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서구에 사는 프리랜서 정아무개(32)씨는 우여곡절 끝에 서울시가 2024년 1월 말 출시한 기후동행카드를 구할 수 있었다. 우여곡절이라고 말한 건 정씨가 평소 축의금 낼 때만 현금을 쓰는 생활 방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기후동행 실물카드 품귀 현상이 생겨서이기도 하다. 대중교통 정기권인 이 카드는 현금으로만 살 수 있고, 지하철역 교통카드 충전 역시 현금으로만 가능하다. 정씨가 현금을 갖고 나온 날은 카드 물량이 동나서 사지 못했고, 반대로 카드 재고가 있을 땐 정씨가 현금을 넣어둔 가방을 메고 오지 않아 엇갈렸다. 정씨는 “요즘은 전통시장에서도 카드나 계좌이체로 결제하기 때문에 지갑도 안 들고 다닌다”며 “굳이 현금자동입출금기를 찾아서 현금을 뽑고, 지하철역 교통카드 충전기에서 충전하려니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었다”고 말했다.
코로나19 대유행은 전세계에서 진행 중인 ‘현금 없는 사회’를 가속화했다. 한국 역시 현금 이용률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한국은행이 2021년 전국 만 19살 이상 3536명에게 조사한 ‘지급수단 및 모바일금융서비스 이용행태’ 분석 결과를 보면, 현금 이용 비중(건수 기준)은 2013년 41.3%에서 2021년 21.6%로 줄었다. 현금 이용은 훨씬 결제가 편리한 신용·체크카드, 계좌이체, 간편결제 서비스 등으로 대체됐다. 국내 간편결제 시장 규모의 가파른 성장세를 고려하면 2021년 이후 비현금 거래 비중은 더 늘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 흐름에 역행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최근 전세계 2030세대 사이에서 현금을 사용하는 생활이 확산하는 것이다. 영미권에서는 2021~2022년 틱톡과 인스타그램 등에서 ‘현금 분류’(Cash Stuffing) 챌린지가 유행했다. 과거 신용카드 사용이 일반화하지 않았을 때 현금을 목적에 따라 봉투에 나눠 담고 사용하던 재테크 방식이다. 영미권 국가뿐 아니라 일본, 대만, 필리핀 등 동남아 국가 등에서도 이런 방식이 유행하고 있다. 이 흐름을 타고 국내에서도 2023년부터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현금생활’(현생)이 퍼지기 시작했다. 월세와 관리비 등 고정지출을 제외한 나머지 한 달 생활비를 식비·의복비·경조사비 등 항목별로 나눠 한 달 예산을 세우고, 이 나머지 생활비는 현금으로만 지출하는 것이 핵심이다. ‘현생족’은 한 달 예산을 다시 주간·일간 등으로 나눠 짜고, 모든 지출을 되도록 현금으로 한다. 남은 돈은 저축한다.
이 생활 방식의 가장 큰 장점은 소비 습관을 되돌아보게 해서 자연스레 돈을 절약할 수 있게 한다는 점이다. 2024년 초 SNS를 통해 현생을 알게 된 박지수(24)씨는 2월부터 현생 대열에 합류했다. 한 달 지출이 부모님께 받는 용돈보다 20만원을 초과하면서 이전에 자신이 모으던 적금에 손댔던 일이 계기가 됐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절약 효과는 톡톡히 체감하고 있다. 박씨는 “현금생활을 시작한 2월엔 초과한 비용이 5만원 수준”이라고 했다. “아무래도 배달의민족, 쿠팡, 지그재그, 네이버스토어 등 전자상거래를 이용하면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그만큼 돈이 있으면 바로 결제하게 된다. 생각해보면 지금 꼭 나한테 필요한 소비가 아닌데, 단순히 일차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무분별한 결제가 많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직장인 이수영(32·가명)씨도 2월 중순부터 현생을 하면서 자신의 지출 규모와 소비 습관을 정확히 파악하게 됐다. “신용카드를 쓸 땐 돈이 눈에 안 보이니 카드값이 얼마인지도 모르고 막 썼다. 현생은 현금이 바로바로 나가는 게 눈에 보이니 조금 덜 쓰고, 돈을 모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씨는 3월부터 쓰고 남은 돈을 모으는 저축 항목 외에 한 달에 10만원씩 저축하는 정기적금 상품에도 가입했다.
카드 사용이 현금보다 더 큰 비용을 지출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과학 연구로도 뒷받침된다. 2021년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연구진이 기능성 자기공명영상(fMRI)을 통해 뇌의 활성화 부위를 관찰한 결과, 결제 수단으로 신용카드를 쓸 때 뇌의 보상중추인 선조체가 더 활성화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험 참가자들은 현금보다 카드를 사용할 때 훨씬 더 비싸고 더 많은 물건을 구매하려 했다.
