리지 않는 미래를 위해

획일주의 교육은 적어도 고도성장기에는 효력을 발휘했다. 서울대를 정점으로 한 피라미드 구조에서 학생들은 대폭 확대된 교육의 기회를 맛보며 치열한 경쟁을 통해 자신의 계급을 확인하고 ‘산업역군’으로 편입됐다.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학생들을 앞으로 앞으로 밀어붙인 주입식 교육에 영광 있으라. 그리고 이제 좀 그만하시라. 국가·학교·교사·학부모·학생들이 함께한 이 거대한 공모에서 서서히 학생들이 떨어져나가고 있다. 전 세대들과 달리 소비자본주의의 세례를 맛본 학생들은 자신의 다양해진 욕망과 교실이 지구와 화성처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재빨리 깨닫는다. ‘학교!’가 앞으로 다룰 청소년 문화는 계속 이 징후들을 들춰낼 것이다. 점점 더 많은 학생들이 도피나 저항을 택하고 있다. 학교가 변하지 않거나 너무 늦게 변한다면 학생들은 의 문소리처럼 이렇게 외칠지 모른다. “당신은 아웃이야, 아웃!”

우리가 ‘괴짜 선생님’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청소년들이 이들을 추천한 이유는, 이들이 추구하는 다른 소통방식이 효과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교사 개인의 노력으로 학교를 바꿀 수는 없다. 이들이 더 이상 ‘괴짜’로 불리지 않는 시대를 앞당겨야 한다. 공교롭게도, 추천받은 교사들이 모두 남성이었던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여교사의 활동이 미약해서라기보다는, 아직도 주도적으로 교육프로그램을 이끄는 교사들이 남성 위주여서 여교사들이 학생들의 눈에 잘 띄지 않은 것 같다.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서울 선린중학교 김상만 교사] 오토바이 타고 긴 머리 휘날리며

상상해보자. 긴 머리 휘날리며 오토바이 타고 등교하는 선생님. 모범적인 ‘교사 패션’만을 보아온 학생들에게 이 얼마나 장관()이겠는가. 농담이 아니라 진짜 이런 즐거움을 주는 선생님이 있으니, 바로 서울 선린중학교 김상만(46) 선생님이다.

“우연히 오스트레일리아에 갔는데 한 학교 교장선생님이 귀걸이를 하고 있더군요. 다른 선생님들도 나름대로 독특한 모습을 하고 계셨어요.” 이때부터 선생님이 앞서가지 않으면 아이들에게 창의성을 길러줄 수 없겠다는 생각에 온갖 눈총을 무릅쓰고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학생들의 열광적 지지를 받았음은 물론이다. “교무실 분위기가 학교 분위기를 좌우하는데, 우리 사회에는 선생님들의 문화가 없어요.” 첫 발령을 받으면서, 김 교사는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보자고 결심했다. 동료 교사들을 술독에서 끌어내 사이클·축구·탁구·볼링을 시작했고, 전시회나 콘서트장을 돌아다녔다. 이러니 어찌 20년 가까운 교사생활이 즐겁지 않겠는가. 어찌 그의 얼굴이 10년은 젊어보이지 않겠는가.

그가 괴짜 선생님인 이유는 단순히 외모 때문만은 아니다. 국어과목 담당인 김 교사는 연극을 통해 학생들과 만난다. 1986년 새내기 교사로 부임하자, 학교는 으레 초임교사들에게 떨어지게 마련인 가장 힘든 일 중 하나를 맡겼다. 그것이 바로 연극반이었다. “아무것도 몰랐죠. 대학 때까지 연극을 딱 한편 봤어요.” 그런데 연극의 교육효과는 놀라울 정도였다. 지식교육에 절어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던 아이들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 학교 저 학교를 돌아다니며 연극수업을 견학하고, 직접 참여하면서 ‘내공’을 쌓기 시작했다. 지금은 한국교사연극회의 일원으로 일년에 한두 차례씩 큰 극장을 빌려 공연할 정도다.

“연극반에는 가끔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들이 많아요. 지식 중심의 교과과정에 적응하기보다는 자신의 끼를 발산하고 싶은 아이들이죠. 여기 이 아이들이 다 연극반이에요.” 그는 교무실로 향하는 복도에 한줄로 벌서고 있는 학생들을 가리키며 웃음을 터뜨렸다. 가끔 경찰서에 붙들려 가기도 하는 이 문제 많은 제자들이 나중에 훌륭한 배우가 되어 자신과 함께 공연하게 되는 일도 많단다. 그의 노력으로 선린중학교는 연극시범학교로 지정돼 일주일에 한번씩 연극수업을 진행한다.

