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읽고 쓰지 않으면 못 견디는데 인공지능이 무슨 의미겠나

더 효율적인 결과물을 얻는 것은 우리 목표가 될 수 없기에… 끝내 인간을 감동시킬 ‘스파크의 순간’을 찾아서
등록 2025-12-04 23:31 수정 2025-12-09 17:49
스테퍼니 존슨의 ‘의무적 육식동물’과 엘리자베스 스미서의 ‘천사의 열차’ 표지. 인공지능을 활용해 표지를 제작한 두 작가의 책은 뉴질랜드의 권위 있는 문학상 심사 대상에서 제외됐다. Photo credit. Quentin Wilson Publishing

스테퍼니 존슨의 ‘의무적 육식동물’과 엘리자베스 스미서의 ‘천사의 열차’ 표지. 인공지능을 활용해 표지를 제작한 두 작가의 책은 뉴질랜드의 권위 있는 문학상 심사 대상에서 제외됐다. Photo credit. Quentin Wilson Publishing


“책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역사학자 앤드루 페테그리는 ‘전쟁과 책’(아르테 펴냄, 2025년)에서 이렇게 단언한다. 흔히 책을 평화의 상징이라 여기지만, 역사를 되짚어보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았다. 아돌프 히틀러의 ‘나의 투쟁’처럼 증오에 찬 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킨 나쁜 책도 있었고, 평범한 책조차 전쟁을 위한 사상적 무기나 타국 시민을 혐오하는 도구로 악용되곤 했다.

과거에는 전쟁과 폭력이 책의 세계를 위협했다면, 지금은 인공지능(AI)이 책의 세계를 위협한다. 특히 생성형 인공지능에 의해 아무런 노고와 감수 없이 만들어지는 조악한 출판물의 무분별한 범람이 문제다. 프랑스 아마존 사이트에는 ‘당신의 낙관주의를 뒤집어놓을 쇼펜하우어의 50가지 펀치라인’ ‘당신의 이성을 무자비하게 공격하는 칸트의 50가지 펀치라인’ 같은 기이한 제목의 책들이 버젓이 유통되고 있다. 표지와 본문은 물론 책 소개마저 인공지능으로 그럴듯하게 지어낸 ‘가짜 책’이다.

이는 비단 프랑스나 정체불명의 신생 출판사만의 문제가 아니다. 최근 국내에서도 30년 역사를 지닌 학술 출판사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생성형 인공지능 제미나이로 번역해 출간했다가 논란이 됐다. 형편없는 번역 품질도 문제였지만, 사람이 감수자로 거의 개입하지 않았다는 점이 더 치명적이었다. 오타나 오역은 뒤늦게라도 바로잡을 수 있지만, 번역에 대해 책임질 사람이 없다는 사실은 출판의 근간을 뒤흔든다. 16년째 출판 편집자로 일하며 책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책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라는 말이 지금처럼 뼈아프게 와닿은 적은 없었다.

‘일에 마음 없는 일’, 김지원 지음, 흐름출판 펴냄, 2025년 

‘일에 마음 없는 일’, 김지원 지음, 흐름출판 펴냄, 2025년 


인공지능 홍수 속에 범람하는 가짜 책

인공지능을 거부하는 것이 답일까? 그것은 현실적이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나 역시 여느 사무직 직장인처럼 인공지능을 활용한다. 다만 기존의 편집 업무를 ‘대체’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원고 검토 과정에서 제3의 시각을 얻기 위해 인공지능을 참조할 뿐이다. 가령 번역자의 초벌 번역 원고를 인공지능과 함께 검토하는 식인데, 이 경우 편집 시간은 오히려 늘어난다. 대신 그만큼 원고의 정확성은 높아진다. 인공지능은 시간을 절약하는 도구가 아니라 더 나은 결과물을 만들기 위한 협력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전제가 따른다. 이런 활용법은 해당 분야의 전문성을 갖춘 사용자에게만 유효하다. 인공지능이 제시하는 견해를 평가할 식견이 있어야만 기계에 휘둘리지 않고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기술의 한계를 보완할 인간의 노동과 판단이 없다면 인공지능은 무용지물이다.

