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아이들아, 고민이 뭐니?”

등록 2002-08-21 00:00 수정 2020-05-02 04:22

청소년 프로그램 ‘N클리닉’으로 방송대상 수상한 기독교방송 이재성 PD

정말 힘들게 이뤄진 인터뷰였다. 이재상(33)씨는 “나처럼 아무 특별한 것이 없는 사람에게는 정말 들을 얘기가 없을 것”이라고 완강히 마다했고, 나는 “그렇다면 지금까지 나와 맺은 모든 인연을 끊겠다는 뜻이냐?”고 협박까지 하면서 포기하지 않았다. 내가 “길 가는 사람 아무나 붙들고 얘기해도 소설책 몇권 분량의 사연을 간직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했더니 이재상씨는 “정 그러면 길 가는 사람 아무나 붙들고 하십시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저 친구는 잘 모르겠다니까요”

기독교방송의 프로듀서(PD)로 일하고 있는 이재상씨가 자신을 가리켜 “아무 특별한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은 어찌 보면 맞는 말일지 모른다. 기독교방송의 한 고참 아나운서에게 “이재상 PD가 어떤 사람이에요?”라고 물었더니 “글쎄, 내가 저 친구만 잘 몰라요. 다른 PD들은 다 알거든. 김O욱 PD도 알고, 박O PD도 알고… 그런데 솔직히 저 친구는 내가 아직 잘 모르겠어요”라고 말했을 정도니까….

이재상씨는 별로 튀지 않는다. 걸음걸이도 조용조용하고 말도 별로 없어서 가까이 다가와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를 할 때까지는 인기척도 없다. 그래서 몇 개월 전 이재상씨가 머리를 길게 기르기 시작했을 때, 나는 “아, 저 얌전한 친구가 드디어 세상에 대해 저항하기 시작하는구나”라는 느낌을 받았다. “내친김에 꽁지머리를 한번 해보지 그래요”라는 내 말에 그는 “한번 그래볼까 생각 중이긴 한데…”라고 답했고, 나는 그때 이미 ‘꽁지머리를 맬 즈음에 이재상씨를 인터뷰해야겠다’고 작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다시 머리를 짧게 잘라버리는 바람에 우리는 결국 그의 튀는 모습을 볼 기회를 잃었다.

그리 얌전한 이재상 PD가 일을 저질렀다. 한국방송협회가 주관하는 방송대상을 받게 된 것이다. 제29회 한국방송대상에서 이재상 PD가 제작하는 기독교방송의 ‘N클리닉’이라는 프로그램이 ‘라디오 어린이·청소년 부문’ 수상작품으로 선정된 것이다. 우리나라 라디오에서 방송되는 어린이·청소년 대상 프로그램이 얼마나 많은가? 흔히 ‘심야방송’이라고 하는 청소년 프로그램만도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우리나라 모든 라디오 프로그램들 중 딱 한 작품을 선정하는 데 뽑힌 것이다. ‘방송대상’이란 방송인들에게 평생에 한번만 받아도 가문의 영광이 될 수 있는 명실상부한 큰상이다. 이재상씨는 “앞의 선배님들이 잘하셨기 때문이죠”라고 송구스러워했다.

‘N클리닉’은 심야에 방송되는 ‘청소년 문제 상담 프로그램’이다. 예전에도 청소년의 고민을 상담하는 라디오나 인터넷상의 프로그램들은 많았다. ‘N클리닉’은 출발할 때부터 “교과서식 상담의 틀을 벗어나자”는 목표가 분명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 내용이 요일마다 다채로웠지만, 이재상 PD는 ‘N클리닉’을 맡으면서 몇 가지 새로운 시도를 했다.

청소년들과의 ‘끊임없는 대화’

월요일에는 ‘버둥이 아빠(출연하는 정신과의사 손석한씨의 별명)의 심리학 노트’라는 코너를 마련해서 심리학 용어를 설명하는 것으로 청소년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스스로 점검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보았다. 청소년들은 이 코너를 통해 자칫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는 정신분석이라는 분야에 친숙하게 접근할 수 있었다.

화요일과 목요일에는 ‘생생토크’라는 시간을 마련했다. 청소년들의 고민을 리포터가 거리에 나가 직접 듣는 것이다. 아무 청소년이나 붙들고 “고민이 뭐니?”라고 묻고 그 내용을 담아오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또 다른 거리에서 만난 청소년에게 “이런 고민이 있는 친구가 있는데, 너라면 어떻게 하겠니?”라고 물으면서 고민을 함께 풀어본다.

