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통령 윤석열의 탄핵심판 최종 변론 기일이 2025년 2월25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리는 가운데 윤석열 지지 집회 참석자들이 손팻말과 태극기, 성조기를 흔들고 있다. 한겨레 김영원 기자
“극우 지지자들과는 친구가 될 수 없다.” 때로 이런 말을 거침없이 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대체로 서울이나 수도권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들이다. 여기에는 선긋기의 태도가 담겨 있다. 혐오 발언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과는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정치적 판단도 있고, 그들을 설득하려는 시도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냉소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늘 반박하고 싶어진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티케이(TK, 대구·경북) 지역이 바로 ‘그런’ 세계였기 때문이다. 내 가족과 친지 대부분은 여전히 보수 정당을 지지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내게는 저 말이 ‘극우를 지지하는 가족과는 함께 살 수 없다’는 섣부른 단언처럼 들린다. 그러나 가족은 부정할 수도 없고, 미화할 수도 없다. 나는 가족 곁에서 자랐고, 지금은 가족과 다르게 살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가족이다. 이 엄연한 사실은 어떤 정치적 입장이나 윤리적 비판으로도 지워지지 않는다.
프랑스 사회학자 디디에 에리봉은 ‘랭스로 되돌아가다’(문학과지성사, 2021)에서 이 절박하면서도 개인적이고 정치적인 질문과 정면으로 마주한다. 극우 정당에 투표하는 사람들과는 말을 섞지 않고 악수조차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기란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 대상이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자매, 친척과 고향 사람이라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에리봉은 젊은 시절 등졌던 고향 랭스로 돌아가 가족과 계급, 정치에 얽힌 복합적인 감정을 되짚으며 한 편의 회고록을 썼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한 자서전을 넘어선다. 프랑스 사회의 계급구조와 지식인의 자기기만을 비판하는 사회학 에세이이자, 가족에게 되돌아가는 성찰을 철학적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는 글쓰기여서다.

프랑스 철학자 디디에 에리봉. 그는 극우 정당 지지자로 변모한 가족의 선택을 이해하려 시도한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에리봉은 자신이 ‘도망친 자’였음을 고백한다. 그는 노동계급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자신에게 충실한 동성애자이자 지식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고향과 가족을 떠났다. 그러다 수십 년이 지나서야 아버지의 죽음 이후 다시 랭스로 되돌아온다. 그러나 그가 마주한 것은 수치심이었다. “당신 형 디디에는 가족을 버린 호모일 뿐이잖아.” 동생의 아내가 내지른 이 한마디는 계급 탈주자로서 가족을 외면하려던 그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고향 랭스는 과거에는 좌파 정당을 지지하던 노동자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극우 정당 국민전선의 지지 기반이 됐다. 에리봉은 자신이 지지해온 모든 가치, 즉 소수자 권리와 사회적 평등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바로 가족이라는 사실에 고통스럽게 직면한다. “그러니까 내가 극우의 선거 승리에 맞서 시위하거나 이민자와 불법체류자들을 지지할 때, 나는 가족에 맞서 저항하는 셈이다!” 개인적 이야기가 보편적 서사가 되는 지점이다.
‘랭스로 되돌아가다’는 여러 나라에 번역됐고, 국내에서도 많은 독자와 평자의 호응을 얻었다. 에리봉이 계급적 수치심을 정직하게 서술할 뿐 아니라, 그 구조적 원인을 섬세하게 분석하려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는 극우 정당 지지자로 변모한 가족의 선택을 이해하려 시도한다. “역설적으로 보일지는 몰라도, 나는 국민전선을 지지하는 표가 부분적으로는 자신들의 집합적 정체성을 지켜내려는 서민층의 마지막 호소로 해석돼야 한다고 믿는다.” 이는 단순한 온정주의가 아니라, 극우 정치 담론이 민중의 정치적 주체화를 틀 짓는 방식을 성찰해야 한다는 강력한 요청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에서 한 가지 중요한 한계를 느낀다. 에리봉은 극우 정당을 지지하는 가족을 혐오하지 않으려 애쓰지만, 그들을 사회구조의 희생자이자 변화하지 않는 타자로 보는 시선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랭스로 되돌아간 사람은 에리봉이고, 자기를 재발명한 사람도 에리봉 자신뿐이다. 가족과 고향, 남겨진 자들은 변화의 바깥에 머물러 있다. 그들은 이해받아야 할 존재, 설명돼야 할 타자, 결국 계몽돼야 할 대상으로 남는다.
에리봉이 추구하는 사회학적 비판 또한 위에서 아래로 “자신의 삶과 타인들의 삶에 대해 내려다보는 시각”에 머문다. 그에게 비판적 이론이란 “사람들이 자생적으로 스스로에 관해 생각하는 방식과 인식론적으로 단절”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남겨진 자들의 목소리는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책이 출간된 뒤 어머니는 이런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너 우리를 떠난 거였어? 우리가 부끄러웠다고?”
어쩌면 도망친 자의 자기 재발명보다 더 어려운 것은 남겨진 자의 삶을 존중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떠나온 세계를, 남겨진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다시 말할 수 있을까? 여전히 그곳에 머무는 사람들을 존중하면서 그들과 함께 다시 사유하는 일이 가능할까?