물론 이 역시 이상적인 이야기다. 실제 업무 현실에서는 시간 절약과 인력 감축을 위해 인공지능 사용이 강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출판계에서도 인공지능으로 생성한 원고를 인공지능으로 편집하고, 기계가 인간을 대체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 아래 신입 채용을 중단하는 사태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인공지능을 유용하게 활용할 때조차 그것이 가져올 부정적 영향을 깊이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게다가 설령 인공지능이 모든 업무를 완벽히 대체하리라는 과도한 기대를 버린다고 해도, 근본적인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인공지능은 목표에 더 쉽게 도달하는 실용적 ‘방법’은 알려주지만, 애초에 왜 그 길로 가야 하는지, 왜 책을 만드는지, 무엇을 위해 우리가 글을 쓰고 읽는지에 대한 ‘이유’는 말해주지 않는다.

인공지능을 활용한 더 높은 생산성으로 대체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가 마주해야 할 진짜 철학적 질문이 여기에 있다. 질 낮은 번역물이나 저작물을 양산하는 것이 목표라면 인공지능은 디지털 쓰레기 제조기에 불과하다. 새로운 기술의 파도 앞에서 다시 점검해야 할 것은 바로 ‘업의 본질’이다.

‘지금도 책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 김지원 지음, 유유 펴냄, 2024년 

‘지금도 책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 김지원 지음, 유유 펴냄, 2024년 


더 ‘쓸모 있음’으로 대체 무엇을 할 것인가

읽기는 이상한 경험이다. 책상에 앉아 자세를 잡는 것부터가 힘든 일이며, 유튜브 시청과 비교하면 훨씬 많은 정신적·신체적 에너지를 요구한다. 그런데 우리는 때때로 피곤하고 바쁜 때조차 소설에 몰입해 밤을 지새우거나, 출근길 버스에서 감동적인 문장을 읽고 속으로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철학적 발상이나 과학적 지식을 접하며 지적 희열을 느끼기도 한다.

왜 사람들은 여전히 책을 읽고 감동하고 통찰을 얻을까? 기자이자 작가 김지원은 여러 책을 통해 이 질문을 집요하게 탐구해왔다. 그는 ‘지금도 책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유유 펴냄, 2024년)에서 “사람들은 시대를 막론하고 자신을 깨우고, 깜짝 놀라게 하고, 감탄하게 하고, 배꼽을 잡게 하고, 때론 울상 짓게 만드는 좋은 글을 읽고 싶어 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읽기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짜 읽기와 진짜 소통에 목말라 있다. 그리고 좋은 글에 대한 진실한 읽기 경험은 생산성과는 거의 무관하다. 김지원은 읽기와 쓰기가 지닌 ‘쓸모없음’에 깊이 천착한다.

어쩌면 우리가 정말 좋아하는 독서 경험은 “제 몫의 쓸모를 훌쩍 넘어버린 책들을 그저 붙잡고 읽으며 딴생각의 타래를 끝없이 엮고 또 엮어가는 것”이 아닐까? 읽기와 쓰기는 어떤 생산적 가치를 산출하기 위한 활동이기 전에, 지금 이 순간에 읽고 싶어서, 또 쓰고 싶어서 못 견딜 것 같기 때문에 하는 활동이다. 김지원은 ‘메모의 순간’(오월의봄 펴냄, 2025년)에서 그 순간의 순전한 즐거움으로 이루어지는 글쓰기를 “메모적 쓰기”라고 부른다. 그것은 책상이 아닌 곳에서, 생업에 종사하면서, 틈틈이 길 위에서 쓰이는 글들이다. 쓰고 싶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쓰기의 즐거움’이란 “오늘날 글쓰기 자동기계가 주목하지 않는 유일한 부분”이기도 하다.

이런 식의 원초적인 글쓰기는 생산성과 효율성에 봉사하지 않는다. 머릿속에 뿌옇게 떠다니는 상념을 종이로 옮기는 순간에는 그 특유의 쾌감이 있고, 무언가 가만히 끼적일 때는 그 시간 자체의 즐거움이 있다. 이 점에서 읽기와 쓰기는 자동화할 수 없는 인간만의 예외성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굳이 ‘자동화하지 않으려는 것’에 가깝다. 김지원은 이렇게 묻는다. “직접 텃밭에서 흙을 밟고 계절을 느끼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 모든 일을 ‘자동화’해준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인가?”

