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 9월4일 오전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자작리 마을회관 앞에 찾아온 이동식 슈퍼마켓 ‘행복마차’ 주변으로 미리 나와 있던 어르신들이 모여들어 달걀과 우유, 채소 등 식료품을 고른 뒤 계산을 기다리고 있다. 한겨레 송상호 기자
2026년 9월4일 오전 10시20분께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자작리 마을회관. 이동식 슈퍼마켓인 ‘행복마차’가 올 때까지는 시간이 20분가량 남았지만 경로당으로도 쓰이는 이곳 앞마당에는 벌써 장을 보러 나온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7월 시범운행 때부터 금요일은 행복마차가 자작리를 찾는 날이다. 운행 두 달째로 접어들면서, 주민들은 이 시간에 맞춰 미리 나와 담소를 나누며 기다리는 게 일상이 됐다.
10시40분이 되자, “행복마차 왔어요~” 음악 소리가 점점 커졌다. 노란색 1t 저상트럭이 회관 앞으로 들어오자, 경로당 문도 함께 열렸다. 순식간에 어르신 10명이 차량을 에워쌌다. “내가 저번에 얘기한 삼겹살은 어디 있어?” “오늘은 왜 그 젊은 총각이 안 왔어?” “아줌마 좀 비켜봐, 나도 좀 사게.” 가판대 앞이 금세 북적였다. 한 할머니는 고등어를 골랐다가 임연수가 더 맛있어 보인다며 바꿔달라고 했다. 행복마차가 일주일에 한 번씩 오는 날이 ‘장날’처럼 자리 잡은 모습이었다.

2026년 9월4일 오전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자작리 마을회관 앞에서 주민들이 ‘행복마차’에 진열된 식료품과 생활용품, 냉동식품 등을 살펴보고 있다. 이날 운행은 사회적기업 해피트리의 시니어 직원이 맡았다. 한겨레 송상호 기자
인근에 사는 반예섭(78) 할머니는 평소 장을 보려면 버스로 20분 정도 걸리는 파주시 적성면 하나로마트까지 가야 한다. 하지만 파주에서는 연천 지역화폐인 ‘노랑 카드’를 쓸 수 없는데다, 남편이 나이 들어 운전을 그만두면서 차도 반납했다고 한다. 반 할머니마저 운전을 못 해서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 와중에 행복마차가 일상에 자리 잡은 요즘, 반 할머니는 매주 금요일만 기다린다고 했다. “차가 없으니까 장보기도 그렇고 일상이 너무 불편한데, 이렇게 마차 가득 물건을 싣고 올 때마다 얼마나 좋은지 몰라.”
행복마차는 1t 저상트럭 짐칸 곳곳에 동네 슈퍼를 옮겨놓은 듯한 이동식 장터로 꾸며져 있다. 양옆 덮개를 올리면 라면과 과자, 장류, 식용유, 세제 등이 모습을 드러낸다. 냉장·냉동칸에는 두부와 채소, 고기와 생선도 들어 있다.

2026년 8월17일 오전 경기도 연천군 중면 삼곶리 경로당 앞마당에서 신현창 할머니가 ‘행복마차’ 진열대를 살펴보고 있다. 옆에서 김성찬 해피트리 팀장이 물건을 안내하고 있다. 한겨레 송상호 기자
가져가기 무거운 물건은 집까지 배달도 해준다. 8월17일 오전 중면 삼곶리 경로당 앞 행복마차에서 장을 본 신현창(78) 할머니도 두부와 때비누를 고른 뒤 달걀 한 판, 두유 24개들이 묶음, 고추장까지 잇따라 집었다. 할머니가 달걀과 두유를 들고 가기 어렵다고 하자, 운영을 맡은 사회적기업 해피트리의 김성찬 팀장은 다음 마을로 가기 전 할머니 집에 들러 물건을 내려줬다.
이보다 닷새 앞선 8월12일 오후 2시께 청산면 태창아파트에서도 80·90대 주민들이 보행기와 지팡이에 의지해 행복마차 앞으로 나와 장을 봤다. 이원자(88) 할머니는 “혼자 사시는 분들은 시장을 못 가잖아. 차도 없고. 아들딸이랑 같이 사는 사람도 드물어. 노인정에 오는 사람도 대부분 혼자 살아. 이렇게 마차가 오면 편하지”라고 말했다. 가게가 아주 멀지 않더라도 차가 없고 거동이 불편한 고령 주민에게는 장을 보고 물건을 집까지 가져오는 일이 쉽지 않은데, 행복마차는 이런 사각지대를 메우고 있다.