일본 철학자 아즈마 히로키. 그는 가족을 ‘정정 가능성의 공동체’로 재정의한다. ⓒKaori Nishida
일본 철학자 아즈마 히로키는 전혀 다른 길을 제안한다. ‘정정 가능성의 철학’(메디치미디어, 2024)에서 그는 가족의 개념을 새롭게 사유한다. 철학은 플라톤 이래 가족을 사적이고 닫힌 공동체로 간주하며 경계해왔다. 에리봉이 그러했듯 공공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가족을 부정해야 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아즈마는 가족을 ‘정정 가능성의 공동체’로 재정의한다.
가족은 결코 고정돼 있지도 폐쇄돼 있지도 않다. ‘같은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구성원을 바꾸고, 외부와의 관계 속에 스스로를 끊임없이 재조정한다. 양자를 들이거나, 다른 가족과 합치거나, 결별을 거쳐 새로 구성된다. “그럼에도 자기들은 ‘같은 가족’이고 전통을 지킨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래서 가족은 역설에 의해 성립한다. 가족 안에서는 전통을 지키는 일과 전통을 바꾸는 일이 결국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기묘한 이중성이야말로 가족의 지속 가능성을 보증한다.
아즈마는 가족관계의 역동성을 세 가지 특성으로 설명한다. 첫째, 우리는 누구와 가족이 될지를 선택할 수 없다.(강제성) 둘째, 우연히 주어지는 가족관계에는 필연적 이유가 없다.(우연성) 셋째, 가족의 경계는 언제든 변화할 수 있다. 이주, 결혼, 결별 등의 방식으로 가족 구성원의 내실은 유연하게 바뀐다.(확장성)
그에게 가족, 곧 정정 가능성의 공동체란 이미 동질적인 무언가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서로의 말과 행동을 끊임없이 ‘정정’할 수 있다는 믿음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연합이다. 가족 구성원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며 때로 상처도 주지만, 동시에 관계를 유지한 채 서로를 바꿔갈 수도 있다. 가족이라는 정정 가능성의 공동체는 완성된 합의의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으며, 견딜 수 있는 불일치의 상태를 부단히 다시 만들어나간다. 그렇기에 우리는 때때로 가족과 다투면서도 여전히 그들과 함께 살아가려 애쓴다. 정치적 차이가 있어도 살아가는 세계가 달라도 우리는 서로를 조금씩 정정해간다.
“TK의 콘크리트는 TK의 딸이 부순다.” 2024년 겨울, 대통령 윤석열 탄핵을 촉구하는 집회에서 나온 글귀다. 대구에 사는 페미니스트 김소결의 말이다. ‘보수의 심장’이라고 부르는 땅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존재로 취급받던 ‘딸’이 균열을 내는 주체로 등장했다.
처음 김소결은 이 문장을 “TK의 콘크리트는 TK의 딸들에 의해 부서질 것이다”라는 수동태로 쓸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아무도 없는데 혼자 앞장서는 게 아닐까 싶어 겁이 나서다. 그런데 이 말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유행하고 챌린지(참여 잇기)가 이어지면서, 어느새 문장은 원래 쓰려고 했던 능동태로 바뀌어 있었다. 전라도의 딸, 강원도의 딸, 피케이(PK, 부산·경남)의 딸이 연대한다는 말이 파도처럼 쏟아졌다.
이런 변화는 서울의 진보 세력이 대구를 ‘계몽’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김소결은 ‘백날 지워봐라, 우리가 사라지나’(오월의봄, 2025)에서 “서울 집회에는 늘 영남의 목소리가 없었던 것 같아요. ‘영남은 안 바뀐다’는 말이 귀에 박혀버린 나머지, 우리가 들려줄 수 있는 목소리조차 지워진 느낌이었어요”라고 지적한다. 이 말은 계몽적 태도의 한계를 정확히 보여준다. ‘TK의 딸’들은 이미 그곳에 있었고 변화의 계기를 품고 있었지만, 계몽 담론은 TK를 오직 바뀌어야 할 존재, 혹은 결코 바뀔 수 없는 존재로만 간주해왔다.
정정 가능성의 관점에서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페미니스트 김소결은 ‘TK’라는 지역성과 ‘딸’이라는 가족 내 위치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강제성). 그는 가족 공동체를 떠나지 않으면서도(우연성), 그 의미를 정정해나간다(확장성). “TK의 콘크리트는 TK의 딸이 부순다”는 말은 TK를 파괴하자는 선언이 아니다. 그것은 TK가 무엇인지를 당사자의 입장에서 새롭게 정의하겠다는 다짐이다.

