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맛이 무섭다”는 유행어가 있다. 서민과 사랑에 빠진 재벌이 등장하는 로맨틱 코미디, 악당을 맨손으로 물리치는(총이 있어도 주먹을 쓴다) 범죄 액션 등, 우리는 ‘아는 맛’이라도 기꺼이 보고 기꺼이 울고 웃으며 즐긴다. “스토리텔링은 없는 것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을 찾아내고 재창조하는 것”(<이야기의 힘>, 황금물고기 펴냄)이다. 모든 작가는 모든 독자처럼 다른 창작물과 설화, 뉴스 등 세상에 존재해온 것, 지금 이 사회에 일어나는 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독자의 가슴을 두드리는 이야기는 ‘아는 맛’과 ‘미처 알지 못한 맛’의 절묘한 배합 비율 속에서 탄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데뷔 10년차 웹툰 스토리 작가 윤(YOON)의 대표작 <유부녀 킬러>는 아는 맛인 것처럼 독자를 유혹한 뒤 매회 강렬한 한 방을 먹인 채 ‘다음’을 기다리게 한다. 제목부터 그렇다. ‘유부녀를 사냥하는 바람둥이’를 연상할 법하지만, 실상은 말 그대로 유부녀인 킬러를 뜻한다. 유부녀가 성적 대상이 아닌 주체다. 조연이 아닌 주연이다. 5년차 유자녀 기혼 여성인 35살 ‘유보나’의 일·가정 이야기가 시트콤처럼 펼쳐진다.
보나의 직장은 청부 살인업자들이 모인 두루미전자 영업3팀. 첫 회는 육아휴직 3년을 끝낸 보나가 딸 율이를 어린이집에 맡긴 뒤 회사로 복귀하는 출근 풍경으로 시작한다. 보나의 또 다른 노동은 연쇄살인·특수강간 등 중범죄를 저지르고도 턱없이 작은 형량을 받은 범죄자들을 처리하는 일이다. 경찰은 그에게 희대의 살인마 ‘킹피셔’라는 이름을 붙였다. “불륜물인 줄 알았다”는 첫 회 ‘베스트 댓글’은 아는 맛에 배신(?)당하고도 즐거운 독자의 환호성이다. 2024년 4월23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윤 작가는 “어떻게 하면 독자님들의 뒤통수를 칠 수 있을지 늘 고민한다(웃음)”고 말했다.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했는데 그림에 재능이 없다는 것을 느끼고 문예창작과(소설 전공)로 편입했다고요. 창작자가 자기 재능을 스스로 판단하고 경로 전환하기가 쉽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림 재능이 없다는 건 플래시 애니메이션 회사에 다닐 때 느꼈는데, 엄청나게 어려운 결심을 하고 진로 변경한 건 아니었어요. 그림이나 글이나 무언가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표현 도구를 바꾸는 정도로 생각했어요. 붓으로 글씨를 쓰다가 답답해서 펜으로 바꾸는 느낌이랄까요? 그래서 전환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대학원에 문화콘텐츠 전공으로 진학해 지도교수 영향으로 여러 분야 스토리텔링을 경험했다고 했는데, 웹툰에 끌린 이유는 무엇인가요.
“어릴 때부터 만화를 좋아하고 많이 보고 자랐습니다. 학교가 끝나면 만화책방에 들르는 것이 일상이었죠. 소년만화를 좋아했고 ‘원나블’(<원피스> <나루토> <블리치>의 첫 글자 모음) 세대예요. 2014년 데뷔작 <야수의 노래>가 소년 성장 판타지물인 것도 그 영향이죠. 웹툰을 선택한 뚜렷한 계기가 있었다기보다는, 떠오른 이야기(<야수의 노래>)가 액션이 많아 만화에 적합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웹툰 스토리텔링에 관심을 갖게 된 것 같아요.”
두 번째 작품 <하르모니아>가 연재 중일 때 <유부녀 킬러>가 시작됐고, 이 작품이 완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새 작품(<그때 우리가 조아한>)을 선보였어요. 작품 구상 과정이 어떤지 궁금해요.
“새로운 이야기의 아이디어가 생각날 때 마음속 화분에 씨앗을 심습니다. 씨앗의 형태는 장면, 문장, 캐릭터, 세계관 등 다양한 모습입니다. <유부녀 킬러>는 설거지하다가 캐릭터·제목이 함께 떠올랐고, <하르모니아>는 ‘시간을 거꾸로 사는 사람이 있으면 어떨까’라는 자잘한 아이디어가 발전해서 ‘늙지 않는 세상’이라는 세계관으로 이어졌어요.
마음속 화분이 여러 개 있는데 일단 씨앗을 심은 뒤 오랜 기간 물을 주며 꾸준히 살을 붙이는 거죠. 이야기를 풍성하게 할 설정이나 상황이 떠오르면 ‘이 화분에 이걸 덧붙이면 재밌겠구나!’ 하고 물처럼 따라줘요. 차기작을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그중 가장 튼튼하고 적합한/시의적절한 화분을 골라 단기간 집중 성장시킵니다. 보통은 집중 성장 기간에 처음 씨앗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곤 해요. <하르모니아>는 세계관이 크다보니 이야기나 장면이 잘 떠오르지 않아서 장소를 섬으로 한정해버리는 방식으로 성장시켰죠.”
데뷔작 <야수의 노래> 연재 중인 2016년 인터뷰에서는 다른 일과 병행한다고 했는데, 언제 전업작가가 됐나요.