처음에는 연극이나 공연을 뭐하러 보냐고 툴툴거리는 아이들도 한번 보고 나면 그 매력에 흠뻑 취한다. 그러나 어려움도 많았다. 연극반 지도를 하고 있을 때 학부모들이 찾아와 학원 가야 한다고 학생들을 데려가기도 했다. 김 교사는 학생들에게 될 수 있으면 많은 경험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도록 해야 한다고 믿는다. 지금 선린중학교의 행복한 아이들이 이 믿음을 확인시켜준다.

[경북 청송종합여고 이운락 교사] 산바람이 시를 실어나르다

대구에서도 버스로 세 시간을 가야 했다. 험준한 산자락을 넘는 동안 구불구불한 길이 몸을 마구 흔들었다. 버스에는 신산한 삶이 얼굴에 밴 촌로들과 그들의 억양 강한 사투리가 가득했다. 경북 청송은 그렇게 외진 곳이었다. 그리고 아름다웠다.

청송종합여자고등학교. 전교생 200여명에 인문계와 실업계가 합쳐진 자그마한 학교. 이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이운락(43) 선생님을 학생들은 “학교에서는 선생님, 밖에서는 아저씨인 사람”으로 부른다. 비오는 날 같이 우산 쓰고 퇴근하고, 가는 도중에 떡볶이도 먹는다. “뭐, 거의 친구죠.” 단언컨대, 이렇게 소박한 사람은 대한민국에 흔치 않다. 그를 추천한 제자의 말대로 “벗겨진 이마에 장난스런 말투, 친근한 모습”이다.
그는 교사이기 전에 시인이다. 대학 시절부터 줄곧 시를 써온 그는 졸업할 무렵 “시를 써서는 먹고살 수 없다”는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지금은 동인으로 활동 중이며 두권의 시집을 냈다. 학생들에게 틈날 때마다 ‘시 사랑’을 전파하는 것은 물론이다. 오죽하면 “영어 선생님인지, 국어 선생님인지 모르겠다”고 할까. 이러다보니 대학에 진학한 제자들 중 전업 작가를 꿈꾸는 학생들도 꽤 있다.
이 교사가 청송여종고에 부임한 것은 1989년 10월. 이제는 학생 이름만 대면 그 집에 숟가락이 몇개나 있는지까지 알 정도가 됐다. 학부모들은 가을 되면 고추 한근씩 갖다줄 정도로 정겹고, 가끔 막걸리 사발을 같이 기울인다. “여기 아이들은 껌 한 쪼가리 있어도 이거 씹으이소 하고 줘요.” 이런 질긴 인연은 학교를 졸업해도 끊어지지 않아, 여름이면 외지에서 찾아온 졸업생들과 강으로 천렵을 다닌다. “노래방에도 자주 가죠. 돈은 내가 내고.”
돈 없는 시골이라 가슴 아픈 기억도 많다. “열심히 공부해 대학에 합격했는데도 돈이 없어 못 갈 때 갸하고 같이 막 울었죠.” 대학에 합격되고도 포기한 학생들이 나중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되고 방송통신대를 졸업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가슴 한구석에 시원한 바람이 분다. 이 학교도 점점 학생 수가 줄어들어 몇년이 지나면 다른 학교와 통합해야 할 처지다.
학생들이 이 교사를 괴짜라고 부르는 또 다른 이유는 나이 40에 자가용을 몰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 촌동네에 차가 뭔 필요 있노”라고 이유를 밝히지만 속마음은 더 깊다. 걸으면서 학생들과 소소한 이야기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걸어다녀야 언제 나팔꽃이 피고 지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두 번째 시집 의 한 대목이다.
“시말서 쓰던 날/ 산바람은 골짜기를 타고 내려와/ …풀밭 위에 쓰러지고 있었다/ 누가 나에게 돌 바람을 몰고 오는가/ 가르치는 자들의 힘없는 시대/ 부러진 분필 한 자루 역풍에 나둥거리는.”


