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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역사를 새긴 만남의 다리

등록 2003-11-06 00:00 수정 2020-05-02 04:23

[조선시대의 광통교와 수표교]

광통교와 수표교는 ‘단지’ 청계천의 대표적인 다리가 아니었다. 한양에서, 나아가 조선에서 가장 유명한 다리들이었다. 광통교(우리말로 ‘넓은 다리’)가 이름을 얻은 것은 무엇보다 광통교가 광화문 앞에서 시작해 운종가(종로1가)와 종루(종각)을 거쳐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조선 국중대로(國中大路)의 한복판에 놓여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이런 사정은 1750년대 조선의 옛 지도인 ‘천하도책’ 가운데 ‘한양도’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지도에는 한양의 근간 시설인 도성과 성문·궁궐·성균관만 표시돼 있으며, 이 밖에 표시된 것은 오직 ‘광통교’와 ‘종루’뿐이다. 더욱이 광통교는 운종가와 함께 시전이 집중된 상업의 중심지였으며, 도성의 수많은 백성들이 모이고 만나는 장소였다. 조선시대 대표적 민속놀이인 다리밟기와 연날리기가 광통교와 수표교에 집중된 것은 이런 까닭이었다.

광통교는 또 조선 초기 권력투쟁을 생생히 증언하는 유물이다.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이방원은 집권 뒤 정적인 방석의 생모이자 자신의 계모인 강씨의 무덤을 도성 안 정(릉)동에서 도성 밖 정릉으로 파옮기면서 그 묘지석을 광통교의 다리끝받침돌(교대석)로 사용했다. 계모의 묘지석을 사람들이 늘 밟고 지나는 대로상 다리의 받침돌로 사용함으로써 일종의 복수를 한 셈이다.

광통교는 일제시대 전차 놓기와 해방 뒤 복개 공사로 선로와 콘크리트·아스팔트에 짓눌려 있다가 청계천 복원 공사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현재 기둥과 귀틀돌, 멍에돌은 그 자리에 상당 부분 남아 있고, 난간 일부는 창덕궁에 옮겨져 있으며, 상판은 사라진 상태다.

광통교가 대단히 정치적이고 남성적이라면 수표교는 대단히 여성적이고 낭만적인 다리라고 볼 수 있다.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가 지은 책 (돌베개·원제 과정록) 37쪽에는 수표교에 얽힌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와 있다.

“연암이 어느 눈 오는 밤 담헌 홍대용의 집에서 선배인 효효재 김용겸과 어울려 유명 음악인 김억의 양금 연주를 들었다. 김용겸은 구리 쟁반을 두드리며 의 ‘벌목’ 장을 신나게 노래하다가 갑자기 사라졌다. 연암과 담헌이 김용겸을 찾다가 눈 덮인 ‘수표교’ 위에 거문고를 비끼고 앉아 달을 바라보는 그를 만났다. 그래서 악기와 술상을 수표교 위로 옮겨다 놓고 늦게까지 놀다가 헤어졌다. 연암은 이를 두고 ‘효효재가 돌아간 뒤에는 다시는 이런 운치 있는 일이 없었다’고 회상했다.”

길이 27.5m, 너비 7.5m의 수표교는 세종 때인 1420년 놓였으며, 영조 때인 1760년 바로 옆에 수표석이 놓이면서 ‘수표교’(물잰다리)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수표교는 1959년 복개와 함께 거의 완전한 형태로 장충단 공원에 옮겨져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됐으며, 세종대왕기념관에 옮겨진 수표석은 보물로 지정됐다.

이 밖에도 지류를 포함한 청계천 전체에는 75개 정도의 다리, 본류에는 10여개의 다리가 남아 있었으나 모두 사라졌다. 지난 10월22일 중앙문화재연구원은 장통교·하랑교·효경교·오간수문교 등의 터에서 유구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김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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