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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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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 since 1986

등록 2023-09-16 02:14 수정 2023-09-22 01:28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조만간 있을 이사를 앞두고 책을 정리하고 있다. 약속 있을 때마다 상대방과 어울리는 책을 선물하거나, 좀 지루해 보이는 책은 중고서점에 파는 식이다. 열심히 읽던 책들을 들춰 보는데 과거의 내가 남긴 낙서가 사뭇 낯설게 느껴졌다. 특히 기본소득과 관련한 메모가 종종 튀어나오는데, 예컨대 이주자의 사회권에 대한 책이라면 “(국적이 아닌 거주 기간이 기준이 되는) 거주자 기본소득이 있다면 어떨까?”라고 적어놓는 식이다. 반면 최근에 책을 읽다가 기본소득을 떠올린 적이 있었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BIEN대회 참여할 때마다 다른 감각

그러던 차에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BIYN) 동료들과 함께 2023년 8월23~26일 이화여대에서 열린 제22차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대회(BIEN대회)에 다녀왔다. BIEN대회는 전세계의 기본소득 연구자, 활동가, 정치인, 지지자 등이 모이는 행사다. 10년 전 내가 기본소득운동에 단단히 매료된 것은 단지 아이디어의 새로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기본소득운동을 함께 고민하는 글로벌 네트워크의 존재 때문이기도 했다. 국경을 넘어 서로 참조할 수 있다는 건 운동에 예기치 못한 영감과 지속적인 활력을 준다.

그동안 여섯 번의 대회에 참여해 시간을 보내며 매번 다른 것을 관찰하고 감각했다. 일찍부터 기본소득 논의가 본격화됐던 서구 유럽 행위자들을 향한 불평등의 감각이든(이 얘기는 <헬조선 인 앤 아웃>이라는 책에서 풀어봤다), 다른 아시아 여성 청년 활동가를 만나 우정을 나누는 기쁨이든, 소중한 휴가를 투자해 공부하러 갔던 핀란드 대회를 땡땡이치고 공원에 드러누워 느꼈던 평화로움이든.

이번에는 역사성이다. 운동의 역사를 기억한다는 것은 정치적 행위다. 논의를 시작한 소수를 특권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운동의 변화 과정을 함께 성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가 퍼져나가고 깊어지는 시간, 그 시간이 끊이지 않도록 애썼던 다양한 사람들의 존재가 마음에 들어왔다. 기술 발전과 함께 변화한 논의 방식 또한 인상적이다. 개회식에서 기본소득에 관심 가진 학자들이 처음으로 국제 모임을 갖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었다.

“전자우편이라는 것을 시도했는데 만약 전자우편이 도착하지 않았다면 알려주세요. 하드카피(인쇄 자료)로도 준비해뒀으니까요.” 필리프 판 파레이스 교수가 전자우편이 무사히 전송될지 조마조마해하며 가이 스탠딩 교수에게 팩스로 자료를 보내던 1986년부터, 천장에 내장된 마이크와 서너 대의 카메라가 구비된 강의실에서 온·오프라인 하이브리드로 진행한 이번 대회까지를 돌아봤다. 발표자의 출신 지역과 언어권이 다양해진 것을 보며 참 오랜만에 기술에 긍정적 감정을 느꼈다. 언어의 장벽을 넘도록 도와준 동시통역이라는 기술도 마찬가지.

지겨워지지 않을 이야기

언젠가부터 기본소득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어느 순간 작가의 손을 떠나 스스로 움직이는 이야기 속 캐릭터처럼 느껴진다. 기본소득은 완성돼 고정된 아이디어가 아니고, 정치인 한두 명이 독점할 수 있는 의제도 아니기 때문이다. 팬데믹 이후 부상한 재난 기본소득이나, 기후위기 시대에 생태적 지속가능성과 함께 논의되는 데서도 보이듯 시대와 함께 변화한다. 기본소득의 구성요소인 ‘보편성’과 ‘무조건성’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도 거듭 질문받는다. 그렇기에 숙고할 시공간이 필요하다. BIEN대회는 기본소득이 논의되는 시간적·공간적 맥락을 붙잡아 쌓으려는 노력이 응축된 자리다.

거기엔 이론과 정치가 얽혀드는 현장에 필연적인 갈등을 직면하며 집요하게 토론하는 자세에서 오는 감동이 있었다. 언젠가 기본소득 이야기가 지겨워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야기를 계속하는 건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게 아니었다. 그건 결코 지루한 과정이 아니며, 세상의 한복판에서 도피하지 않고 머무는 일임을 알겠다.

김주온 BIYN(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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