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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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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 무시·경멸로 치달은 ‘스피박 스캔들’, 문제는 관계다

세계적 석학 방한 뒤 남은 질문들…각자의 삶에서 다시 쓰인 담론 속에 말을 듣고 건다면
등록 2025-09-11 20:21 수정 2025-09-17 17:08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스허르의 판화 작품 ‘그리는 손’(1948년). 좋은 옷이 나오려면 알아봐주는 눈이 필요하듯 학문도 마찬가지다. 학자와 감식가, 학자와 학자 사이에는 더 ‘끈적끈적한’ 관계가 필요하다.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스허르의 판화 작품 ‘그리는 손’(1948년). 좋은 옷이 나오려면 알아봐주는 눈이 필요하듯 학문도 마찬가지다. 학자와 감식가, 학자와 학자 사이에는 더 ‘끈적끈적한’ 관계가 필요하다.


2025년 7월, 세계적인 인문학자 가야트리 스피박 교수가 한국을 찾았다. 그는 제주에서 열리는 ‘비판적섬연구 국제학술대회’에 기조 강연자로 초청됐고, 서울에서는 공개 강연도 진행했다. 문제는 강연에서 한국어 동시통역이 제공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거센 항의가 쏟아졌다. 게다가 며칠 뒤 이어진 기조 강연에서 스피박이 질문자를 무례하게 대하는 모습이 포착되며 논란은 더욱 커졌다. 작은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었던 일이 ‘스피박 스캔들’로 번졌다.

반응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통역 부재를 문제 삼은 목소리는 학계 사정도 모르는 사소한 오해로 치부됐다. 반대로 ‘세계적 석학’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태도가 한국 지성계의 주변부성을 드러낸다는 비판도 나왔다. ‘대가의 방한’만을 과도하게 부각하고 국제 학술교류라는 맥락을 외면한 것이 오히려 식민지적 습속과 콤플렉스를 보여준다는 반론도 있었다. 논란은 이내 상호 무시와 경멸로 치달았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누가 옳고 그른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학자와 대중 사이, 그리고 학자와 학자 사이에서조차 제대로 된 관계 맺기가 부재했다는 점이다. 이 논란은 단순한 해프닝을 넘어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학자와 대중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까? 서구에서 유행하는 이론을 수용하는 일은 여전히 식민성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일까? 어쩌면 이 두 질문은 같은 문제의 두 얼굴일지도 모른다.

 

‘아틀라스의 발’, 이상길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2018년

‘아틀라스의 발’, 이상길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2018년


서구 대가의 이론이 국내서 재구축?

문화연구자 이상길은 ‘아틀라스의 발’(문학과지성사 펴냄, 2018년)에서 서구 이론과 그 수용의 관계를 깊이 탐구했다. 그는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를 사례로 삼아 국내 학자들이 서구 이론가들을 어떻게 수용해왔는지를 면밀히 분석한다. 부르디외가 세계적 사상가로 자리 잡게 된 프랑스의 맥락을 보여줄 뿐 아니라 한국에서 그의 이론이 번역되고 수용되는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들을 함께 조명한다.

이상길은 서구 이론에 대한 무분별한 추종을 경계하면서도 단순한 거부로는 대안이 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서구 중심의 지식권력이 일방적으로 강제되는 고정된 구조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구조 안의 행위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재)구축되며 따라서 변화 가능”하다. 다시 말해, ‘서구 대가’의 이론을 통해서도 우리 현실과 더 깊이 대화할 수 있는 길은 언제나 열려 있다.

여기서 성찰성이라는 덕목이 중요해진다. 부르디외가 “세계를 자신의 어깨에 짊어진 아틀라스의 두 발이 어디를 딛고 있는지” 물었듯이, 서구 이론을 논의하는 우리의 두 발이 지금 어디를 어떻게 딛고 있는지 되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점에서 보면 ‘식민지적 습속’이나 ‘주변부성’이라는 구조의 희생자로 우리 자신을 재현하려는 틀에 박힌 시도 자체가 문제적일 수 있다. 그런 식의 재현은 구조 속에서 발휘되는 행위자들의 성찰성을 가려버리기 때문이다. 현실의 제약을 인정한다 해도, 작은 선택과 성찰의 여지마저 없는 것일까? 우리는 어항 속에 갇힌 금붕어에 불과한 것일까?