[전남제일고등학교 고재성 교사] 개량한복, 수지침, 그리고 별명

전남 목포에 있는 전남제일고(옛 목포상고) 고재성(44) 국어교사. 그를 설명하기엔 이 지면이 너무 좁다. 마르고 닳도록 입고 다니는 개량한복(그가 ‘우리옷’이라 부르는), 틈만 나면 학생들과 함께하는 풍물, 아픈 학생들이 병원보다 신뢰하는 수지침, 완고한 채식주의와 하루 두끼 먹는 습관, 교사집 방문하기, 학생에게 별명과 시 지어주기….

그는 1985년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된 뒤 복직하기까지의 4년6개월을 “오히려 행복했던 순간”이라 말한다. 전교조 전남지부 문화부장으로 활동하면서 하고 싶었던 일들을 원없이 다 해봤다. 대학교 때부터 관심이 많았던 풍물을 배우고 수지침까지 덤으로 배웠다. 맥까지 짚은 뒤 놓는 수지침 실력이 수준급이라 학생들뿐만 아니라 교사들도 애용할 정도다. “처음에는 주위에 계신 엄니나 아부지 놔주다가 복직해서는 애들을 ‘마루타’로 삼았죠. 효과가 있응께 찾아오겠죠.” 학교에서 쫓겨날 때 장대비 맞으며 선생님을 돌려달라고 외쳤던 제자들은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2000년에 (그 젊은 나이로!) 그 중 한명의 주례를 서기도 했다.

‘우리옷’은 93년부터 입기 시작했다. 말이 겨레의 얼을 나타내듯 옷도 그럴 거라는 믿음에서다. 처음 옷을 입고 나타나자 이전 학교 교감선생님이 “어째 선생님이 정장을 하제 그런 옷을 입고 다닌다요”라고 훈계했다. 그의 성격이 어디 이를 참아넘길 수 있는가. “아 당신이 뭔디 입어라 말아라 하쇼 정 그러면 헌법소원이라도 하겄소.” 이렇게 ‘우리옷’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채식에서도 고 교사의 고집이 드러난다. “괴기란 괴기는 다 묵고 살었던” 그는 지난해 육식의 폐해에 대한 책 한권을 읽고 일체의 고기를 끊었다. 촌지 문제 때문에 가정방문을 포기하는 대신, 반 아이들이 조를 짜 선생님 집을 찾아오게 한 뒤에도 육식 대신 ‘콩고기’를 대접한다. ‘교사집 방문’을 시작한 동기를 묻자, 이런 대답이 날아온다. “교실에서 애들을 백날 만나봤자 안 좋아요. 집으로 부르고 같이 걸어가면서 얘기해야지.”

고 교사는 담임을 맡으면 반 학생 전원에게 별명을 지어주고 시를 한편씩 보내준다. 그를 추천한 학생의 별명은 ‘코스모스’고 시는 “푸른 가을 아래 하늘거리는/ 코스모스를 닮은 아이야”로 시작한다. 그 학생의 말에 따르면 “얼굴이 무지 까맣고 험악하게 생긴 애가 있는데, 선생님이 너 무지 상큼하게 생겼다며 네 별명은 상큼이야”라고 하더란다.

학생들을 점수 받는 로봇으로 만드는 교육을 바꾸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불평등부터 때려잡아야 한다고 말하는 고 교사. 목포 막걸리에 취해 한밤중 들이닥친 그의 집에서 맛본 콩고기 요리는 정말 맛있었다. 단잠을 깬 부인께는 죄송하지만.

[경기도 파주중학교 신종균 교사] 저기 백두대간의 끝자락이!

파주중학교 신종균(47) 국어교사는 대학 때까지 산을 몰랐다. 1984년 교사로 부임한 뒤 소풍 삼아 학생들과 산에 오르면서 긴 여정이 시작됐다. 98년 산을 좋아하는 아이들과 함께 북한산 원효봉에 올라 ‘파주마루’라는 동아리를 만들었다. 마침내 올해, 그는 학생들과 백두대간 종주의 첫발을 내디뎠다. 2006년까지 한달에 한번씩 길을 나서 덕유산부터 설악산 진부령까지 오르는 거대한 계획이다. 지금은 영동과 김천의 경계인 우두령까지 왔다.

