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6회 서울퀴어퍼레이드가 2025년 6월14일 서울 중구 남대문로와 우정국로 일대에서 열렸다. 한겨레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2025년의 마지막 달,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앞두고 종교를 주제로 내가 쓴 책 ‘동료에게 말 걸기’(민음사 펴냄, 2025년) 북토크를 했다. 김지효 여성학 연구자와 그날 나눈 이야기는 극우화된 종교단체를 비판하는 익숙해진 시사 담론이 아니었다. “딸아, 주님은 언제나 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신다”고 말하며 딸을 개종시키려 열렬히 애쓰는 엄마와 어떻게 대화할 수 있을까에 대한 아주 사적인 고민의 이야기였다.
내가 무지개 깃발을 들고 나간 서울광장 바로 옆에서 엄마가 태극기를 들고 서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광장의 갈등이 가정의 식탁으로 옮겨갈 때 집회가 끝난 뒤의 일상을 어떻게 함께 살아가야 할까? 자신이 믿는 종교만을 절대 진리라고 여기는 가족에게 어떻게 다른 이야기를 건넬 수 있을까?
끝없이 이어지는 아득한 질문 앞에서 종교란 대체 무엇인가를 되묻게 된다. 종교는 언제 우리를 가깝게 하고, 언제 우리를 멀어지게 할까? 그 이유를 안다면 비로소 대화도 가능할지 모른다.
사람들이 종교로 빠져들게 되는 여러 문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인생에서 불의의 사고처럼 겪게 되는 불가해한 고통은 종교를 찾게 되는 큰 이유 중 하나다. 북토크에서도 고통과 종교라는 어려운 주제부터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관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을까.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엄기호 지음, 나무연필 펴냄, 2018년
우선 사회학의 시선을 빌려보자. 사회학자 엄기호는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나무연필 펴냄, 2018년)에서 한 개인이 겪는 고통의 실존적 차원에는 타인과 완전히 소통할 수 없는 어떤 절대성의 측면이 있다고 말한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대신 아파해줄 수는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통을 벗어나는 하나의 방편으로서 그런 절대적 고통을 온전히 나눌 수 있는 신이나 초월적 존재에게 기대게 된다. 물론 고통의 해소가 종교가 갖는 유일한 기능일 리 없지만, 고통이 우리 각자를 고립시킬 때 종교는 나름의 해법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책 속에는 덕룡 아버지의 일화가 등장한다. 독실한 불교 신자이자 대학교수였던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의 사별을 겪으며 무너져갔다. 순식간에 그동안 붙들고 있던 모든 고담준론이 허무해졌다. 그렇게 일상의 모든 것이 하나둘 망가지는 가운데 그는 일본에서 건너온 신흥종교를 접하게 된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사이비종교라고 생각했지만 ‘회관’에 가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문’을 외우다보니 어느새 마음이 평안해졌다. 서로를 돌보는 종교인들이 곁에 있고, 마음이 답답할 때마다 반복해서 수백, 수천 번 되뇌는 주문이 있으니 다시 한번 삶을 챙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엄기호는 이를 두고 덕룡 아버지가 종교를 통해 “자신의 고통을 단번에 우주적 고난의 문제로 인지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고통이 더 큰 이야기 속에 놓이자 자기 고통의 구체적인 개별성은 사라지고, 도저히 견딜 수 없던 실존적 고통도 조금은 더 견딜 만한 것이 되었다는 말이다. 이런 의미 부여가 사람을 다시 살아가게 한다는 점에서 종교가 고통 앞에서 수행하는 역할은 분명 큰 가치가 있다.
하지만 종교의 도움이 때로는 위험이 될 수도 있다. 고통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방편으로서의 종교적 주문이 그 자체로 실체가 되고 심지어 절대적 믿음과 진리가 되어버리는 경우다. 엄기호가 말하듯, 종교적 언어가 “그 경계를 넘어 지배적인 마법의 언어가 될 때 그 언어는 역설적으로 말이기를 멈추고 주문이 된다”. 종교가 사회·정치·도덕·과학 모두를 대신할 수 있다고 과장되게 주장할 때, 종교는 사람들을 연결하기보다 산산이 갈라놓는다. 그 결과 종교적 분열로 인해 각자의 고통은 해소되기보다 오히려 더욱 깊어지기에 이른다.
고통을 겪는 이에게 종교는 필요한 것이고 도무지 버티기 힘든 과정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힘이다. 그러나 고통을 해결할 방편으로서의 종교가 실체가 되면 주객전도가 일어난다. 종교의 노예가 되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종교를 강요하게 되고, 결국 다른 사람에게서 멀어지게 되는 불행한 결과가 생길 수 있다.

‘브뤼노 라투르 마지막 대화’, 브뤼노 라투르·니콜라 트뤼옹 지음, 이세진 옮김, 복복서가 펴냄, 2025년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불가해하고 나눌 수 없는 실존적 고통 앞에서 우리는 정말 서로 소통이 불가능할까? 어떤 과학으로도 어떤 철학으로도 그 해명이 불가능할 때 종교라는 절대적 초월의 자리로 나아갈 수밖에 없을까?
엄기호는 각자의 고통에 대한 직접적인 연대는 불가능하더라도, 고통 자체가 아니라 고통으로부터 한 다리 건넌 ‘우회’를 통해서, 곧 고통에 대한 ‘이야기’와 ‘말’을 통해서 고통에 대한 간접적인 연대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고통을 그대로 타인에게 옮길 수는 없지만, 그 고통을 어떻게 말하느냐는 함께 고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 역시 조금 다르게 볼 수 있지 않을까? 끝내 해명할 수 없는 절대적 고통이 있기에 종교의 자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종교에서 오랫동안 다뤄온 고통·상실·죽음 등의 질문을 현대사회에서 제대로 다루지 못하기 때문에 종교의 자리가 다시 소환되는 것은 아닐까?