2026년 8월12일 오후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 태창아파트에서 80·90대 어르신들이 보행기와 지팡이에 의지해 ‘행복마차’로 장을 보러 나오고 있다. 행복마차는 정해진 시간에 마을을 찾아 생필품을 판매한다. 한겨레 송상호 기자
같은 날 오후 2시40분께 초성2리 경로당 뒷마당에는 할머니 10명 안팎이 모였다. 김양숙(76) 할머니는 애초 콩나물만 살 생각이었지만 이웃이 냉동삼겹살을 고르는 걸 보다가, 갑자기 고기가 맛있어 보여 온 김에 충동구매를 해버리고 멋쩍게 웃었다. 옆에 있던 주민도 “나도 하나 사야 돼”라며 따라 골랐다. 김 할머니는 장보기를 마친 뒤 다음 방문 때 다시다와 고등어를 가져와달라고 주문하고 연락처를 남겼다. 할머니들은 장을 보는 내내 화기애애하게 농담하고 장난도 치면서 서로 근황을 물었다. 행복마차가 머무는 25분이 잠시나마 사랑방 구실을 하고 있었다.
경기도가 2026년 처음 도입한 ‘행복배달 소통마차’는 농촌의 ‘장보기 공백’과 ‘식품 사막화’를 줄이기 위한 사업이다. 연천은 정부 농어촌기본소득 시범지역으로, 2월부터 신청 주민에게 매달 15만원을 연천사랑상품권으로 지급하고 있다. 하지만 돈이 생겼다고 장보기가 저절로 쉬워지는 것은 아니다. 고령 주민은 멀리 이동하기 어렵고, 외곽 마을에는 지역화폐를 쓸 만한 곳도 많지 않다. 장남면 자작리처럼 가까운 주요 장보기 거점이 행정구역 밖에 자리한 마을도 있다. 행복마차는 이런 틈을 메워 기본소득을 주민들이 생활 속에서 쓸 수 있게 하는 실질적인 사용처가 되고 있다.

2026년 8월12일 오후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 초성2리 경로당 뒷마당에서 김양숙 할머니(왼쪽)가 옆 동네 할머니가 냉동삼겹살을 살펴보자 덩달아 관심을 보여 냉동삼겹살을 충동구매했다. 한겨레 송상호 기자
연천군은 7월6~24일 6개 면 34개 마을과 사회복지시설 2곳에서 행복마차를 1차 시범운행했다. 이후 한 주 동안 운행을 멈추고 주민의 반응을 살피며 차량 운행 시간과 노선을 조정하고, 주민들이 자주 찾는 물건도 더 실었다. 마을마다 장을 보러 나오는 시간과 필요한 물건이 달라 그런 점도 반영했다. 8월3~21일 2차 시범운행을 거친 뒤, 8월31일부터 본운영에 들어갔다.
본운영과 함께 노인 일자리도 연계했다. 운영을 맡은 연천 사회적기업 해피트리는 김성찬 팀장과 시니어 직원 두 명이 운행과 판매를 나눠 맡고 있다. 기자가 자작리를 찾은 9월4일은 이 가운데 한 시니어 직원이 처음 혼자 판매를 맡은 날이었다. 앞선 운행 때 몇 차례 따라다니며 운전과 차량 문을 여닫는 일부터 익힌 그는, 이날 주민들이 내미는 물건을 하나씩 받아 계산하고, 주문도 챙겼다. 장보기가 힘든 지역 어르신을 위해 만든 사업을 또 다른 지역 어르신이 맡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진 셈이다.
노란 트럭이 노랫소리를 울리며 연천의 마을을 돈 지 두 달. 처음에는 낯선 이동식 슈퍼였지만 이제 주민들은 경로당에 미리 나와 기다리고, 지난주 부탁한 물건을 찾고, 옆집 할머니를 데리고 나온다. 마차가 머무는 20여 분 동안에는 이웃이 고른 반찬거리를 들여다보고 서로 안부도 묻는다. 물건을 싣고 찾아오는 트럭 한 대가 어느새 일주일에 한 번씩 마을로 돌아오는 정겨운 장날이자, 따스한 사랑방이 됐다.
연천=글·사진 송상호 한겨레 기자 ss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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