 

‘금붕어의 철학’, 배세진 지음, 편않 펴냄, 2025년

‘금붕어의 철학’, 배세진 지음, 편않 펴냄, 2025년


‘어항 속 금붕어’는 균열 찾아 깰 수 있나

후속세대의 정치철학자 배세진의 ‘금붕어의 철학’(편않 펴냄, 2025년)은 바로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책의 핵심 메타포인 ‘어항 속 금붕어’는 단순한 수사나 특정 철학 사조에 한정되는 은유가 아니다. 한발 더 나아가 이를 학문의 식민지적 상황 속에서 예속된 주체로 학문한다는 현실적 조건을 이해하기 위한 사유의 도구로 읽어볼 수 있다.

‘금붕어의 철학’은 현대 프랑스 정치철학, 특히 포스트구조주의의 사유 속에서 이 문제를 탐구한다. 책의 부제가 ‘알튀세르, 푸코, 버틀러와 함께 어항에서 빠져나오기’인 이유다. 알튀세르는 주체가 이데올로기에 의해 호명돼 형성된다고 주장했고, 푸코는 주체가 지식권력의 산물이라고 분석했으며, 버틀러는 규범적 담론을 통해 주체가 구성되는 과정을 설명했다. 배세진은 이들을 통해 포스트구조주의의 화두를 ‘예속적 주체화’라는 개념으로 묶는다.

쉽게 말해 이런 것이다. 우리는 모두 담론이라는 어항 속에서 살아가는 금붕어 같은 존재이며, 어항 바깥으로 나가면 죽고 만다. 여기서 담론이란 “남자는 이렇게, 여자는 저렇게 해야 한다”처럼 우리를 규정하는 규범적 서사다. 이를 단순히 부정하기 어려운 것은 사회 자체가 이 담론에 의해 만들어졌고 이를 벗어나면 살 수 없거나 이상한 존재로 낙인찍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담론이라는 어항은 단순한 억압의 상징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를 ‘살게 만드는 조건’이기도 하다. 물리적 폭력에는 저항할 수 있지만, 우리를 살게 만드는 규범적 권력에는 어떻게 맞설 수 있을까? 배세진이 제시하는 길은 명료하다. 담론이라는 구조는 고정된 질서가 아니라 매 순간의 사건적 재생산을 통해 유지되기에 그 재생산의 균열에 개입함으로써 바꿀 수 있다. 세상은 출구가 없다고 말하지만 구조라는 어항 자체가 늘 “간극, 틈새, 흠집”을 지니고 있다.

배세진이 강조하는 철학자의 글쓰기는 바로 그 틈새를 포착해 드러내고 거기에 개입하는 일이다. 그래서 어항의 바깥은 있다. “갈등과 모순으로 구성된 오늘날 지금 여기의 시간과 공간이 품고 있는 간극, 틈새, 흠집이 바로 이 바깥”이다. 그것은 안에 숨어 있는 바깥이다.

이 말은 우리의 역사적 조건과 담론적 현실을 완전히 벗어나 가장 옳은 선택지를 단번에 얻을 수는 없음을 의미한다. 어항 속 금붕어라는 이미지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완전히 없다는 주장이 아니라, 특정한 방식으로 한계 지어져 있으면서도 그 한계 내에서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음을 뜻한다. 이것은 포스트구조주의 철학 같은 서구 이론을 수용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 안에도 바깥은 숨어 있으며, 문제는 그것을 “뒤집어 까는” 일이다.

 

‘자기이론’, 로런 포니에 지음, 양효실 외 옮김, 마티 펴냄, 2025년

‘자기이론’, 로런 포니에 지음, 양효실 외 옮김, 마티 펴냄, 2025년


대가와 대중 사이 감식가들의 재생산

그러나 이런 논의는 너무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다. 개인의 삶 속에서는 어떤 변화와 실천이 가능할까? 로런 포니에의 ‘자기이론’(마티 펴냄, 2025년)은 중요한 보완점을 제시해준다. ‘자기의 삶으로 작업하기’라는 부제가 보여주듯, 이 책은 텍스트가 아니라 ‘자기’라는 현실에서 출발한다.

포니에는 이론을 수용하는 사람의 자리를 다시 묻는다. 이론을 읽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어디 위치해 있는가? 이들의 역할과 활동은 충분히 드러나 있었는가? 이러한 물음은 포스트구조주의 철학 같은 ‘고급이론’과 자기의 자전적 이야기를 하나로 겹쳐내고, 이론을 수용하고 변형하는 방식 자체가 또 다른 이론 생산 곧 ‘자기이론’임을 드러낸다. 이 점에서 ‘자기이론’은 서구/식민지라는 단순한 구획을 넘어선다. 서구 내부에도 백인 남성 이론가와 비백인 여성 학자 사이의 간극이 있고, 이론가와 예술가 사이의 틈새가 있으며, 심지어 자기이론가와 그 청중 사이의 구분이 있기 때문이다. 간극, 틈새, 흠집은 도처에 있다.