‘메모의 순간’, 김지원 지음, 오월의봄 펴냄, 2025년

‘메모의 순간’, 김지원 지음, 오월의봄 펴냄, 2025년


‘영혼의 연결’ 생각하면 인공지능 역시 물결일 뿐

김지원은 ‘일에 마음 없는 일’(흐름출판 펴냄, 2025년)에서 읽기와 쓰기의 본질을 더욱 명확히 정리한다. “이 모든 건 생산성의 문제가 아니라 주체의 집념과 이동/성장의 문제라는 것이다.” 더 좋은 기술적 도구는 우리를 더 멀리 보내줄 수 있지만, 애초에 왜 그곳으로 가야 하는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인공지능 역시 마찬가지다. 생산성에 대한 강박을 내려놓고, 인공지능이 답해줄 수 없는 일의 이유를 스스로 찾아야 한다. 누구도 자신의 집념과 성장을 기계에 맡길 수는 없다.

이것은 읽기와 쓰기의 본질만이 아니라 우리가 수행하는 지식노동의 본질과도 연관돼 있다. 생산성이 지식노동을 평가하는 유일한 기준이 될 때, 그 일을 행하는 사람들의 경험과 체험, 즐거움과 취향은 시야에서 사라진다. 왜 내가 책을 만드는지, 왜 내가 이 책이 아니라 저 책을 선호하는지, 각자의 가치 판단에 담겨 있는 감정과 희열은 생산성이라는 단순한 척도로는 측정할 수 없다.

지식노동자는 더 높은 연봉이나 더 많은 결과물을 내놓기 위해서만 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고유한 관심과 생각을 이어가기 위해 일하고 싶어 한다. 인공지능을 통한 생산성 향상에만 초점을 맞출 때 바로 이 ‘업의 본질’에 대한 주체적 고민이 상실되고 만다. 이것은 여전히 ‘컴퓨터가 할 수 없는 것’이다. 계산의 문제가 아니라 주체의 기묘한 집념과 고집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읽는 이 역시 “책의 전체 내용과는 별개로 툭 불거진 필자의 ‘참을 수 없는 즐거움’의 장면”을 발견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 쓰는 즐거움에 목매는 저자와 읽는 즐거움에 목매는 독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스파크의 순간, 우리는 시대와 장소를 넘어 “형언하기 어려운 영혼의 연결감”을 느낀다.

이런 주관적 목적을 읽기와 쓰기의 본질이자 기준으로 삼는다면, 나를 대신해 읽고 쓰는 인공지능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업의 본질로 돌아가 보면 인공지능이라는 기술의 파도는 또 하나의 작은 물결에 지나지 않는다.

‘전쟁과 책’, 앤드루 페티그리 지음, 배동근 옮김, 아르테 펴냄, 2025년

‘전쟁과 책’, 앤드루 페티그리 지음, 배동근 옮김, 아르테 펴냄, 2025년


불안함과 초조함이 깃든 책의 매력

“책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라는 말은 결국 나쁜 책과 좋은 책을 가려내야 한다는 과제로 이어진다. 인공지능이 생성한 결과물이라고 해서 책이 되지 말란 법은 없다. 그러나 그것이 ‘좋은 책’이 되려면 숙고와 편집, 인고의 시간이 필요하다. 고뇌와 감수의 과정 없이 자동으로 형태만 갖춘다고 해서 책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좋은 책의 기준은 어떤 것일 수 있을까? 김지원은 ‘지금도 책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에서 책을 고르는 팁 하나를 선사한다. 바로 책의 앞부분에 붙어 있는 ‘서문’에 집중해보는 것이다. 그는 ‘나만 따르라’ 식의 완벽히 정돈된 서문보다는 글쓴이의 불안함과 초조함이 깃들어 있는 서문이 더 매력적이라고 말한다. 그런 서문에는 저자의 고집과 얼굴, 입체성과 인간다움, 무엇보다 ‘각오’가 담겨 있다. “앞으로 내가 만들어낼 것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해서 전전긍긍하면서도 어떻게든 해보려는 호기심과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가 거기에 있다.

여전히 책 속에 길이 있을까? 확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아마도 좋은 책에는 우리가 길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불안한 마음으로 현재 위치를 재점검하고, 우리가 지나고 있는 그 길의 표식을 읽어내려는 무수한 시도가 있을 것이다. 지금의 불안과 실패를 마주하려는 치열한 분투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책만이 끝내 우리를 감동시킬 것이다.

 

박동수 사월의책 편집장·철학책 편집자

 

*철학책 편집자 박동수가 ‘지금 한국 한복판에서 일어나고 있는 철학 이야기’를 전합니다. 4주마다 연재.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