별자리 사회심리극연구소와 함께 심리극으로 청소년의 문제를 스스로 들여다보는 시간도 마련했다. 마음과의 대화, 역할 바꾸기 등을 통해 고민을 펼쳐보이고 상대방의 입장에 서보기도 하면서 스스로 문제를 풀어가는 것인데 반응이 아주 좋다.

상담 전문가는 아니지만 의미 있는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이 출연해 청소년들과 생활·진로·가족 문제 등에 대해 폭넓은 얘기를 나누는 목요일 코너도 이재상씨가 새로 시작한 기획이다. 상품화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들만 수두룩한 세상에서 이러한 내용의 청소년 프로그램이 대상을 받지 못하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내가 상담자라고 가정해봐도 감이 잘 안 오고 막막한 경우가 많은데, 10분 또는 20분의 시간만으로 청소년 문제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줄 수 있으면 그것이 오히려 잘못된 것이죠. 청소년과 끊임없이 ‘대화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청소년들의 고민을 내용의 제약 없이 듣고 얘기해보자는 것이죠.” 청소년들과의 ‘끊임없는 대화’는 기독교방송의 인터넷 웹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듣는 중에 “내용의 제약 없이”라는 단어가 머리에 와서 박힌다. 그것이야말로 기독교방송이 모든 문제에 접근하면서 다른 방송국과 다르게 구별되는 차별성이 아니던가….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기독교방송과 방송 노동자의 정체성에 관한 쪽으로 넘어갔다. 명색이 노동문제연구소 소장인 나로서는 묻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을 했다. “기독교방송노동조합이 265일 동안 장기파업을 했지요? 파업 기간의 임금을 결국 보전받지 못했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처음부터 돈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걸 꼭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9개월 동안 임금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 이곳을 그만둬야 하는 이유가 되지만 않으면 저 개인적으로는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파업 그리고 돈

우리 사회에서 노동조합을 곁에서 지켜본 세월이 20년이 넘은 나로서는 그것이 평소부터 궁금했다. 불필요하게 “물고늘어진다”는 느낌이 전혀 없지 않았으나 한번 더 짚었다. “조합원들로부터 노동조합 집행부에 대해 파업 기간의 임금을 보전받지 못한 것에 대한 규탄의 목소리가 거의 없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신기한 일 아닙니까?” 이재상씨는 마치 대답을 미리 준비한 사람처럼 차분하게 답했다. “기독교방송에 들어온 사람들 중에서 월급 때문에 이 직장을 선택한 사람은 없었을 겁니다. 이 방송사에 들어오면서 모두들 자신이 펼치고 싶은 꿈들을 간직하고 있었을 텐데, 결국 그 조건을 만들기 위한 싸움이었니까요. 그렇게 오래 파업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었어요.”

“진실을 알려거든 일단 부정하라”고 누가 그랬더라…. “그래도 9달이나 파업을 했는데 파업으로 인해 손해를 봤다고 느끼는 것이 전혀 없을 수는 없잖아요?” 짓궂게 계속 물고늘어지는 내 질문에도 대답은 솔직하고 정연했다. “한창 일하고 배우면서 열심히 뛰어야 할 시기였는데 일에서 떨어져 있어야 했다는 것이 당연히 아쉬움으로 남죠. 하지만 우리는 그나마 언론사의 파업이라고 관심을 가져준 사람들이 많은 편이었어요. 요즘 보면 우리보다 더 길게, 더 막막한 상황에서, 아무 기댈 곳 없이 싸우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그 사람들에 비하면 그래도 우리는 나은 편이었어요.” 265일 동안 임금 한푼 받지 않고 싸운 파업이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는 데야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이재상 PD는 일요일 한낮에 방송되는 ‘사랑의 노래, 평화의 노래’라는 프로그램을 담당하기도 한다. 복음성가를 부르는 듀오 ‘위드’가 진행하는데 그 멤버의 한 사람인 오택근씨는 이재상씨를 이렇게 말했다. “정식으로 모여앉아 얼굴 찌푸리며 회의를 한 적은 없었어요. 그러나 지나가면서 살짝 던지는 한마디 말에, 짧은 지적 속에, 뭐랄까… 깊은 방송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에요.”

어느 선배 PD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이재상 PD는 한마디로 차갑고 이성적인 사람입니다. 눈에 잘 안 띄게 일하는 사람이에요. 요즘 세상에 ‘나 이런 일 한다’라고 요란하게 설레발치면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그렇지만 이렇게 조용하게 일 잘하는 사람,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사람입니다.” 말 없이 일 잘하는 PD 이재상씨가 다음에는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그것이 궁금하다.

한겨레 저널리즘
응원으로 지켜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