그가 고된 산행을 강행하는 이유는 입시 위주의 수업에 한계를 느껴서다. 덕유산을 오를 때 학생들이 지쳐 선두와 후미의 거리가 벌어졌다. 안 되겠다 싶어 학생을 선두에 세우고 자신은 후미로 빠지자, 교사가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갑자기 속도가 났다. “애들한테 자기들이 끌고 간다는 동기 부여를 하니까 그렇게 되던데요.”그는 이런 모습이 우리 교육의 핵심이 돼야 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파주중학교는 살림이 어려운 학부모가 많고 유흥가 용주골 등이 있어 교육환경이 썩 좋지 않다.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들이 신 교사의 ‘포섭 1순위’다. 가장 기억에 남는 학생들도 여러 문제로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학생들이다. 대부분 어렵게 생활하거나 유흥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지만 ‘마지막 선생님’을 잊지 않고 1년에 한번씩 찾아준다. 교육을 교사와 학생의 인간적인 커뮤니케이션으로 정의 내리는 신 교사는 고등학교 시절 은사이자 현재 야구해설가로 활동 중인 하일성씨를 가장 기억나는 선생님으로 꼽는다. 산행은 자신도 그런 ‘인간적’인 교사가 되기 위한 노력이다. 때론 대학생이나 사회인이 된 제자들이 산행 때마다 찾아와 여러모로 힘이 돼주기도 한다.
아찔한 경험도 있었다. 경부고속도로 황간 나들목에서 과속하던 승용차가 학생들이 탄 버스를 들이받아 종주의 꿈이 산산조각 나버릴 뻔한 적도 있다. 98년 서울 4개산을 종주할 때는 학생 두명이 졸도해 그 중 한명은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학부모가 신 교사를 야단치는 당직의사에게 “우리 애 잘 가르치려고 노력하시는데 왜 야단치냐”고 따질 때는 가슴이 찡했다. 안전이 가장 큰 문제인 만큼, 산에 갈 때마다 보험을 들고, 학교 안전공제회에 가입하고, 그도 부족해 보험을 하나 더 들었다. 아는 등산로를 다시 머릿속에 입력시키고, 비상연락처를 꼼꼼히 챙기고 지역 산악회에도 연락해 놓는다. 지난해에는 산에서 써먹기 위해 아마추어 무선햄 자격증도 취득했다.
학생 1인당 2만5천원씩 받는 회비로는 운영이 불가능해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왔는데, 내년에는 3만원으로 올려볼까 한다는 신 교사. 보람을 묻자 “보람은 무슨, 다 내 만족이고 내 삶이지”라고 대답하는 신 교사. 그에게선 사람 냄새가 난다.


[부산진고등학교 이상석 교사] 교과서 없는 국어시간

영화 에서 대학 진학만을 목표로 공부하는 아이들에게 “현재를 즐기라”는 파격적인(?)을 말을 하며 과감히 교과서를 던지게 했던 키팅 선생. 키팅 선생 역의 로빈 윌리엄스보다 배만 좀 더 나왔을 뿐, 그 못지않은 푸근한 인상을 가진 이상석(51) 교사의 수업시간에도 교과서가 없다.

“국어 재량 시간을 맡고 있는데 정말 재량껏 수업합니다. 교과서는 아이들이 알고 싶어하지 않는 것들로 가득 차 있죠. 아이들 스스로 정한 주제를 탐구하고, 토론하고, 정리합니다.”

숙제도 잘 안 하고, 말도 안 듣고, 진지한 면도 없다는 ‘요즘 아이들’을 데리고 가능할까 싶지만 그가 수업을 맡은 12개반 아이들 모두 열심히 글을 쓰고 수업을 준비해온다. “이유요 내 경험상 믿음으로 함께했을 때 결코 실패하지 않아요. 교사는 아이들에게 신념에 가까운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사랑·자율, 이런 것들은 아이들과 만나서 이루는 생활을 통해 이루어져요.”

삶 속에서 아이들을 만나야 한다는 이 교사에게 청소시간도 함께하기 좋은 기회다. 가급적이면 아이들 가정방문을 하는 것은 물론 아이들도 종종 자신의 집에 데려와 사는 모습을 보여줬다.