요컨대 종교는 고통의 우회, 고통의 번역이라는 역할을 맡아왔으며, 고통을 어떻게 말할지를 두고 고민을 거듭해왔다. 그래서 종교는 단순히 과거의 말을 그대로 되풀이하지 않는다. 같은 종교적 메시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다른 시간과 다른 장소에서, 매번 다른 방식으로 반복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종교는 흔히 초월이나 변치 않는 진리로 이해되지만, 실제로는 늘 다시 말해지고, 다시 설명되고, 다시 전달되는 무수한 변화 과정에 존재해왔다. 다시 말해 종교가 지닌 가장 평범한 모습은 언제나 ‘번역’의 과정에 있었다.
2천 년 전 갈릴리의 어부들에게 했던 예수의 말을,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아무런 주해도 번역도 없이 그대로 반복한다고 해서 그것이 살아 있는 말이 될 수 있을까? 종교의 언어는 늘 지금 여기의 언어로 다시 말해질 때만 생생한 의미를 가진다.
그 자신이 가톨릭 신자이기도 한 프랑스 철학자 브뤼노 라투르는 종교를 수천 년에 걸친 끊임없는 번역의 역사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브뤼노 라투르 마지막 대화’(복복서가 펴냄, 2025년)에서 말하듯, 종교적 말하기의 특징은 실패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과학적 사실의 발견이 날이면 날마다 이루어지는 게 아닌 것처럼 (성공적인) 종교적 발화도 매우 드물”다는 것이다. 같은 말을 영원히 되뇌는 것만으로 성립되는 종교는 없다. 종교는 언제나 지금 여기에서 고유한 번역을 수행해야 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충분하다. 만약 하나님의 이름 하나로 충분했다면, 예수의 설교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 설교만으로 충분했다면, 예수의 제자들, 그들이 세운 교회들, 수많은 사제, 수많은 신자는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 무수한 번역의 연결망이 없다면 ‘신’이 무슨 의미를 띨 수 있을까? 이 끊임없이 실처럼 이어지는 번역과 변형의 연쇄 없이는 종교도 구원도 성립할 수 없다.
2019년 퀴어문화축제에서 성소수자를 축복했다는 이유로 출교당한 이동환 목사는 항소심 최후진술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불과 150년 전만 해도 성경에 나오는 노예에 대한 구절을 근거로 ‘성경이 노예제를 옹호한다. 노예제는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주장하는 신학자와 목회자는 수도 없이 많았지만, 지금은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렇기에 “성경은 기록될 당시의 시대와 문화적 배경을 파악하여 그 안에 담긴 진리를 발견해내어 오늘에 맞도록 해석되어야” 하고, “죄인이라 여김받던 이들과 함께하셨던 예수님이 오늘, 이 땅에 오신다면 성소수자와 함께하실 것이라” 믿을 수도 있다.
중요한 점은 어떤 종교적 진리든 타자와의 만남과 번역 과정 없이, 순수하고 절대적인 방식으로 전달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어떤 사람들이 ‘우리 종교에는 단 하나의 변치 않는 절대 진리만 있다’고 굳게 믿을지라도, 실천의 장에서는 교인이 아닌 사람들을 설득하고 회유하기 위해 수많은 번역의 기술을 발휘하기 마련이다. 바로 여기, 이 번역의 중간 지대에서 서로 타협하고 협상하고 변화할 부분은 언제나 남아 있다.

‘샤를 드 푸코 선집’, 사를 드 푸코 가족 수도회 엮음, 조안나 옮김, 분도출판사 펴냄, 2022년
알제리 남부 사막의 무슬림 부족들과 어울려 지내며 다른 종교와 문화를 존중하는 보편적 형제가 되고자 했던 가톨릭 성인 샤를 드 푸코(1858~1916)의 전언을 빌려보자.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사랑하길 원한다고 하는 신자는 부조리한 것을 꿈꾸는 셈입니다.” 그는 그곳에 거주하는 투아레그족의 문학적 전통을 지키고자 투아레그어 사전을 만드는 작업에 헌신하며 평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덕룡 아버지를 다시 떠올려본다. 회관에서 주문을 외울 때 그를 진정으로 위로한 것은 주문 그 자체만이 아니라 함께 주문을 외우는 사람들, 서로를 돌보는 공동체의 존재였다. 종교에서 말하는 실존적 고통의 해소는 어쩌면 바로 옆 사람의 함께 있음에 대한, 그 현존에 대한 지극히 평범하고 단순한 자각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종교란 그저 신앙과 교리만은 아니다. 곁에 있는 사람들의 존재, 이웃의 돌봄과 함께함이 없다면 종교가 성립할 수 있을까?
“주님은 언제나 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신다”고 말하는 엄마와 대화하기는 여전히 막막한 일이다. 그럼에도 답답함을 견디며 다시 말을 고르는 이유는, 우리가 결국 서로의 고통을 우회해서라도 만나야 할 이웃이기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서로 다른 깃발을 들고서도 끝내 마주 앉은 그 식탁이야말로 가장 드물고 귀한 종교적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 자리일지도 모른다.
박동수 사월의책 편집장·철학책 편집자
*철학책 편집자 박동수가 ‘지금 한국 한복판에서 일어나고 있는 철학 이야기’를 전합니다.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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