이때 현실과 텍스트 사이 위계는 없어진다. 각자의 삶이 곧 이론 생산지가 된다. 책상에서 외국 학자의 글을 읽고 비평하는 일과 삶 속 현장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일은 결국 다르지 않은 작업이다. 예컨대 사랑과 돌봄에 관해서라면 책상물림 철학자보다는 사랑과 돌봄의 현장 연구자들에게서 배워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지난 연재에서 다룬 주제, 제1575호 참조)

따라서 ‘대가’와 ‘대중’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사이를 잇는 수많은 연구자, 번역자, 편집자, 강사, 기자, 독자, 사회관계망서비스 논평자가 모두 ‘감식가’로서 이론의 재생산에 관여한다. 그 모든 사람은 저마다 자기이론을 갖고서 간극의 지점을 포착하고 선별하고 비판하고 증폭한다.

그 누구도 중간 매체나 한낱 지나가는 통로가 아니며, 각자는 담론을 변형하고 번역하는 매개자로서 크고 작게 활동하고 있다. 그렇기에 구조든 습속이든 결코 일방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 이렇듯 자기이론의 통찰은 포스트구조주의의 문제의식을 삶으로 확장한다.

이제 중요해지는 것은 고급이론의 통달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여러 주체와 맺는 깊은 대화다. 대가들의 고급이론만큼이나 대중의 저급이론도 중요하다. 포니에가 말하듯 “철학자를 인용할 때만큼 중요하게 여동생을 인용”할 수 있어야 한다. 위대한 거장만이 아니라 이론을 활용하고 변형해 삶 속으로 흡수하는 사람들에게도 주목한다. 바로 거기에 자기이론의 관점이 갖는 독특한 힘이 있다.

 

‘다른 과학은 가능하다-‘느린 과학’ 선언’, 이자벨 스탱게르스 지음, 김연화·장하원 옮김, 에디토리얼 펴냄, 2025년

‘다른 과학은 가능하다-‘느린 과학’ 선언’, 이자벨 스탱게르스 지음, 김연화·장하원 옮김, 에디토리얼 펴냄, 2025년


서로의 자기이론을 듣는, 대중을 모욕하지 않는

다시 ‘스피박 스캔들’로 돌아가보자. 문제는 강연자 개인의 태도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학자와 대중, 학자와 학자 사이의 관계 맺기가 얼마나 왜곡돼 있는지를 드러낸 사건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말을 차분히 듣고 더 깊이 이해하려 하기보다 상대를 단순히 구조의 희생자로 치부하고 있었다.

어떻게 더 나은 관계 맺기가 가능할까? 과학철학자 이자벨 스탱게르스의 ‘다른 과학은 가능하다 : ‘느린 과학’ 선언’(에디토리얼 펴냄, 2025년)은 중요한 참조점이 된다. 그는 ‘느린 과학’이라는 새로운 개념화를 통해 학문과 대중지성 사이의 새로운 동맹을 말한다. 스포츠나 음악에서와 마찬가지로, 활동적인 문화는 전문가들만이 아니라 그 분야에 정통한 감식가들과 함께 만들어진다. 좋은 예술이 세상에 나올 수 있으려면 그 가치를 알아보는 감식가의 안목이 필요하듯, 학문도 마찬가지다.

대중지성은 학문을 ‘가꾸어진 것’으로 바꾼다. 온실 속 화초로 방치하지 않고 이식된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돌보고 가꾼다. 반대로 감식가들이 돌보지 않는 문화는 금세 오만이나 불신으로 기운다. 그래서 스탱게르스는 학자들이 “감식가들의 지성을 모욕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선택에 대해 설명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학자들을 존중하는 사회가 필요하지만, 동시에 학자들이 대중을 경멸하지 않도록 강제하는 사회 또한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어떤 학문도 혼자서 옳을 수는 없다.

학자와 감식가, 학자와 학자 사이에는 더 끈끈하고 긴밀한 동료 관계가 필요하다. 느린 학문, 느린 대화를 함께 가꿔가야 하는 이유다.

 

박동수 사월의책 편집장·철학책 편집자

 

*철학책 편집자 박동수가 ‘지금 한국 한복판에서 일어나는 철학 이야기’를 전합니다.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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