무엇보다 이 교사가 삶을 함께 나누는 방법으로 꾸준히 해오는 것은 반 전체가 함께하는 ‘모둠 일기’ 쓰기다. 5~6명으로 구성된 모둠마다 한명씩 매일 돌아가면서 솔직하게 쓰는 이야기는 학기말 한권의 문집으로 아이들에게 주어진다. 모둠 일기를 쓰면서 아이들이 서로 삶을 알고 같이 어울려 살 수 있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배운다. 등의 책을 쓰기도 했던 그는 “글쓰기야말로 생활 속에서 늘 할 수 있으면서 사람을, 삶을 열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한다. 졸업한 아이들 이름은 간혹 잊어도 글은 잊지 않는다는 이 교사는 글쓰기를 통해 아이들의 삶을 가꿔주려는 선생님들과 함께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스스로가 귀한 존재임을 가르쳐주고 싶다는 이 교사는 대부분의 아이들을 들러리로 만드는 입시교육의 병폐인 보충수업을 하지 않는다. 성공하기 위해 아이들을 끊임없이 경쟁으로 내모는 것이 교사의 역할은 아니라고 얘기한다.

“만약 교사가 되고자 하는 아이에게 다른 사람과 경쟁을 해서라도 어떻게든 되라고 했을 때, 옳은가요 무조건 성공하게 하는 것보다 아이들의 마음에 아름다움을 잃지 않게 하면서 게으름을 부리지 않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경쟁사회에서 딜레마를 느낄 때가 많지만, 그런 아름다운 마음을 갖고 있다면 결국 늦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길로 갈 수 있을 겁니다.”- 제정희/ 6기 독자편집위원

[부산 해운대여중 곽태훈 교사] 모름지기 학교는 재밌어야 한다

학교는 재밌어야 한다! “밖에서도 정말 힘들어하는 아이들 아닙니까? 학교에서라도, 나만이라도 즐겁게 해줘야죠.” 3월이면 온 교실을 물바다, 비누 거품 천지로 만들어놓는 대청소에서부터, 함께 모여 여는 떡볶이·삼겹살 파티. 아이들 모습을 일일이 사진에 담아주는 것까지 발령 첫해부터 재밌겠다 싶은 것이면 무엇이든 다 했다. 그렇다고 단순히 웃고 떠들기만 한 것은 아니다. 여기엔 교사로서 ‘다름’을 전하기 위한 기본적인 고민이 깔려 있다. “내가 자랄 때 선생님들의 모습은 거의 똑같았죠. 그 속에서 아이들의 다양성은 없어지고 개성은 죽습니다.” 하지만 그런 곽태훈(41) 교사에게도 시련의 시기가 있었다.

“교직 생활 3~4년쯤 됐을 때 아이들과 소통이 안 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난 좋아서 열심히 준비해간 이야기를 듣기보단 놀려고만 하니 얘기를 시작하는 것부터가 힘들었죠.” 그러다보니 점점 감동이 아닌 전달만 하게 되는 자신의 모습에서 ‘교사로서의 존재 이유’에 대한 고민까지 하게 됐다. 그러다 우연히 연극을 봤다. 아이들이 돈까지 내가면서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받아가는 연극을 보면서 뭔가 배울 것이 있겠다 싶었고, 수소문 끝에 교사 연극 단체를 찾아갔다. “그런 식으로 온 사람은 아직도 저밖에 없어요.” 절박한 마음에 시작한 연극에서 곽 교사는 아이들과의 만남의 해법을 찾았다. “연극은 결국 나를 전달해야만 하는 거잖아요. 나를 컨트롤하고 표현하는 방법을 많이 배웠어요. 또 조·종례 시간을 이용해 율동도 하고 노래도 하고, 그렇게 몸도 풀고 마음을 열게 하는 데도 연극이 도움이 돼요.”
지난해 학교 축제 때는 몇몇 젊은 교사가 아닌 나이 지긋한 교사들까지 무대에 올라 공연을 했다. 그것이 학생과 교사간의 거리를 한층 좁히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 해운대여중에서 연극반을 꾸려가는 동시에 ‘조명이 있는 교실’이라는 교사 연극 단체의 공연에도 한몫하고 있다.
나만이 전해줄 수 있는 것을 찾는 곽 교사의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이해하고 더 알아갈까 하는 고민에서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자신의 홈페이지를 방문하는 아이들에게 빼놓지 않고 정성스런 답글을 꼭 달아주는 한편, 매일 교단일기를 적어 자신의 마음을 전한다.
학교에 사진반을 처음 만들 정도로 사진에도 관심이 많은 곽 교사는 요즘 디지털카메라에 빠져 있다. “무조건 똑바로 앉아 들어야하는 교사의 원맨쇼, 교육은 그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데서 어려움이 있어요.” 아이들과 만날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찾아가는 곽 교사에게만큼은 참교육은 어렵지 않을 것 같다.

- 제정희/ 6기 독자편집위원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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