“데뷔작 연재 때는 대학원 지도교수님과 지역 문화 스토리텔링 사업에 참여하고 논술학원 강사로 일하기도 했어요. 스토리 작가는 그림 작가보다 육체적 노동이 적은 대신 원고료를 덜 받아요. 저는 <하르모니아>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전업작가가 됐습니다. 그 후로 쭉 수익이 조금씩 넉넉해졌고요. 어느 정도의 수익이 충족된 뒤부터는 다른 일을 병행할 이유와 시간적 여유가 없어졌어요. 그 시간에 차라리 작품 하나를 더 하자는 마음이고요. 현재는 작업 외에 가끔 특강을 나가는 정도입니다.”
<하르모니아> <유부녀 킬러>에서는 저격수, 특전사 등 액션 장르에 익숙한 캐릭터가 많이 나와요. 캐릭터나 이야기와 관련해 어떻게 취재(자료 조사)하나요.
“제가 액션에 익숙한 캐릭터를 좋아하고 재미있어해 그런 캐릭터가 여럿 나오게 됐어요. 사격술이나 무술, 특수부대 기초 지식 정도 공부하긴 했지만 대단히 열심히 판 건 아니었고요. <유부녀 킬러> 시즌4를 준비하면서 스나이퍼 관련 공부를 더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하르모니아> 때는 같은 대학 약학과 교수님을 무작정 찾아간 적도 있어요. 학과 사무실에 부탁해서 약속을 잡고 작은 선물을 사들고 갔는데 이야기에 구멍이 많을 것 같아서 부끄럽더라고요. 그럼에도 설명을 잘해주셔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유부녀 킬러> 보이스피싱 관련 에피소드에서는 주인공 보나가 시어머니 선자의 피해를 막는데요. 그건 실제로 시골 마을에서 시어머니 통장을 들고 도주하는 범인을 오토바이로 추격해서 잡은 며느리 이야기를 뉴스에서 보고 구상했고요.”
김효실 기자 trans@hani.co.kr
◆<유부녀 킬러> <그때 우리가 조아한> 윤(YOON) 작가 인터뷰는 다음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
‘인소 감성’ 최대치 <그때 우리가 조아한>이 재밌는 이유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5534.html
윤 작가는 스토리를 담당하고 그림작가들과 협업한다. <야수의 노래> <하르모니아>로 연달아 협업한 JINU 작가와는 웹툰 작가 지망생이 모인 인터넷카페에서 만났다. <야수의 노래>는 두 사람 모두의 데뷔작이다. 검둥 작가는 윤 작가로부터 <유부녀 킬러> 제목과 보나 캐릭터 설정(낮에는 사람을 죽이는 킬러, 밤이면 아이를 키우는 엄마)을 듣자마자 협업을 수락했다. <그때 우리가 조아한> 움비 작가는 윤 작가가 연재하고 싶은 이야기가 떠오르자 무작정 움비 작가의 트위터(현 엑스)에 디엠(DM)을 보내면서 연결됐다.
협업 방식은 큰 틀에서 비슷하지만, 윤 작가가 그림작가에게 시나리오(글 콘티)를 제공하느냐, 그림 콘티를 제공하느냐에 따라 세부 절차가 다르다. 그림작가와 상의해 이야기가 덧붙여지거나 바뀌기도 한다. <유부녀 킬러>에서는 검둥 작가가 좋아하는 캐릭터 ‘범성훈’의 분량이 늘었다. 웹툰 플랫폼 담당자에게 최종 파일을 전달하기 전 식자 작업을 포함한 점검은 어느 작품이든 윤 작가가 해왔다.
<그때 우리가 조아한> 시즌2부터 그림 콘티 작가, <유부녀 킬러> 시즌4 준비부터 스토리 보조 어시스턴트 2명을 구해 함께 작업 중이다. 윤 작가는 2025년쯤 스토리 전문 회사를 설립하고 싶다고 했다. “양질의 스토리를 더 안정적으로 제공하고 싶기 때문”이다. “현재는 제가 만든 스토리로 그림작가를 구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그림작가가 원하는 스토리를 써줄 수 있는 작가가 되고 싶어서 노력 중입니다. 웹툰 외의 다른 매체 스토리텔링에도 관심이 있고요. 그 과정 중의 하나라고 봐주세요.”
<야수의 노래>(그림 JINU) 2014년 8월16일~2017년 8월1일 레진코믹스에 연재.
고등학생 윤호가 살아 있는 채로 이승과 저승의 경계 ‘시왕국’에 간 뒤 벌어지는 모험 이야기. 다양한 한국 설화를 활용한 판타지 액션 소년 성장물.
<하르모니아>(그림 JINU) 2018년 4월5일~2020년 7월23일 네이버웹툰에 연재.
21세기 인류는 노화방지약 ‘하르모니아’ 개발로 영생을 얻었다. 하지만 약 개발 18년 뒤 약의 치명적인 부작용이 발견돼 디스토피아가 시작된다.
<유부녀 킬러>(그림 검둥) 2020년 5월16일부터 카카오웹툰에 연재 중.
5년차 기혼 여성이자 희대의 암살자 ‘킹피셔’ 유보나의 이중생활. 대한민국 콘텐츠 대상 만화 부문 한국콘텐츠진흥원장상(2021년), SC웹툰어워즈 최고 웹툰상(2023년) 등 수상.
<그때 우리가 조아한>(그림 움비) 2022년 1월29일부터 카카오웹툰에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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