2024년 12월7일 대구시 중구에서 열린 대구시국대회에서 대구여성의전화 ‘2030페미니스트’ 모임의 한 회원이 직접 쓴 대자보. 대구여성의전화 페이스북 갈무리
“극우 지지자들과는 친구가 될 수 없다”는 말은 절박한 심정에서 비롯됐지만, 동시에 관계의 단절을 정당화하는 냉소적 이성이 깃들어 있다. 그러나 정치적 변화는 냉소의 언어가 아니라, 타인의 말에 다시 귀를 기울이는 노력에서 출발한다. 반복해서 물어야 할 질문은 이런 것이다. ‘우리’가 듣지 못한 것은 아닐까? ‘극우 지지자’라는 범주화가 그 아래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보지 못하게 하는 인식의 장애물은 아닐까? 그들을 주저 없이 비판하면서도 정작 우리 자신의 말과 행동은 정정해야 할 것으로 생각지 못한 것은 아닐까?
아래로부터의 철학은 타인을 계몽하기가 아니라, 타인의 말과 감정이 들릴 수 있는 조건을 회복하기에서 시작한다. 바뀌지 않는 ‘그들’을 비난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이미 바뀌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우리’가 어째서 볼 수 없었는지에 주목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동료 시민을 가르치려 들기 전에, 이미 말하고 있는 동료 시민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는 일이다.
박동수 사월의책 편집장·철학책 편집자
*철학책 편집자 박동수가 ‘지금 한국 한복판에서 일어나는 철학 이야기’를 전합니다. 4주마다 연재.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단독] ‘김건희 후원’ 희림건축, 세운4구역 520억 수의계약 팀에 포함 [단독] ‘김건희 후원’ 희림건축, 세운4구역 520억 수의계약 팀에 포함](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5/1207/17650888462901_20251207501368.jpg)
[단독] ‘김건희 후원’ 희림건축, 세운4구역 520억 수의계약 팀에 포함

내란 특검, ‘계엄해제 방해’ 의혹 추경호 기소

‘소년범’ 조진웅 은퇴 파문…“해결책 아냐” vs “피해자는 평생 고통”

‘강제추행 피소’ 국힘 대변인 사임…장동혁, 두 달 지나서야 “신속 조사”

‘갑질’ 의혹 박나래 입건…전 매니저 “상해, 대리처방 심부름”

쿠팡 손배소 하루새 14명→3천명…“1인당 30만원” 간다

트럼프가 이겼다…대미 3500억불 투자 손해, 자동차관세 절감 효과 2배

“장동혁, 윤석열 면회 가서 10분 울기만…절연할 일 없다”

‘윤어게인’ 숨기고 충북대 총학생회장 당선…아직 ‘반탄’이냐 물었더니

이 대통령, 감사원장 후보자에 김호철 전 민변 회장 지명








![[단독] 세운4구역 고층 빌딩 설계, 희림 등과 520억원 수의계약 [단독] 세운4구역 고층 빌딩 설계, 희림 등과 520억원 수의계약](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resize/test/child/2025/1205/53_17648924633017_17648924515568_20251204504031.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