현생을 이어가는 또 다른 동력은 재미다. 돈을 모으는 재미뿐만 아니라, 절약이 미적 행위와 놀이가 되는 것이다. 현생을 하는 이들은 ‘다꾸’(다이어리 꾸미기)를 하는 것처럼 현금을 보관하는 다이어리 바인더 속지를 정성껏 만들고, 파스텔톤의 레트로 기계식 계산기로 정산하는 과정을 SNS에 공유한다. 같은 현생족끼리 서로 응원과 노하우를 주고받기도 한다. 직장인 신현아(32)씨는 저축도 저축이지만 현생을 하면서 느끼는 만족도가 크다. 신씨는 “속지를 만드는 게 번거롭지만, 만들고 난 뒤에는 뿌듯함이 있다”며 “예쁘게 꾸며서 쓰는 즐거움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이수영씨도 “현금생활이 디지털이기보다는 아날로그라서, 아날로그적 계산기를 사용하면 좀더 재미있는 것 같다”고 했다. 현생에 필요한 각종 용품을 판매하는 쇼핑몰 ‘슬기로운 현금생활’의 홍혜원 대표는 “지난해보다 매출이 4~5배가량 더 늘었다”며 “이전엔 30대가 가장 많았는데 현금생활이 유행하면서 최근엔 구매층 연령대가 점차 낮아지면서 다양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현생의 가장 큰 난관은 ‘현금 없는 시대’ 자체다. 현금 없는 버스, 현금 없는 매장, 키오스크 확대 등으로 현금 결제가 불가능한 곳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2023년 4~5월 두 달 동안 현생을 했던 직장인 김보미(33)씨는 시작 첫 주부터 현금지출의 어려움을 깨달았다. 친구나 회사 동료들과 식사한 뒤 한 명이 카드를 긁고 나머지가 자기 몫을 이체하곤 했는데 “현금으로 줘도 돼?”라고 물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렸다. 결국 인출한 생활비에서 외식·모임 비용은 다시 통장에 넣어서 이체하는 방식으로 생활했다. 또 같은 물건이라도 온라인에서 최저가로 팔 때는 비현금 결제를 하되, 나중에 현금을 다시 계좌로 이체하거나 다음달 생활비로 재배치해야 했다. 박지수씨는 1천원이 넘는 수수료를 내지 않기 위해 제일 가까운 주거래은행 현금자동입출금기까지 왕복 1시간을 오가야 한다.
이런 장벽 때문에 놀이·교육용으로 쓰이는 ‘가짜 돈’(페이크 머니)으로 현생을 하는 이들도 있다. 2023년 2월 6년 동안 다니던 회사를 퇴사한 뒤 프리랜서가 된 한수연(34·가명)씨는 SNS에서 현생 영상을 본 뒤 “무조건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월급쟁이는 ‘선 저축, 후 지출’을 하지만 수입이 일정하지 않은 프리랜서는 지출을 미리 정하고 나머지는 저축하는 방식으로 살아야 했다. 하지만 막상 현금을 사용하는 게 어려울 듯했다. 워낙 카드를 오랫동안 써와서 현금을 쓴다는 게 어색했고 영수증 증빙 관리와 신용카드 청구 할인, 예금이자 등을 포기할 수 없었다.
한씨가 찾아낸 방법은 가짜 돈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결제는 카드로 한다는 점만 빼면 다른 현생족과 다를 게 없다. 가짜 돈으로 한 달 생활비 예산을 세우고 그 예산 안에서만 생활한다. 다만 결제는 신용·체크카드로 하되 영수증을 챙겨서 그날 쓴 금액만큼 가짜 돈으로 정산한다. 회사에 다닐 때 지출을 100이라 한다면, 현재는 지출이 40까지 줄었다. 한씨는 ‘퇴사한 언니’라는 이름으로 블로그·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며 가짜 돈을 이용한 현생 노하우를 공유한다. 초기엔 가짜 돈을 이용한 까닭에 ‘진정성 없어 보인다’는 댓글이 간혹 달리곤 했다.
시간이 갈수록 가짜 돈을 이용해 현생을 하는 사람이 늘면서 한씨에게 조언을 구하는 이도 늘었다. 질문 수준도 달라졌다. “처음엔 ‘이거 어떻게 시작하는 거예요?’를 물었다면,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파킹 통장은 뭘 쓰세요?’나 하루 예산을 매일매일 계좌이체 하는지 일주일 단위로 채우는지 등 구체적인 것을 묻는다.” 한씨는 “많은 사람이 단시간에 큰돈을 만들고 싶어 하는데, 나는 현금생활을 시작으로 너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꾸준히 차곡차곡 돈을 모으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단순히 돈 자체보다 가계부를 써서 예산을 세우고 지출을 관리하는 능력이 길러질 수 있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생활경제 교육·상담을 하는 협동조합 ‘푸른살림’의 박미정 이사장은 “돈을 모으는 것 자체보다, 자기통제력과 자제력을 키우는 것이 왜 중요한지 이해하는 게 훨씬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박 이사장은 “나를 갈아넣어서 돈을 만드는 게 아니고, 내가 돈을 관리할 줄 아는 사람이 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서혜미 기자 h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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